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닉 크로산을 비롯해 도올 김용옥, 안병무, 로버트 펑크, 바톤 등은
역사적 예수의 본질을 탐구하며 그를 신격화하는 기독교의 전통 교리를 비판해 온 대표적인 학자들입니다.
예수를 신으로 숭배하는 교리가 오히려 예수의 진짜 메시지를 가리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된 지적입니다.
이 글에서는 이들의 주장에 제 나름의 관점을 더해
예수를 신으로 만들어버린 역사적 맥락과 예수 신격화가 초래한 종교적, 사회적 문제점들에 대해 풀어내 보려고 합니다.
도미닉 크로산, 안병무, 김용옥
- 부족 본능을 벗어나 인류의 보편성으로
코끼리나 늑대, 침팬지 등 무리 생활을 하는 다른 여러 종들처럼
인류라는 종 또한 수십만, 수백만년 역사의 대부분의 기간을 작은 무리를 이루어 살아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류에게는 집단의 생존을 위해 우리편과 남을 나누고
그 구분을 기준으로 우리편은 선, 나머지는 악이라는 식의 배타적 가치관이 생겼으며,
이런 사고가 초자연적인 범위로 이어지면서 자연스럽게 부족신 신앙 같은 개념이 성립되었습니다.
지금은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등으로 나뉘어져있는 야훼신앙은
기본적으로 고대 이스라엘 부족이 부족신인 야훼를 숭배하던 신앙이고
그런 부족 본능의 배타성, 폭력성이 반영된 신앙입니다.
기독교인들이 구약이라 부르는 부분, 특히 모세5경을 관통하는 건 '부족의 생존'입니다.
그 경전의 서술들은 그 절대가치를 위해 타부족을 침략하고 땅과 가축과 처녀들을 약탈하고
다른 부족의 신을 숭배하는 자는 가족이나 친구라도 학살하고
병자나 혼혈, 동성애자 같은 소수자를 혐오하는 등의 행위들을
부족신의 선한 뜻으로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기도 합니다.
한편 예수, 소크라테스, 싯다르타, 공자 등은
본격적으로 대형 도시와 국가가 형성되며 그렇게 서로 다른 작은 부족들이 더 가깝게 얽혀지내게 되는 시절을 전후해
사람들에게 이전과는 다른 질서가 요구되던 시점에 등장한 인물들입니다.
칼 야스퍼스는 이렇게 작은 부족들이 더 큰 사회로 발전하는 기원전 8세기~3세기 경을 축의 시대라고 하는데,
이 시기는 각 부족들의 고립적이고 배타적인 사고가 여러 부족간의 교류와 소통으로 변하고
신화적, 의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 이성과 도덕의 보편성을 탐구하게 된 시기입니다.
우리만이 옳고 남들은 그르다는 부족적인 사고만으로는 이렇게 덩치가 커진 사회를 유지할 수 없었고
논리나 이성 등, 누구나 동의 가능한 보편적인 사고의 틀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크로산 등은 대체로 예수 또한
기존의 야훼신앙(유대교)이라는 부족 신앙의 폭력에 맞서 보편적인 인류애를 강조한 사람,
폭력의 악순환을 끊고 새로운 사회질서를 제시한 사람으로 보는 편입니다.
부족 본능의 폭력에 맞서는 방법론, 즉 자기희생과 사랑을 온몸으로 실천한 사람이라는 거죠.
부족적인 사고를 기준으로 유대인만이 선, 사마리아인이나 로마의 세리는 원수라는 틀을 벗어나
세상 누구든 서로 돕는 이웃이 될 수 있고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사고는
그 자체로 부족 본능에서의 거대한 전환이었습니다.
종교적 금기를 깨고 소수자들과 어울리며 먹고 마신 행위, 원수마저 사랑하라는 사상 등은
자기 집단의 생존을 위해 타자와 소수자를 배척하던 부족적 본능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부족 본능과 그 본능의 낡은 율법이 그어놓은 경계를 넘어 '보편적 인간'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제안한 셈입니다.
싯다르타와 공자, 소크라테스 같은 사람들도 나름의 사회에서 대동소이한 역할을 했습니다.
