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서론: 서로 다른 토론의 자세와 인식
2편. 서양의 문법: 결투에서 의회까지
3편. 동양의 문법: 한국의 ‘체면’과 일본의 ‘네마와시'(根回し)
4편. 같은 뿌리, 다른 가지: 중국, 인도, 그리고 불교
5편. 상호 인식: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오독하는가
6편. 결론: 혼돈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정교함
3편. 동양의 문법: 한국의 ‘체면’과 일본의 ‘네마와시'(根回し)
한국의 토론, 논쟁 문화를 이해하려면 ‘관계성’과 관계성에 기반한 ‘체면’에 대해 살펴보고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체면’은 서구식 개인 인상 관리(impression management)와는 사뭇 결이 다릅니다. 어떤 사람의 말이나 행동 그 밖에 밖으로 보이는 여러가지가 그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의 평판에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고 때로는 그 평판의 기주이 되기도 합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처럼···.
그리고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형성하기도 파괴하기도 하는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향이 결국 자기 자신에게 다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한국인에게 ‘나’는 홀로 성립하는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나를 둘러싼 관계망의 총합입니다.
따라서 상대의 논리를 정면으로 부수는 행위는 단순히 그 사람의 ‘주장’을 꺾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사회적 존재 가치(체면)’와 그와 맺어진 ‘관계의 줄기’를 끊어내는 행위로 받아들여집니다. 우리가 논리 뒤에 ‘기분’이라는 완충재를 덧대는 까닭은, 승패보다 관계망의 보존이 나의 생존에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인에게 있어 이 ‘기분’이라는 것은 ‘관계 신호’ 혹은 ‘관계적 맥락’을 뜻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체면 개념을 학술적으로 분석한 연구를 보면, 개념망의 핵심 노드가 ‘관계’로 나타났고, 이 관계는 타인·집단·문화·사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체면은 단순한 개인 윤리가 아니라 관계 안에서 작동하는 조정 장치이자 문화적 메커니즘인 셈입니다.
그래서 한국인은 자신의 ‘생각’을 앞세우고 거기에 ‘기분’을 얹어 설득하려 하며, 논리의 허점이 있어도 관계의 온도(기분)가 맞으면 관대해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표현은 하되, 그 표현을 관계의 언어로 완충하는 방식인 것입니다.
일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혼네(本音;속마음)와 다테마에(建前;겉마음 혹은 겉치레)를 구별해 쓰는 습관, 타인에게 폐 끼치지 않으려는 메이와쿠(迷惑) 문화는 유교적 예 개념에 더해 고립된 섬이라는 지리적 조건, 자연재해 앞에서 공동체가 뭉치고 결속해야 했던 역사적 배경이 겹쳐 다른 동아시아 국가보다도 강하게 나타난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아주 흥미로운 지점이 하나 더 있는데, ‘네마와시'(根回し)입니다.
본래 나무를 옮겨 심기 전 뿌리를 미리 정리해두는 원예 용어인데, 공식 회의 전에 미리 개별적으로 관계자들을 만나 의견을 조율해두는 관행을 가리킵니다. 즉 공식 토론 자체가 실제 의사결정의 장이 아니라, 이미 비공식적으로 합의된 결론을 추인하는 의례에 가까운 것입니다.
한국과 일본을 나란히 놓고 보면, 한국은 이견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되(생각을 앞세움) 그 표현 방식에 관계적 배려(기분)를 섞어 완충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은 애초에 공개 석상에서 이견이 드러나는 것 자체를 사전에 방지합니다.
표현하되 완충하는 쪽과, 표현 자체를 사전에 차단하는 쪽. 이 네마와시(根回し) 문화는 공동체의 평화를 지키는 방편이면서, 동시에 현대에 와서는 ‘밑작업이 없으면 아무것도 안 되는’ 비효율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나라나 일본이나 똑같이 개인 대 개인의 논쟁에서는 기분이 꽤나 중요하게 작용하는데, 이익이라는 공동의 관심사가 함께 하는 경우 보편적으로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좀 더 포용적인 경향이 있다고 개인적으로는 느꼈습니다.
> 비공식적으로 합의된 결론을 추인
제가 좀 특이한 케이스이긴 할텐데, 이런거 매우 많이 뒤집어 봤습니다. 합의가 아니라 일본 특유의 ”공기를 읽어라“ 라는 문화 때문에 반론이 없어서 그게 합의된거라는 착각에 빠진 경우가 꽤 있더군요.
부족함 많은 글에 좋은 말씀을 덧붙여 주셔서 고맙습니다.
굳이 제 글 내용에 대한 것이 아니더라도 떠오른 생각을 공유해 주시면 함께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경험을 글로 녹여 글을 써 주신다면 그것도 좋을 것 같고요...
사실 문화나 정서 같은 무형의 것을 개념화해서 글로 표현하는 것은 비록 쉽게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긴 하지만 일반화시키는 순간 그것이 오히려 선입견을 만들기도 해서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만, 또다른 면에서는 비교를 해 보는 것이 서로의 차이를 알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선입견 없이 우리 스스로를, 그리고 타자(他者)를 올바로 보고 차이를 극복하고 함께 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진다면 세상이 더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