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디 진지하게 일독을 권합니다.
최교수님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바가 정말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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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배신하는가?(1편)_윤석열과 검사들의 경우] by 최동석 교수님 : 클리앙 (clien.net)
[왜 배신하는가?(2-1편)_김명수와 법관들의 경우] by 최동석 교수님 : 클리앙 (clien.net)
[왜 배신하는가?(2-2편)_김명수와 법관들의 경우] by 최동석교수님 : 클리앙 (clien.net)
[왜 배신하는가?(2-3편)_김명수와 법관들의 경우]
앞선 글에서 독일식 조직의 특징은 조직 상층부의 일인이 독점적 권력을 향유할 수 없도록 〈네트워크형 수평구조〉로 설계된다는 점을 설명했다.
이에 반해 한국식 조직은 〈피라미드형 계급구조〉로 설계되는 바람에 나쁜 마음을 가진 인물이 상층부를 차지하면 돌이킬 수 없는 사회적 폐해가 발생한다고 말했다.
나는 계급구조와 수평구조의 근본적 차이와 그 운영원리에 대해 이해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안다. 한국인은 조직의 수평구조가 어떻게 가능한지 상상하는 것조차 어려워한다.
우리에겐 사회, 경제, 문화, 정치 등 모든 부문에서 서열화·계급화·차별화·경쟁화(서계차경, 序階差競)가 점점 심해지고 있어, 일생에서 단 한 순간도 이런 환경을 벗어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모두들 극심한 서계차경(序階差競)에 시달리고 있다. 우리는 반드시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네트워크형 수평조직〉이란 무엇인가?
독일 법원에서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는 수평적인 조직을 볼 수 있다. 독일은 대부분의 민·형사 재판을 참심제로 운영한다. 참심제란 법률가가 아닌 25세와 75세 사이의 평범한 시민 중에서 선발하여 직업법관과 같은 권능을 가지고 재판에 참여하는 제도를 말한다. 직업법관 3명과 참심법관 2명이 합의부를 구성하여 재판한다. 물론 직업법관 중에서 재판장을 맡는다. 참심법관을 명예법관이라고도 부른다.
참심법관들은 법리에 익숙하지 않아 재판에서의 영향력이 적다는 것을 독일인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참심제를 유지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재판을 법률가 집단에만 맡기는 것의 부작용을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참심제가 시민들의 보편적 상식에서 벗어난 판결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브레이크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어처구니없는 판결문 때문에 사회적 이슈가 되는 경우란 거의 없다.
이런 장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법적 판단도 정치적 판단만큼이나 시민들의 영향력 하에 있어야 한다는 국민주권(Volkssouveränität, people's sovereignty)의 의미를 갖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독일 법원의 판결문은 반드시 〈국민의 이름으로 Im Namen des Volkes〉라는 문구로 시작한다. 국민의 이름으로 심판한다는 의미임과 동시에 사법권력 또한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국민주권의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이렇듯, 직업법관과 참심법관의 관계는 명확하다. 서계차경(序階差競)에 의한 배타적 관계가 아니라 서로 동등하게 협력적 관계를 맺으면서 재판을 진행한다. 이것이 바로 〈네트워크형 수평구조〉로 설계되었다는 의미다. 5명의 법관들이 서로 의견이 다르더라도 동등한 권한을 갖고 합의안을 만들어 간다는 뜻이다.
우리는 참심제 재판이 과연 가능할까?
우리 법관들은 법리를 모르는 자들이 어딜 감히 사법고시 패스한 법관과 동등한 권능을 갖느냐고 난리법석을 떨 것이다. 하지만, 법관들에게만 재판을 맡긴 결과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기괴한 판결문이 심심찮게 나온다. 법원이 썩었고, 법관들은 무능해졌기 때문이다. 일본 제도를 그대로 모방한 우리 법원의 실태를 알고 싶으면, 일본 재판소의 사정을 보면 된다.
(30년 경력의 일본 엘리트 재판관이 쓴 책을 보라. 세기 히로시, 《절망의 재판소》, 사과나무 2014와 세기 히로시, 《법정에 들어서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사과나무 2017. 내 경험에 의하면, 우리 법원의 행태는 이 두 권의 책에서 말하는 것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덜하지 않다.)
이것이 중요하다. 참심제도의 중요성은 법관집단이 법리라는 그들만의 성채(城砦) 안에 갇혀 있지 않도록 한다는 데 있다. 참심제도는 직업법관들이 사건의 역사적 맥락과 시대정신의 변화를 제대로 이해하고 판결문을 쓰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계급의식이 없는 수평적 조직문화를 가능케 한다는 장점도 있다.
우리 사법부는 어떻게 하나?
형사사건에 한하여 국민참여재판을 하겠다는 우리 사법부의 판단은 그나마 진일보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형사재판에만 국한된 것이고, 유무죄와 양형에 대한 권고적 기능만을 갖는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당연히 법관의 판단에 대한 기속력도 없다.
법관과 대등한 권능을 가지고 그들 속에서 함께 논의하고 합의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었다는 점에서 계급주의적 행태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결함이 있다. 그러므로 국민참여재판은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참심제의 효과에 비해서는 턱없이 부족하다.
사법부가 도입한 국민참여재판제도는 재판에 대한 국민적 불만을 잠재우려는 알리바이기능 이외에는 없다. 나는 이것이 사법부가 계급주의적 조직문화를 더욱 굳건히 하겠다는 의사표현으로 이해한다.
