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배신하는가?(2-1편)_김명수와 법관들의 경우]
대법원장이라는 직무에 김명수가 지명된 것은 의외였다. 대법관 직무를 맡아본 경력도 없었는데, 문재인 정부가 김명수를 진보적인 성향을 가졌을 것으로 판단하여 코드인사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임명된 케이스다. 그는 사법개혁에 의지를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기대를 받았다.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기대는 뭐였을까? 과거 군사독재시절 권력의 사주를 받아 엉터리로 재판한 사건들이 부지기수로 많았고, 그런 판결로 목숨을 잃은 사람도 수없이 많았다. 대표적인 사건이 인혁당 사건에 대한 재판이다. 누가 보더라도 조작된 사건이었음에도 정권의 입맛에 맞는 판결을 내렸다. 적극적으로 군사독재에 부역했던 인물이 바로 양승태였다. 그는 애초부터 법과 양심을 저버린 사람이었다. 이런 사법부의 흑역사가 결코 먼 옛날이야기가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 김명수의 사법개혁과 관련된 비전과 전략은 무엇인가?
양승태는 사법농단으로 구속되었으나, 이와 관련된 현직 법관들이 수십 명에 달한다. 진작에 국회에서 탄핵되었어야 할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현재 피고인으로 재판 중에 있는 몇 명을 빼면, 관련 법관들은 현직으로 다 복귀해서 재판을 하고 있다. 양승태 후임으로 취임한 김명수가 그 따위 조치한 것이다. 자신이 한 약속도 스스로 어긴 것이다. 김명수의 법원개혁과 관련된 비전과 전략은 무엇인가? 아무도 모른다. 김명수는 국민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린 것이다.
대법원장 임기 6년에 벌써 3년이 훌쩍 지났지만, 사법개혁과 관련하여 어떤 성과도 없다. 기존의 틀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 올바른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기대는 사라지고 말았다. 김명수는 그래도 개혁적일 것으로 기대했으나 그가 법원조직을 개혁적으로 바꿀 것이라는 국민의 염원은 한낱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 우리 법원에 대한 나의 문제의식은 무엇인가?
나는 우리 법원을 불신의 눈으로 보고 있다. 시작은 이랬다. 유학시절 파독 광부였던 교민 중 어르신 한 분이 법적인 문제로 도움을 요청해 잠시 변호사 사무실에서 통역을 해드린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독일 변호사들의 일하는 모습과 법정을 구경할 수 있었다. 법조문화에 별 관심이 없었던 나는 일하는 분위기가 한국과 조금 다르다는 느낌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 일이 끝나자 바쁜 유학생활 때문에 더 이상 독일 사법체계에 대해 연구하거나 조사해본 적이 없다. 귀국 후에도 우리 사법체계의 문제점을 생각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삼성X파일 사건은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것은 검찰과 법원이 서로 스크럼을 짜서 몰상식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는 의심을 갖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그밖에도 법관들의 자잘한 일탈행위가 심심찮게 들렸지만 경영일선에서 실무를 해야 했기 때문에 자세히 들여다보지 못했다.
2014년 은퇴 후에도 우리 법관들의 엉터리 재판은 계속 반복되었다. 아무리 큰 범죄라도 재벌가족이라면 〈3년 징역에 5년 집행유예〉라는 삼오제(35제) 판결이 여전했기 때문이다.
안 되겠다 싶어, 최근 한국과 독일의 법원조직을 연구하고, 법관들의 인사시스템을 조사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법원의 인사조직은 한마디로 개판이었다. 어떤 조직이 건강해지려면 조직의 중추(backbone) 역할을 하는 인사조직의 기본원칙이 철저하게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 법관들은 인사조직의 원칙조차 모르고 있음이 분명했다. 인사조직의 기본원칙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법관의 질적 수준이 낮을 수밖에 없다. (우리 법원이 얼마나 개판인지 다음 회차(2-2편)에서 설명할 예정이다.)
▶ 왜 법원에는 인사조직의 기본원칙이 없을까?
법관들이 법원조직운영을 위한 인사조직의 기본개념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누가 제대로 가르쳐준 적도 없었을 것이다. 법관으로 임용된 후, 선배법관들의 뒤통수를 보면서 배웠을 것이다. 선배법관은 또 그 선배법관의 하는 짓을 어깨너머로 배웠을 것이다. 그 선배법관은 다시 그 선배로부터...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올라가면 일제강점기로 올라간다.
우리는 한줌도 안 되는 일본인들이 한반도를 지배·착취하기 위해 만든 인사조직체계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생각해보라. 제국주의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감시와 처벌이 살벌한 시대였다. 해방되었음에도 살벌한 문화가 지금까지 계속되면서 이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미셸 푸코가 말했던 《감시와 처벌》 그대로 말이다. 우리 법원조직은 일본재판소의 판박이다. 1987년 개정헌법의 일환으로 헌법재판소가 추가되었을 뿐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현대적 의미의 인사조직개념이 법원 속으로 들어갈 틈이 전혀 없었다는 말이다. 일제강점기에 재판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상상해보라. 판사의 지위를 한껏 높여서 그 판단에 찍소리도 못하도록 했을 것이고, 그것은 신의 말씀처럼 여기도록 상징조작(象徵操作)이 일어났음은 불문가지다.
▶ 사법부의 상징조작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법관들에 대한 상징조작이 현실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어나는가? 사법부라는 (집단)조직을 한껏 드높이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자신에게 불리한 결정뿐만 아니라 매우 불합리한 재판결과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들이 사법부의 판단을 존중한다는 말부터 한다. 근본적으로 잘못된 문화다.
