이하 존칭어는 생략됩니다.
가볍게 읽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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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물 줘" 잠에서 깬 딸 2호가 말했다.
마음속 심연에서 올라오는 악감정을 누르고 또 눌렀다. 애가 자다 깨서 물 달라는 게 무슨 문제냐고 할 수 있겠지만, 5분 간격으로 4번째라면 이해가 좀 되려나?
딸쌍둥이 육아빠로 산지 37개월째다. 육아빠라고 자칭하는 이유라면 아내는 직장인이고 나는 프리랜서라 그렇다. 더 쉽게 말하자면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는 직업 덕분에 일보다는 육아를 더 많이 하고 있어서다. 그렇다. 나는 아이들의 주 양육자다. 그래서 '아빠가 육아에 많이 참여하시네요' 등의 말을 들으면 감정이 곤두선다. ‘뭔 소리야... 돕긴 누가 누굴 도와 내가 다 하고 있는데...’라며 눈앞에 자막이 올라가며 말이다.
흔히 자식을 낳아 기르면 어른이 된다고들 하는데, 부모가 되보니 이 말이 참말이다 싶다. 책임감, 무게감 같은 거창한 말은 치우고 자신의 맨얼굴을 낱낱이 볼 수 있어서라고 생각한다. 내가 얼마나 찌질한 인간이었는지, 내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육아를 해보면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육아를 ‘나와 마주하는 시간이자 나를 닦는 경험’이라고 한다.
오후 5시가 되면 아이들 저녁을 준비한다. 아이들은 오후 6시면 하원하는데, 그전에는 준비를 마쳐야 한다. 딸들이 집에 돌아오면 밥을 차려 먹이고 씻기고 놀아준다. 아내는 밤 10시는 되어야 집에 돌아오니 아이들 잠자리까지 내 몫이다. 보통 밤 9시 30분이면 아이들 이부자리를 편다. 아이들 재우기는 어렵지 않다. 젤리만 먹고 양치를 하지 않으면 이가 썩는다거나 싸우면 안 된다거나 따위의 교훈이 담긴 이야기를 들려주며 재운다. 내 이야기가 끝나면 아이들끼리 돌아가며 자유 발언을 시작한다. 일종의 언어 훈련인 셈인데, 제법 나와 비슷하게 따라 하는 아이들을 보면 신통하다 싶다. 이야기가 끝나면 ‘누가 먼저 잠드나 놀이’를 이어서 한다. ‘하나 둘 셋!’ 외침과 동시에 빨리 잠드는 사람이 이기는 놀이다. 보통은 2호가 금메달을 따고 1호는 동메달을 목에 건다. 이렇게 늦어도 30분 정도면 딸 둘과 나까지 모두 잠든다.
꿈나라 세상을 탐험하다 보면 눈이 떠진다. 보통 새벽 4시에서 5시 사이다. 아이들이 깰까 싶어 조심스레 자리를 빠져나오면서 내 일과가 시작된다. 하루의 절반을 아이들과 집안일에 할애해야 하는 만큼 남은 시간 동안은 철저하게 욕구 조절을 한다. 농땡이치고 싶다거나 ‘사람이 그립다’ 거나와 같은 사사로운 감정과 행동을 단속하지 않으면 할 일을 못한다. 주 69시간도 부족한 프리랜서의 비애랄까? 아무튼 스스로를 조절하는 이 리듬이 깨져버리면 나는 분노의 화신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항상 아슬아슬한 감정의 교차점에 서 있는 상태이다. 일과 생활의 균형이 깨지는 순간 헐크가 돼버리는 그런 아빠 말이다.
이렇게 육아빠의 삶을 사는 내가 마주한 그 사건은 지난달이 끝나던 날에 일어났다. 시계가 새벽 3시를 가리켰을 때 딸은 물을 달라며 나를 깨웠다. 내 아이들은 세 돌이 넘었어도 새벽에 한두 번씩 깨서 여러 가지 주문을 하신다. 그러니까 나는 3년째 통잠을 못 자고 있는 셈이다. 아무튼 새벽에 아이들이 나를 부려 먹기는 늘 있는 일이라 신경이 거슬리지는 않는다.