( 부족 본능과 보편 지향에 대한 더 상세한 글 : https://buly.kr/YgQCdW )
이런 예수의 생각을 만난 많은 이들이 예수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 예수와 그 기록간의 거리
예수에 대한 기록을 한국 배경으로 각색해보자면 이런 식일 거예요.
일제시대에 함경도 산골에 살던 막일꾼 총각이
떠돌이 생활을 하며 가르침을 펴던 방랑 무당에게 강가에서 신내림을 받고 각성하여
친일파 앞잡이들, 싸구려 창녀, 백정과 문둥이들과도 어울려 먹고 마시며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설파하고 병을 고치는 등 도술도 부리곤 했다.
그가 마침내 경성에 진입했을 때,
양반과 귀족 등 조선인 기득권층은 유교적 신분질서와 어긋나는 이야기를 하는 그를 총독부에 고발하여 사형시켰다.
그를 따라다니던 추종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이후 일본은 조선인들을 한반도에서 영원히 추방하고 조선은 잊혀진 나라가 되었다.
21세기에 들어선 후, 나라를 잃고 전세계로 흩어진 조선인들 중 일부가
그 총각의 전설에 대해 영어로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다...
운보 김기창의 '예수의 생애' 연작 중
함경도 사투리를 쓰는 막일꾼의 전설을
거의 한 세기 후에 전혀 다른 문화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영어로 기록하는 과정에서 왜곡이 없을 수가 없겠지요.
문화적 맥락을 충실히 번역한다는 것도 기본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고...
우리가 '늑대와 춤을' '주먹쥐고 일어서' 같은 미국 원주민식 이름을 들으며
그들이 굉장히 신비롭고 영적인 삶을 살던 사람들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한국의 이용호(李勇浩)씨의 이름을
'용맹한 큰물(Brave Big Water)'이라는 식으로 번역하는 식이나 마찬가지인 것도 그렇고 말이죠.
그렇게 언어적 왜곡 + 문화적 번역 + 공동체 해석이 가미되며
예수는 홍길동처럼 신화적인 인물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옛 사람들은 신화와 역사의 구분이란 개념의 구분이 희미했습니다.
역사가 신화였고, 신화가 역사였죠.
그리스가 페르시아에 이긴 건 아테나 신이 페르시아의 신보다 강했기 때문이고,
일본을 침략하려던 몽고의 배가 태풍으로 침몰하면 당연히 '신의 바람'이 일본을 지켜주셨다고 생각하는 식으로.)
- 하나님의 아들
인도에서는 고대로부터 지금까지도 수많은 종교지도자들, 유랑 종교인들을 볼 수 있지요.
그들은 영적 가르침을 전하고 치유를 포함한 여러 기적을 행하며
많은 제자와 수백만 단위의 추종자들이 따르기도 합니다.

예수 당시의 이스라엘 민중은 로마 제국의 식민 지배를 받으며
무거운 세금과 정치적 탄압, 주류 종교 지도자들의 부패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기존 질서가 무너지길 바라고 종말론과 메시아가 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런 시대적 불안감은 자연스럽게 수많은 유랑 예언자, 설교자, 치유자들을 탄생시켰고,
세례 요한이나 예수 같은 사람들도 그 중의 일부였지요.
세례 요한처럼 광야에서 금욕하며 기득권 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
하나니야 벤 도나, 원을 그리는 호니처럼 기적을 행하고 병을 고치는 카리스마적 퍼포머들,
코크바, 테우다스 등 로마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메시아라며 수천 군중을 광야나 요단강으로 이끌어낸 사람들,
지팡이 하나만 들고 길거리를 떠돌며 설교를 하는 견유학파 철학자(Cynics)들 등 여러 유형이 있었고,
귀신 쫓기, 병고침, 물위를 걷기 등은 이런 사람들의 단골 레퍼토리였다고 하지요.
처녀출생이나 부활 같은 것도 당시의 전승에서 흔한 이야기이고.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삶은 소크라테스나 디오니소스 이야기, 태양신 숭배사상 등
당시 지중해 세계에 넓게 퍼져있던 클리셰들과 겹치는 부분이 많기도 합니다.
좀 멀리 가보자면 피타고라스 학파 역시 피타고라스를 기적을 행하는 반신반인으로 여기는 무리였지요.
