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하게 일독을 권합니다.
이전글타래
[왜 배신하는가?(1편)_윤석열과 검사들의 경우] by 최동석 교수님 : 클리앙 (clien.net)
[왜 배신하는가?(2-1편)_김명수와 법관들의 경우] by 최동석 교수님 : 클리앙 (clien.net)
[왜 배신하는가?(2-2편)_김명수와 법관들의 경우]
이전 글에서는 법관들이 인사조직에 대하여 무지하며, 자신들이 뭘 모르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무지의 상태가 오늘날과 같은 법관들의 질적 저하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독일 법원과 법관들에 비해 우리 법원과 법관들이 지금 어떤 상태에 와 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인사조직론의 관점에서 조직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를 검토하려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요소를 관찰해야 한다. ① 구조, ② 시스템, ③ 프로세스, ④ 사람. 오늘은 구조의 문제에 대해서만 간단히 짚어보겠다.
조직설계의 전통적 원리를 완전히 뒤집은 독일인들
2차 대전에서 패망한 후, 폐허 속에서 독일 지식인들은 망연자실해 있었다. 나치에 저항했던 일련의 지식인들은 국가재건을 위해 완전히 새로운 아이디어를 냈다. 가장 중요한 경제운영체계를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us, ordoliberalism) 사상에 기초한 사회적 시장경제(social market economy)를 실현하자는 아이디어였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한마디로 정리하면, 공화주의(republicanism)와 자본주의(capitalism)라는 두 이념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루도록 했다는 의미다. 이 말이 더 어려운가? 지금은 이해가 잘 안 돼도 괜찮다. 언젠가 자세히 설명할 날이 오지 싶다.
중요한 것은, 일단 이 어려운 이념들을 현실에서 인사조직론으로 구현한 것이 〈게르만 모형〉이라는 점만 이해하면 된다. 그러니까 패전 후, 독일은 나치정부와 완전히 결별하기 위해 제국주의적인 〈피라미드형 계급구조〉를 버리고, 〈네트워크형 수평구조〉로 조직설계를 할 수 있는 원리를 개발했다.
조직 피라미드 정점에 누가 앉더라도 독재자처럼 자기 멋대로 조직을 좌지우지할 수 없도록 했다는 말이다. 조직을 설계할 때 항상, 그리고 철저하게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실현되도록 했다. 나치 시대의 홀로코스트를 겪었기 때문이었다.
나치에 저항했던 독일 지식인들은 철저히 반성하고 성찰했다. 국가와 민족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 그 자체였다. 국가조직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으며, 국가의 모든 권력은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모든 조직은 인간의 풍요로운 삶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칸트를 비롯한 천재적인 철학자들의 인간관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독일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국가, 민족, 애국심, 애향심 같은 용어는 절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금기어다.
이런 정신에 따라 1949년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현대적인 국가로 출발하면서 기본법 제1조1항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인간의 존엄성은 침해될 수 없다. 이것을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은 모든 국가권력의 의무다.”
잇따라 나오는 조문들은 제1조1항의 장엄한 선언을 실현하기 위해 국가의 권력기관들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기본법이 마치 논리적으로 잘 구성된 한편의 논문을 읽는 것과 같다. 인간의 생명을 파리 목숨보다 못하게 다루었던 자신들의 과오를 철저하게 반성했기 때문에 이런 기본법 체계를 갖추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독일인들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일반 시민과의 연대정신(spirit of solidarity)을 놓지 않도록 조직을 설계했다.
그런데 우리는 어땠는가?
해방 후, 독립운동을 했던 지식인들도 독일 지식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의 존엄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화주의와 자본주의 이념이 서로 견제와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제헌헌법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정신은 해방정국의 좌우 대립과 친일세력의 득세로 말미암아 곧바로 훼손되고 말았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에 이르는 수십 년 간 친일독재세력에 의해 “인간의 존엄성”은 “자본의 존엄성”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고 말았다. 독재자들에 의해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완전히 사라졌기 때문이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일반 시민들과의 연대정신(spirit of solidarity)을 잃어버렸다.
조직설계에서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어떻게 실현하는가?
근대국가에서 모든 권력은 직무(職務)로부터 나온다. 따라서 직무설계(job design)가 조직설계의 출발점이므로 직무설계에서부터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작동해야 한다. 독일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가진 연방총리는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기본법 제65조에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정리해놓았다.
① 연방총리는 국정운영을 위한 정책지침을 결정하고 그에 대해 책임을 진다. → 이것을 ‘총리의 원칙’이라고 부른다.
② 각 연방장관은 그 정책지침 내에서 자신의 소관업무를 스스로 자기책임 하에 수행한다. → 이것을 ‘소관업무의 원칙’이라고 부르며, 연방총리는 연방장관의 소관업무에 대해 지시·명령할 수 없다는 뜻이다.
③ 연방정부는 연방장관 간의 이견이 발생할 때 다양한 의견을 수렴한다. → 이것을 ‘합의의 원칙’이라고 하며 연방총리는 장관들의 견해 차이를 포괄하는 내각의 한 목소리(one voice), 즉 국가운영정책의 단일안을 마련해야 한다.
④ 연방총리는 연방정부가 결정하고 연방대통령이 승인한 업무절차규정에 따라 업무를 수행한다. → 이것을 ‘절차의 원칙’이라고 부른다.
이 제65조의 핵심은 연방총리에게 절대적인 권한이나 권력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직무설계는 이렇게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작동함으로써 권한행사에 관한 절제의 미덕이 실현되도록 한다.
