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일부)호남정치인들과 첫 충돌했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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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떠난 그 해 1 월에는 3 당합당 사건이 있었습니다.
3 당합당 사건이란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갑자기 한 자리에 모여 만세를 부른 사건을 말합니다.
내 기억이 맞다면 1990 년 1 월 22 일 이었을 겁니다.
이 만세사건이 발생하기 9 개월 전인 1989 년 4 월,
나는 전국단위로 재결집한 재야(진보진영) 본부 기관지에 차별적 보수대연합을 처음 예견한 칼럼을 쓴 적이 있습니다.
차별적 보수대연합이란 군사독재정권이 양김(兩金) 중 하나와 연대하여 다른 하나를 고사시키는 정계개편공작을 말합니다.
양김이란 말을 모르는 분들도 있을터인데, 양김(兩金)이란 김대중-김영삼을 말합니다.
그때만해도 지금처럼 맛이 가지는 않았던 조선일보에서 내가 쓴 칼럼을 '재야의 시각'이라며 인용보도하기도 했습니다.
인터뷰 요청이 왔지만 거절했습니다.
말이 인터뷰지 자기들도 감을 잡고 있었을 차별적 여야합당 움직임의 단초를 파악할 수 있는 또다른 정보라인을 캐내보기 위한 수작이 뻔했습니다.
제 예견 중 빗나간 대목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나는 노태우 정권의 합당공작대상을 평화민주당(김대중)으로 판단했었는데, 결국 통일민주당(김영삼)이 최종 합당대상으로 결정된 것 입니다.
영호남보수연합을 비밀리에 추진하던 박철언 라인이 반DJ 군부강경파와 서동권 안기부라인에 의해 제동이 걸린 결과였다는 것을 나중에야 전해 들었습니다.
기사아래 적힌 이름이 내 본명은 아닙니다.
내멋대로 지은 가명이었습니다.
사진에서 잘린 옆 기사 문익환 목사 방북문답기사를 쓴 정시진도 본명이 아닙니다.
내 본명은 아무도 모를테고,
최근 다시 활동을 시작한 정시진 씨 본명은 그와 상관없는 이 글에서 굳이 밝힐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당시 노동계와 호남지역에서 내가 쓴 시론을 두고 본부측에 강력한 항의를 해왔습니다.
왜 노동자 농민 이야기가 아닌 정치적인 칼럼을 저 중요한 시론에 실었느냐는 것이 노동계의 항의였고,
근거없이 DJ 행보를 비판한 글을 왜 실었느냐는 것이 평민당 일부 의원들과 호남지역 단체들의 항의였습니다.
"그것도 어른이 아닌 20 대 아이가 쓴 글"을..
두 달 후 같은 란(시론)에 내가 천안문사태를 맹공한 칼럼을 다시 싣자 아예 나를 본부 편집위원 자리에서 자르라고 압력을 가해왔습니다.
역사에 가정은 의미없지만 만일 말이죠.
만일 그때 삼당합당이 DJ 로 되었다면 향후 한국 정치판과 지역대립구도가 어떻게 변화했을까요?
왜 노태우와 박철언은 김영삼보다 DJ를 더 선호했을까요?
아이러니지만 전두환도 김영삼보다 DJ를 인간적으로 더 신뢰했다는 것 역시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긴 합니다.
1980 년대 후반,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막대한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Core’ 에서의 열정적인 마지막 나날들을 보냈던 시기에 직접 겪었던 에피소드 하나 소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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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마지막 나날을 진보진영 총본산에 있으면서 일부 노동운동단체 활동가들의 교조주의와 권위주의, 그 적나라한 ‘비민주적’ 모습을 처음으로 목격하고 엄청난 실망을 한 적이 있어요. 저 사람들이 지금의 민노총 지도부를 이루고 상당수는 정계로 진출했는데(나이로 보아 은퇴했을지도),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조금 궁금하군요.
이런 후진적 사고의 문제는 한국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고 있는 개선되어야 할 점 입니다. 막무가내식의 지역피해망상증후군도 마찬가지 입니다. 당시 DJ 행보를 비판하면 왜 안 된다는 것인지, 그런 사고방식에 매몰되어 있는 사람들이 무슨 운동을 한다는 건지 나는 지금도 이해가 안 가요.
재미있는 사실 하나는, 당시 저를 끝까지 지지하고 보호하려 했던 분들은 이후에도 계속 민주진영에 남아 지금도 활동하고 있거나 돌아가셨고 (저 옆 글 쓴 정00 씨, 고 김0태 선생 등등), 게거품을 물고 비난하던 분들은 거의 대부분 변절하여 (김0수 씨, 장0표 씨 등등) 엉뚱한 길로 갔다는 거죠.
36 년 전 캐나다에 와서 첫 인상이 좋았던 이유는 경치가 좋고 살기가 편해서가 아니라, 여기서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일 겁니다. 좋은 출발은 나중에 사소한 문제가 생기더라도 해석과 치유가 비교적 수월합니다. 한국에서는 그게 힘들었어요. 한국에 돌아오지 않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보여집니다.
진영의 문제가 아니라, 한 세대가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40 년 전이나 비슷한 패거리문화와 집단주의가 합리적 사고를 무작정 제압하려 들고 있다면 좀 어이가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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