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 시기에 많이 힘들었습니다.. 쓸 내용이 많은데 어디서 부터 어떻게 생략을 하고 건너뛰어어 할지 몰라 분량 조절이 안되었네요. 지웠다가 썻다가 하는 동안에 오타가 있거나 뜻이 안맞는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맞춤법실수라던지 알려주시면 저에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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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빌라 2층에 위치한 단칸방에 살았다. 다리가 불편한 엄마는 그 작은 단칸방 있는 화장실도 마음대로 못 갔다. 다리를 치료받으려면 병원을 가야 하는데 그때마다 내가 업고 그 계단을 오르고 내려와야 했다. 병원을 갈 때마다 택시를 탈 수 밖에 없었다. 진찰료가 적게 나와도 왕복 택시비 + 진찰료 하면 늘 만원은 나왔다. 월세도 31만 원으로 시작해서 35만 원까지 올랐다. 집주인 아저씨는 부동산을 하시는 돈이 꽤 있는 분인데도 만원씩 집세를 계속 올렸다. 전세로 살고 있던 아랫집 할머니에게 전세금 돌려주고 월세로 내라고 해서 그 할머니가 계단에서 울던 모습도 기억난다.
집주인 아저씨는 교회를 아주 열심히 다니셨고 우리에게 교회를 다니라고 늘 말하고 다녔다. 솔직히 하느님이라는 존재를 믿지 않았다. 신이 있다면 이렇게 가혹할 수 없다고 느꼈다.
엄마는 다리가 아파 식당일을 그만 두었고 생활비는 내가 벤쿠버에서 벌어온 돈으로 생활비로 사용했고 금방 다 떨어져 갔다.
네이버 지식인에 정부에서 받을 수 있는 보조금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동사무소에 가서 문의해보면 기초생활수급대상자가 될 수 있을 거고 그러면 생활비와 쌀이 나온다고 했다. 관할 동사무소에 찾아가서 문의해보니 내가 자녀로 되어있고 20살이 넘어서 부양할 수 있기 때문에 자격이 안된다고 했다. 주변에서 돈을 조금씩 빌려서 생활을 했다. 한두 달 정도 지나고 엄마는 조심스럽지만 혼자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취직을 하려고 잡코리아, 사람인 같은 사이트에 가입을해서 이력서를 작성했다. 생각보다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많이 왔다.
면접을 보러 서울을 갈 때마다 차비가 너무 부담이 되었다. 일단 어디든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급여도 생각 안하고 숙소 제공이 되는 곳에 취업하였다. 첫 직장은 당산역에 있는 네트워크 관련 회사였다. 직장을 들어가면 돈을 받으면서 기술도 배울 수 있기 때문에 돈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숙소는 홍대쪽에 있었고 회사는 당산역이라 자전거 타고 다닐만했다. 모든 지출은 최대한 0원에 만들려고 노력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날 데려다가 교육시켜주고 다들 너무 잘 대해줘서 재밌게 다녔다. 아직도 당시에 내 생일을 챙겨준 회사 형들이 생각난다.
회사생활은 즐거웠지만 두달만에 퇴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월급이 너무 적어서였다. 적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들어갔는데 학자금 대출 이자 + 엄마 월세 + 점심밥 값 + 통신비 이렇게 하니 정말 남는 돈이 거의 없었다.
당시 부자가되고 싶어서 금융, 경제, 재테크 관련 책을 꽤 읽었는데 내용은 대충 아래와 같았다.
통장을 나눠서 용도에 맞게 관리하고 종잣돈을 일단 모운 후에 레버리지를 활용해라.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의 말처럼 부채를 일으키지 말고 패시브인컴이 들어올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라.
퇴사할 때 계산해보니 내 연봉은 2200만원 정도였고 알펜시아리조트 GS25에서 편의점 아르바이트할 때보다도 나에게 남는 돈은 더 적었다.
그 외에도 여러군데 면접을 더 보았다. 지방전문대학교 출신인 나에게 회사는 연봉 2200~2500만 원 정도를 제시했다. 인터넷에 보면 누구는 초봉 3천 받고 누구는 4천 받고 하는데 다른 나라 이야기 같았다.
그러던 중에 무역회사 한 곳을 면접보게 되었다. 비정규직 자리인데 2700 준다고 한다. 근데 출장이 많아서 차가 있어야 하고 기름값은 지원해준다고 한다. 나는 차는 없지만 돈 모으면 사보겠다고 말씀드렸다.
