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서론: 서로 다른 토론의 자세와 인식
2편. 서양의 문법: 결투에서 의회까지
3편. 동양의 문법: 한국의 ‘체면’과 일본의 ‘네마와시'(根回し)
4편. 같은 뿌리, 다른 가지: 중국, 인도, 그리고 불교
5편. 상호 인식: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오독하는가
6편. 결론: 혼돈이 아니라 서로 다른 정교함
2편. 서양의 문법: 결투에서 의회까지
서양 그 중에서도 영미권의 논쟁 문화를 들여다 보면 그 뿌리가 의외로 ‘결투'(duel)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걸 알게 됩니다.
‘결투'(duel)에는 형식적인 규칙이 꽤 강하게 있었고 그걸 어기는 건 비겁한 일로 여겨졌고 패배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로 여겼습니다.
이후 칼이 아닌 총기 대결로 옮겨 가면서도 이 정신은 유지되었습니다.
물론 실제로는 서로 명예만 지키는 선에서 상대를 다치게 하지 않는 관행도 있었다지만, 어쨋건 이건 규칙 바깥의 이야기입니다.
흥미로운 건 영국에서 결투가 쇠퇴하던 시점이, 권투가 성문화된 규칙(퀸즈베리 후작 규칙)으로 대체되던 시점과 겹친다는 것입니다. 명예를 건 격돌이라는 욕구 자체는 사라지지 않고, 그걸 담는 그릇만 점점 덜 치명적이고 더 제도화된 형태로 옮겨간 셈입니다.
영국 의회가 지금도 겉으로는 야유와 고성이 난무하고 혼란스러워 보이면서도, 실은 하원의장이 엄격한 절차 규칙을 강제하는 매우 규율화된 대결 구조를 유지하고 있는 건 이 결투 정신의 제도화된 후예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용은 격렬히 싸우되, 형식은 신성불가침이라는 점에서···.
미국이 이와는 조금 다르게 발전했는데, 절차도 내용도 상대적으로 자유방임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정헌법 1조가 만든 ‘국가나 권위자가 어떤 말이 옳은지 재단해선 안 된다’는 문화, 밀의 ‘사상의 자유시장’론, 여기에 케이블 뉴스의 상업적 인센티브-갈등이 시청률을 만든다는-까지 겹쳐서, 사회자가 내용을 정리하려 들면 오히려 편파적 개입으로 비칠 위험이 있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프랑스는 또다른 결을 보여주는데, 데카르트적 합리주의와 계몽주의 시대 살롱 문화의 영향으로, 사상의 정면충돌 자체를 지적으로 존중받을 만한 행위로 여기는 전통이 만들어 졌다 봅니다.
다만 논술(데세르타시옹)의 정-반-합 구조가 보여주듯, 논쟁의 형식-수사학적 규칙-을 엄격히 존중하는 문화가 함께 있어서, 미국식 난장판보다는 정제된 격돌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결국 ‘서양’이라는 분류 아래에서도 이렇게 서로 다른 그릇들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