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경한지 20년이 다 되어갑니다.
대전에서 태어나 27년 살고 올라왔으니, 지금껏 살아온 시간의 절반을 수도권에서 보낸 셈이 됩니다.
처음에는 금호동이었습니다. 그러고는 천호동 그다음에는 봉천동 그다음에는 이태원, 마지막은 창동이었습니다.
서울 서쪽을 제외하고 골고루 이부자리를 옮겨 다녔네요.
봉천동에 살았을 때 뱅뱅사거리로 출퇴근을 했습니다.
애증이 뒤섞인 첫 직장이자 두 번째, 세 번째 직장이 있던 곳입니다.(두 번이나 퇴사하고 재입사를 반복했다는 소리입니다.)
지하철을 타고 갈 때도 있었지만, 귀차니즘이 온몸을 휘감을 때면 나름 사치 좀 부려보겠다고 택시도 탔습니다.
정확한 시기가 떠오르지는 않지만, 한 택시 기사님이 기억 한구석에 남아 있네요.
급한 마음에 잡아탄 그 택시는 처음에는 몰랐지만, 이내 심상치 않음을 느꼈습니다.
제가 연초를 태우지 않아서 미세한 담배 향도 느끼는 편입니다.
택시를 타면 의례 그런 퀴퀴한 담배 냄새가 나기 마련이었는데, 그 택시는 정말 나지 않더군요.
그리고 금세 코를 간질이는 향이 느껴집니다.
냄새에 민감한 저는 마트에서 파는 싸구려 방향제에는 두통을 일으킵니다만, 그런 향이 아니었습니다.
분명 자연스러운 향기였는데 운전석을 슬쩍 보니 조그만 디퓨저가 있더군요.
어라? 실내 세차도 말끔합니다? 정갈한 발 매트에,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는 실내가 마치 모범택시 같았습니다.
착각하고 잘못 잡았나 싶어 실내를 둘러봐도 모범택시는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기사님이 편안하게 운전을 하더군요. 급정거 급출발 급한 차선 변경 같은 건 전혀 없었습니다.
마치 대접받는 기분으로 승객석에 앉아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보기 드문 운송 서비스를 제공하던 기사님이 궁금해 슬쩍 운전석을 보니, 정장을 입고 있더군요.
단정한 슈트에 넥타이까지 말입니다.
저는 이런 낯선 상황을 마주치면 호기심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기사님 기분 좋으신 일 있으신가 봐요 실내도 깨끗하고 운전도 참 매너 있게 하시고요"
"아? 그래요? 고맙습니다. 칭찬해 주시니 기분이 좋네요."
그렇게 시작한 스몰토크는 소크라테스식 문답법으로 이어갔습니다.
"기사님 이렇게 점잖게 서비스를 하시는 비결이 뭘까요?"
역시나 기사님의 말문이 폭포수처럼 쏟아지더군요.
"어휴... 별거 아닙니다. 제가 주로 새벽에 일하고 점심 먹고 집에 가거든요? 이렇게 아침에만 주로 일을 하다 보니까. 손님처럼
회사 다니는 사람들을 태우게 되더라고요. 저도 회사 생활했지만, 출근길이 그리 기분 좋지만은 않잖아요? 그래서 이왕 아침에 일하는 거 내 차 타면 출근길 망치지 않게 해줘야겠다 생각하니까. 그리되더라고요."
그렇습니다. 그는 최소한 승객의 기분을 해하지 않게, 실내 세차도 운전도, 향기도 신경 썼던 겁니다.
그리곤 이렇게 마무리를 하더군요 "저는 제 일이 손님의 아침을 여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소름 끼치는 말이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한다고 답할 수도 있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분명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었던 거죠.
저런 생각으로 일을 하니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나오고 얼굴 표정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승객석에서 본 기사님의 뒤통수는 마치 따뜻한 해님 같았지요.
그 뒤로 일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일을 왜? 나는 이 일로 무엇을? 나는 이 일로 어디를?' 이런 질문을 그 스스로 하고 답을 내리는 시간을 종종 가졌지요.
이 택시 기사님뿐만이 아니라, 제 주변에서 자기 영역에서 좋은 성과를 내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런 '관'이 있더군요.
그 관점으로 그 사람만의 '세계'를 열고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전문가'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가치관으로 삶을, 일을, 관계를 맺고 살아가나요?
오늘의 생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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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연 소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무슨 일이던 업력이 오래 될수록 부정적인 감정에 빠지기 쉬운데.
대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