사법부 또는 법원이라는 조직은 아무런 판단도 내릴 수 없는 개념적 실체일 뿐이다. 사법부의 어떤 법관이 잘못된 판결문을 썼을 뿐이다. 그 법관의 판결을 비판해야 한다. 법률가들, 정치인들, 교수들이 그 판결문을 읽고 추상같은 비판이 일어나야 한다. 그래서 지식인들이 판결문에 함구하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사법부는 존중의 대상이 아니다. 사법부라는 조직은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적 실체일 뿐 결코 존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사법부라는 조직개념은 늘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어떤 형태의 조직이든 조직은 늘 개방적이고 투명해야 한다. 법원이라고 예외일 수 없다. 검찰조직이 어쩌다 저렇게 개판이 되었는가? 조직운영이 폐쇄적이고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법원도 마찬가지다.
청와대를 존중하는가? 그렇지 않다. 입법부를 존중하는가? 그렇지 않다. 행정부의 심장인 청와대와 국회는 존중하지 않으면서 왜 사법부만 존중한다고 하는가? 이게 바로 상징조작 때문이다.
나는 사법부라는 조직도 검찰조직과 유사한 괴물조직이라고 생각한다. 검찰개혁에 이어 빠른 시일 내에 실질적인 사법개혁이 시작되어야 한다. 법원을 인간의 보편적 상식이 통하는 정상적인 조직으로 되돌려야 한다. 그런데 김명수는 이렇게 할 비전도 능력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 직무(판사)와 직무담당자(법관)를 구분해야
사법부의 법관들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평범한 인간일 뿐이다. 우리는 법률이 아닌 다른 전공과목을 배웠고 법률가들은 법률을 배웠을 뿐이다. 더구나 대학을 졸업하지 않았어도 그만큼의 삶을 통해 세상과 현실을 배웠을 것이다.
현실에서 인간의 독립성과 자율성, 나아가 자유와 평등, 공동체적 연대와 협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체험했을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학력이나 학벌 또는 시험성적으로 평가하고 판단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그런데 법률을 공부해 시험성적이 높았다는 것만으로 일반인과 다른 특별한 대우와 권위를 부여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몰상식한 일이다. 우리가 존중해야 할 대상은 사법부, 행정부, 입법부라는 개념으로서의 조직이 아니다.
우리가 존중해야 할 대상은 조직이 아니라 그 조직에 속한 개별 구성원들이다. 이들은 모두 공직자일 뿐이다. 그러면, 모든 공직자들을 존중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존중을 받아야 할 공직자도 있고, 비판을 받아 마땅한 공직자도 있다. 이것을 구별해야 한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모든 인간은 옳고 그름,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거룩함과 속됨을 분별하여 종합·판단하는 능력인 이성(理性)을 가지고 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진선미성(眞善美聖)을 잘 발휘하는 개별 공직자에게는, 사법부든, 행정부든, 입법부든 어떤 조직에 속해 있든 상관없이, 존중해 주어야 한다.
이와 반대로 이성의 기능이 잘 작동하지 않는 개별 공직자에게는 통렬한 비판을 가해야 한다. 어떤 조직에 속해 있다는 것만으로 존중 또는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된다. 모든 인간은 독립된 자율적 주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잘못된 판결문을 쓴 법관들에게는 호된 꾸지람을 해야 하고, 앞으로 그런 일이 반복되는 경우 그 직무에서 배제되어야 마땅하다.
▶ 법관들 개개인이 감시와 처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그런데, 우리 사회는 독립된 자율적 주체로 인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조직에 속해 있느냐에 따라 존경과 멸시의 정도가 정해진다. 이것은 전형적인 제국주의 시대의 관행이다. 우리는 일본처럼 여기서 아직 빠져나오지 못했다. 해방 후에도 독재시대를 거치면서 제국주의적 관행을 지금까지 그대로 답습하기 때문이다. 민주화되었다고는 하나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에는 아직도 계급주의적 명령·통제와 지배·착취의 메커니즘이, 나아가 감시와 처벌의 두려움이 내면화되어 있다.
이전에 이미 페북에 썼지만, 〈윤석열에 대한 직무배제 집행정지〉 결정문을 쓴 법관들(조미연, 한현희, 박영순)에게서 계급주의적 명령·통제와 지배·착취의 메커니즘이, 나아가 감시·처벌의 두려움이 내면화되어 있음을 읽을 수 있다. 나는 이 법관들이 작성한 어처구니없는 결정문을 읽으면서 참담함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 법관들의 현실인식과 논리적 사고수준에 대해서 말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할 것)
https://www.facebook.com/dongseok.tschoe/posts/10213999432619669
한국인은 대부분 감시·처벌의 내면화된 두려움 속에서 살아간다. 엄혹했던 독재시대를 겪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은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과 올바른 교육뿐이다. 그래서 교사, 법률가, 언론인, 성직자, 컨설턴트 등 인간에 대한 분석·판단·해석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직종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기의식과 자기성찰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인사조직개념의 기초부터 다시 정립해야 한다. 자신의 동물적 본능을 충족시키기 위해 시험성적으로 그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은 결코 정상적인 조직운영이 불가능하다. 이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요령과 지식은 있을지 모르지만, 영혼 없는 좀비 같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이 많은 조직으로는 결코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갈 수 없다.
이런 상황을 풀어가는 것이 우리에게 남은 과제다. 누누이 강조하거니와. 여기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인사조직 기능을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쓰다 보니 또 길어졌다. 우리 법원의 꼬라지와 그 개선방안에 대한 간단한 아이디어는 다음 회차(2-2)에서 계속됩니다.
전국민 일독을 권하고 싶을 정도입니다.
다른 글들도 찾아서 읽어봐야겠네요.
제가 클량에 퍼뒀고, 페북 보시면 글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