〈네트워크형 수평조직〉이란 참심제도처럼 서계차경이 없는 상태의 조직을 말한다. 그러나 법원 내에 서계차경이 존재하는 한, 법관들은 자신이 맡은 직무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법관이 아니라 거대한 사법주식회사의 종업원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어쩌다 우리 법관들은 《Organization Man, 조직인간》이 되었는가?
한국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서계차경(序階差競) 세계에서 인생을 시작한다. 모든 것을 서열화하고, 계급화하고, 차별화하고, 경쟁화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우리사회에서 서계차경이 없는 곳이 있나? 단언컨대 없다. 이런 환경에서 인간은 독립된 자율적 주체로 존재할 수 없다. 살인적인 교육환경은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경쟁에서 살아남지 않으면 빈곤의 늪에 빠질 수도 있다.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살기 위해 목을 매야 하는 역설적 사회에 살고 있다.
법관들의 행태를 보자. 서계차경의 과정을 뚫고 엘리트조직에 들어가 자리를 잡으면 더 이상 다른 조직으로 갈만한 곳은 없다. 다시 법원 내 서계차경의 조직문화에서 살아남아 승진해야 한다. 그러면 최고의 권위를 갖는 대법관까지 올라갈 수도 있다. 법관들이 승진에 목을 매는 이유다. 그렇게 된다면 명예, 권력, 돈이라는 삼박자를 모두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퇴임 후에는 현대판 매관매직인 전관예우도 받을 수 있다. 이 목표를 달성하려면 소위 윗분들에게 잘 보이는 길밖에 없다. 문제는 사법농단의 중심축인 법원행정처다. 이게 제왕적인 대법원장의 비서실 역할을 하면서 법관들의 인사권을 틀어쥐고 있다. 법원행정처가 괴물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사법부는 정치적 독립을 외치지만, 그런 독립은 사법기능을 아예 외부와 단절시켜 그들만의 성채를 쌓도록 만들었다. 대법원장은 성주(城主)가 되고 모든 것을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도록 조직을 설계했다. 이 성주에게 잘 보이면 출세의 길도 열린다. 이런 식의 조직문화는 개방성과 투명성이라는 보편적 가치와 시대정신을 외면하게 된다. 법관들이 국민의 기대를 배신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성채 안에 갇히면 자연스럽게 1956년 윌리엄 화이트(William H. Whyte)가 쓴 《Organization Man, 조직인간》으로 변해버린다. 외부와 단절된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인간으로 바뀐다는 말이다. 시대의 아픔이 제기한 당면한 문제의식은 사라지고 생각하는 힘, 고민하는 힘도 점점 잃어버린다. 세상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엉터리 판결문은 그래서 나온다.
그러다 우리 법관들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존재가 된다.
우리 법관들은 학교에서 가르쳐 준 시험문제들의 답안을 딸딸 외워 좋은 성적으로 관운을 얻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시험성적이 좋았던 소위 엘리트들의 행태를 볼 때마다 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곤 했다.
최근 법원구조와 법관들의 행태에 대해 조사하면서 내가 가졌던 한국형 엘리트들의 특성을 또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사회를 위한 봉사정신은 결핍된 채 오로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생물학적 존재라는 특성 말이다.
예를 들어보자. 윤석열의 지시로 만들어진 법관들에 대한 사찰문건이 발견되었는데도 그 문건에 대해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 의견을 발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발표하는 것조차 못하는 새가슴들이 우리 사회의 엘리트계층이라니 놀랍고도 놀랍다. 핑계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서란다.
어처구니없다. 법관들이 세상의 ‘옳고 그름’조차 분별하지 못한단 말인가? 이런 자들이 정치적으로는 어떻게 중립을 지킨다는 말인가? 법관들이 발표내용을 부결시켰다는 사실을 가지고 윤석열 세력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보라. 철학적 사유와 사회과학의 세계엔 중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법률 세계에는 더욱 그렇다. 사회적으로 허용되는 것과 허용되지 않는 것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왜 법관들이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까?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그들 스스로 얼마나 비겁한 정치적 존재인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온실과 같은 성채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풍파가 몰아치는 세상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법관들이 세상에 어떤 메시지를 주어야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번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 결의했다는 정치적 중립 운운하는 얘기를 보면서, 이전 글에서도 언급한 대로 우리 법관들이 미셸 푸코가 설명한 《감시와 처벌》의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 비천한 존재들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우리 법관들의 인식지평을 본다. 시민들의 삶과 죽음의 무거움을 어찌 저런 법관들에게 맡길 수 있단 말인가?
김명수와 우리 사법부에 관한 나의 결론은 이렇다
인사제도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으나 일단 법원구조에 대해서만 말했다. 법원은 더 개방적이고 투명하게 조직이 운영되도록 구조를 재설계해야 한다. 사법부라는 껍데기 조직은 독립시킬 필요가 없고, 오로지 재판이 독립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법관 개개인이 독립된 자율적 주체가 되도록 근본적인 조직개혁이 필요하다.
검찰조직처럼 국민에 의해 강제로 개혁당하기 전에 스스로 개혁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제국주의 시대의 유물로 변해버린 사법부는 국민적 사법 불신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일본 사법부처럼 말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 회차에는 [왜 배신하는가?(3편)_언론사와 그 종업원들의 경우]에 대해 쓸 예정입니다.
"사법적 판단도 정치적 판단만큼이나 시민들의 영향력 하에 있어야 한다"
이 한마디가 사법개혁의 처음과 끝이네요.
그들은 그들의 이익을 위해 원래 해왔던대로 할뿐아고 협조하지않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