그러므로 〈게르만 모형〉에서는 이러한 직무설계의 정신에 부합하면서도 높은 생산성과 창의성을 구현할 수 있는 조직설계이론을 발전시켜왔다.
연방총리의 직무가 이렇게 설계되어 있으니, 다른 모든 하위직무들 또한 마찬가지 방식으로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 이것은 모든 국가기관에 동일하게 적용되며, 심지어 민간기업에서도 이렇게 실행하도록 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도 높은 생산성과 창의성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게르만 모형〉의 조직설계이론이 가장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피라미드형 계급구조〉와는 전혀 다른 〈네트워크형 수평구조〉의 조직설계이론이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우리 법률에는 직무가 어떻게 설계되어 있는가?
정부조직법
제11조(대통령의 행정감독권)
① 대통령은 정부의 수반으로서 법령에 따라 모든 중앙행정기관의 장을 지휘ㆍ감독한다.
법원조직법
제13조(대법원장)
② 대법원장은 대법원의 일반사무를 관장하며, 대법원의 직원과 각급 법원 및 그 소속 기관의 사법행정사무에 관하여 직원을 지휘ㆍ감독한다.
검찰청법
제12조(검찰총장)
② 검찰총장은 대검찰청의 사무를 맡아 처리하고 검찰사무를 총괄하며 검찰청의 공무원을 지휘ㆍ감독한다.
이렇게 단위조직의 피라미드 정점에 있는 조직장(組織長)의 직무가 모든 것을 지휘ㆍ감독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절대적인 권한과 권력을 부여한 것이다. 직무에 고유한 과제도 없이 오로지 지휘ㆍ감독이 직무의 전부라니? 노예들의 감독관이란 말인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관행은 일제강점기로부터 지금까지 그대로 내려온 것이다. 어떤 반성적 성찰도 없이 일본 법률체계를 그대로 베껴온 것이다.
그러니 이명박·박근혜는 대통령 직무를 맡자마자 국정농단을 시작했다. 양승태가 대법원장 직무에 보임되자 사법농단이 발생했다. 윤석열이 검찰총장 직무를 맡자마자 검찰농단이라는 전대미문의 광란이 벌어졌다.
이렇게 나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권력의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 국민의 기대를 배신한다. 훌륭한 인품과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를 선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못 선발했을 경우에도 리스크관리를 할 수 있는 조직설계상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두어야 한다. 그것이 직무설계와 조직설계의 핵심이다.
독일과 한국 최고법원의 구조를 간단히 비교해보자
이번 글의 핵심 주제인 독일과 한국 최고법원의 구조를 살펴보자. 첨부한 도표에서 보듯이 최고법원의 구조가 근본적으로 다르게 설계되어 있다. 독일 법원에서는 사법농단이 일어나라고 고사를 지내도 일어날 수 없게 설계되어 있다. 하위법원들도 마찬가지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함)
독일 최고법원은 연방헌법재판소와 5개의 기능별(일반, 노동, 사회, 행정, 재정)로 분리된 연방대법원으로 구성된다. 연방헌법재판소에 16명, 연방대법원에 320여명의 법관들이 최종심을 맡고 있다. 우리 최고법원은 헌법재판소 9명에, 대법원 14명으로 단순하게 구성되어 있다.
독일의 법관은 2만여 명인데 비해, 한국의 법관은 3천여 명이다. 독일은 인구 10만 명당 25명의 법관들이 재판하지만, 우리는 6명이 담당한다. 한국의 법관수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엉터리로 재판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법관수가 적다는 것은 아주 고약한 경우다. 법관들의 권위와 희소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적게 뽑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재판의 질적 수준이 형편없이 떨어진다. 법관들은 재판건수를 밀어내기 바쁘다. 이게 현실이다. 제대로 된 재판이 이루어질 수 없다.
그 많은 상고사건을 대법원에서 감당할 수 없게 되자, 양승태는 대법관의 숫자를 늘리려는 생각을 하지 않은 채, 상고법원이라는 해괴망측한 방식을 고집하다가 박근혜와 재판거래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대법원의 권위와 권력을 한껏 드높이려는 수작이었다. 상고심을 제대로 하려면, 대법관의 숫자를 적어도 200명 수준으로 대폭 확대해서 기능별로 정비해야 한다.
더구나 독일 법원은 기본적으로 법원 내 인사와 예산과 같은 행정업무는 법관들이 관여하지 않고, 행정부 관료들이 맡고 있다. 법관은 오로지 재판에만 전념한다. 독일 법원에는 법관들의 인사권을 쥐고 있는 법원행정처와 같은 괴물은 없다.
일단 종신법관 트랙으로 올라선 직업법관들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정년퇴직 때까지 근무한다. 은퇴 후 다시 변호사로 활동하는 일도 없다. 그러니 전관예우 같은 비열한 짓도 벌어지지 않는다.
이런 제도개혁을 위해서는 법조계의 대각성이 필요하다.
오늘은 여기까지.
다음은 [왜 배신하는가?(2-3편)_김명수와 법관들의 경우]로 이어집니다. 여기엔 독일 재판에서 활용되는 참심제가 현재 우리 법원이 채택하고 있는 국민참여재판제도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우리 법관들이 어쩌다 윌리엄 화이트가 말한 《조직인간》으로 전락했는지, 나아가 분량이 가능하다면, 우리 법관들이 어쩌다 이렇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존재가 되었는지 등에 대해 써볼 생각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