결과적으로 불합격했다. 당시에 4년차 대리급이랑 같이 면접을 봤는데 내가 떨어지고 그분이 합격했다고 한다.
학점도 4점대였고 토익점수도 높았는데 현실은 편의점 알바 연봉이였다. 이제는 쉽게 면접에 응하지 않았다. 연봉을 꼭 물어보고 갔다. 내 시간과 차비를 아끼고 싶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고 전화가 왔다. 그 무역회사였다. "혹시 직장 아직 안 구했으면 입사할 생각 있어요?"
나는 다른 회사 소속 파견직 비정규직으로 그렇게 무역회사에 들어갔다. 그 4년 차 대리는 이틀 나오고 그만뒀다고 했다. 이번 회사는 지난번 회사와 달리 규모도 아주 크고 부서도 많았다. 강남에 아주 큰 건물을 6층부터 14층까지 사용했다.
서울에 지낼 집이 없기 때문에 친구 준호에게 연락을 해서 부탁했다. "야 나 잠만 좀 재워줄 수 있냐? 월세는 돈 벌면 줄게" 준호는 원룸인데 너만 괜찮으면 와서 지내 라고 말했다.
(이 글을 보겠지만 당시에 지낼 수 있도록 도와준 준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또 벤쿠버가는 것이 확정되어 비자를 받기 위해선 통장에 2천만 원이 있다는 걸 찍어서 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부모님 포함해서 그런 큰 돈을 빌려줄 사람이 없던 상황에서 선뜻 큰돈을 빌려준 재한이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너희가 없었으면 지금의 나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나는 까치산역에서 학동역까지 출퇴근을 시작하였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컴퓨터 관련 서포트를 해주는 일이었다. 마우스가 안돼요. 키보드가 안되요. 소프트웨어 설치가 안되요. 하는 걸 도와 주 고 본사가 해외에 있는 회사다 보니 거기서 내려오는 정책을 읽고 유저 컴퓨터에 세팅을 해주고 도와주는 업무였다.
출장자가 있으면 노트북 관리도 해야 했고, 전화기가 안되면 전화기 수리와 전화비 정산, 높은 분들이 스마트폰을 쓰다가 막히면 그 부분도 가서 도움을 주고 말 그대로 잡병이었다. 또 일주일에 1~2번은 용인에 있는 물류센터에 내려가서 거기에 있는 장비들을 점검하고 와야 했다.
일은 생각보다 할만했다. 회사 정책으로 영어로 메일을 주고받다 보니 비즈니스 메일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되었고, 내가 부족한 부분은 부서 내에서 친절하게 가르쳐주셔서 할만했다.
다만 출퇴근할 때 여의도부터의 지옥철과 함께 왕복 2시간의 출퇴근 시간, 용인으로 가는 날엔 5시 45분에는 출발을 해야 하는 고통이 있었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11시였고 다음날 아침 5시 45분에 출근하는 날이 꽤나 많았다. 사실 회사에서는 용인에 갈 때는 출장비 2만 원씩 영수증 청구가 가능했는데 (택시를 타고 청구하라고 했다.) 당시 팀 내 대빵에게 가서 집안 사정이 좋지 못해서 돈을 모아야 하는 상황인데 제가 부지런히 가서 버스 타고 이동을 하고 2만 원을 그냥 현금으로 받을 수 있냐고 묻자, 수락을 해줬다. 그렇게 용인 가는 날엔 4만 원씩 더 벌 수 있었다.
전에 다니던 직장보다는 훨씬 좋았지만 늘 좋았던 건 아니다. 명절이 되면 회사에 선물이 나오는데 그때마다 나는 명단에 없었고 다들 웃으며 선물을 들고나갈 때 나는 샴푸세트를 받아 집에 가져다주었다. 샴푸세트도 감사했지만 가슴 한편이 착잡했다.
-계속
저는 몇년 전 일은 커녕 가끔은 어제 일도 잘 기억 안납니다.
그리고 열심히 사셨네요...
우시던 할머니가 기억나는 이유는 그 마음이 다르지 않아서 일거라.. 맘이 아픕니다..
많은 걸 느끼고 돌아보게 되는 글들 입니다.
감사합니다. 힘내세요
ㅜ 진짜
자기 인생을 적극적으로 개척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아요. 엄지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