문제는 그 주문이 한 번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미리 준비해둔 물을 먹이고 다시 재웠지만 5분이 지나자 또 일어났다. 그리고 또 5분, 이어서 5분 뒤에도 딸 2호 님은 내게 물을 달라고 보챘다. 나는 중요한 일정을 앞두고 있어서 예민했다. 거기에 깊이 잠을 자지도 못한 상황이 펼쳐지니 마음 상태가 평온할리 없었다. 이럴 때면 ‘왜 내 인생은 이 모양인가’부터 시작해서 ‘못 해먹겠다’까지 불평과 자조 섞인 화가 뒤섞여 아비규환을 이룬다. 그리고 내 안에 잠든 괴물이 눈을 뜨기 시작했다. ‘ㅅㅂ’를 좋아하는 괴물이...
이 순간은 감정을 몸을 던지느냐, 이성을 붙잡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 감정과 동화되면 한밤중에 칼춤추는 아빠가 될 것이고 이성과 손을 잡으면 자비롭고 사랑이 넘치는 아빠가 될 수 있다. 전자는 그냥 짜증을 부리면 되고 후자는 ‘왜’라고 질문을 하면 된다. 대다수 사람들은 감정과 손을 잡는 모양이다. 왜냐고? 쉽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 인간을 ‘인지적 구두쇠’라고 말하듯이 생각하는 동물인 인간은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니 ‘왜?’라며 이성적인 생각을 하기보다 ‘아 ㅅㅂ 못 해먹겠네’라고 소리치기가 편한 것이다.
그럼에도 ‘왜?’를 선택하면 얻는 것이 있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천리안 같은 것이랄까? 그래서 나는 ‘왜’하기를 연습해 봤다. 꽤 오래전부터 말이다. 감정이 팽팽해질 때면 스스로에게 ‘왜?’를 네댓 번 반복해 대답을 해보면 된다. 예를 들면 이렇다.
왜? 나는 화가 났나? = 바쁜 일과와 지금까지 쌓인 스트레스 탓이다.
왜? 그게 아이 탓인가? = 아니 이건 내 문제지, 딸아이가 만든 문제가 아니다
왜? 아이는 날 생각해 주지 않는가? = 이제 아기 티를 벗은 어린아이다. 이타적일 수 없다.
왜? 화를 내면 문제가 해결되나? = 그렇지 않다. 아이도 속상하고 나도 속상하고 심지어 아내도 속상해할 것이다.
이렇게 물음과 답을 하다 보면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고, 분노는 잦아들며 이성은 우뚝 선다. 나는 ‘왜’ 하기를 선택했고 아이에게 ‘우리 딸 목이 말랐나 보네 이것만 마시고 자자’라며 부드럽게 말해줬다. 다행히 딸 2호는 4번 만에 깊은 잠에 들었다.
아이를 낳아 기르면 부모는 정말 어른이 된다는 말은 이런 상황을 매일 겪기 때문이 아닐까? 다만, 누군가는 짐승을 깨울 것이고 누군가는 부처가 되기를 선택할 것이다. 선택은 각자에게 달렸다. 부디 오늘은 시험에 들지 않고 평온하게 잘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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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키워도 어른이 되지 않는 사람도 많더라구요.ㅎ
자신이 어떻게 성장하는지는 자신의 깜냥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는 그런것도 없었네요.
이상하게 저희 딸도 자다가 그렇게 물을 찾습니다.
아들은 그런적이 없는데 말이죠....
아들은 물 마셔라, 마셔라 해야 마시구요.. ㅡㅡ;;;
핑크퐁에서... 티니핑으로 넘어가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요...
자다가 바나나! 사과! 오렌지!!!!!!!! 등도 외칩니다.. 주로 먹는걸 찾는데 엄마! 도 뭐 당연하구요
궁금한게 있는데 딸은 침을 좀 덜 흘리나요? 저희 아들 둘은 둘 다 침을 엄청나게 흘려대서..여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