아마 당시 사람들에게도 예수는 그런 흔한 떠돌이 설교자,
민중을 선동하는 자칭 예언자 중의 하나로 받아들였졌을 가능성도 높을 것 같습니다.
크로산 등은 대체로 경전의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아버지와 하나다" 같은 발언들도
초대 공동체가 확대 해석한 측면이 크다고 봅니다.
당시 유대교나 로마문화권에서 '신의 아들'이라는 표현은 꼭 형이상학적, 신학적 표현이 아니었습니다.
유대교에서는 왕이나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이기도 했고
위에 얘기한 종교인들을 포함해, 신에게 순종하는 사람을 뜻하는 은유적인 호칭이기도 하다고 합니다.
그리스-로마 문화에서는 뛰어난 능력을 지닌 치유자, 철학자들을 부르는 호칭이기도 했고
로마의 황제들은 전임 황제를 신격화하고 자신을 '신의 아들'로 칭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식민지 치하의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는 로마의 황제 외의 다른 사람을 '신의 아들'로 부르는 것은
정치적인 저항이 되기도 했습니다.
한편, 3세기를 전후하여 로마는 이민족의 침입이 잦아지고 전염병, 경제 파탄, 내전 등으로 위기를 맞습니다.
로마의 기존 다신교 시스템은 각 지역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데에는 유리했지만
이런 위기상황에서 제국 전체를 통합 관리하기에는 적당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의 지배층은 야훼신앙의 일신론적 세계관을 받아들여 다신교적 자율성을 배척하고
'하늘에는 하나의 신, 땅에는 하나의 황제'라는 일신론적 수직적 질서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크로산 등은 제국주의적 무력으로 유지되는 로마 체제가 이런 야훼신앙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예수의 급진적, 정치적 저항 메시지와 사회적 해방성 등이 거세되었고
예수가 초자연적 존재로 변형되는 왜곡이 생겼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예수를 사형시키는 과정에 대해서도
로마의 개입에 대한 내용은 최소화하고 유대인들에게 모든 책임이 있는 쪽으로 악마화했다고 합니다.)
추상화된 예수, 신격화된 예수는 지배층에게 무해할 뿐 아니라 지배에 복무하는 예수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로마 제국 하의 기독교는 로마 황제에 저항하는 의미로도 사용했던 '신의 아들' 개념을
로마의 황제 숭배 사상과 다르지 않은 형이상학적 칭호로 바꾸어
황제 숭배와 제국 통치에 협력하는 종교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혁명적인 인물이나 사상을 안전한/무해한 상징으로 재해석하여
적대 세력이 이용하거나 상품화하는 건 역사적으로 종종 나타나는 일입니다.
자본주의가 반자본주의적인 흐름까지도 상품으로 흡수해버린다거나 하는 것도 유사한 맥락이라 할 수 있을 거고.)

- 종교로서의 왜곡
그렇게, 로마의 지배층은 로마 제국주의의 영속을 위해
신도들도 이해 불가능하다고 인정한다는 '삼위일체' 같은 설정 등을 넣으며
서로 모순적인 야훼신앙과 예수의 사상을 얼기설기 엮은 기독교를 제국 통치의 이데올로기로 받아들였습니다.
통치를 위해 만들어진 신앙은 이후 유럽의 왕정과 근대의 제국주의를 정당화하고
농노와 노예, 식민지민을 복종시키는 지배 이데올로기가 되었습니다.
초기 기독교 회화에서 소박한 목자, 민중의 위로자로 그려졌던 예수는
이후의 회화에서는 근엄한 예복을 입은 통치자가 되었고
국가 폭력의 상징이었던 십자가는 전쟁 승리의 깃발이 되었으며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의 사고는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신학자들이 국가의 전쟁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뒤집습니다.
부족주의를 벗어나 인류의 보편성을 이야기한 예수가
다시 타집단과 소수자 혐오와 배척을, 부족 본능을 정당화하는 우상(idol)이 되었습니다.
예수와 야훼를 함께 숭배하게 된 기독교인들은
야훼의 이름으로 타집단에 대한 혐오를 거리낌없이 발산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것을 예수의 사랑이라 정당화하는 편리한 사고틀을 가질 수 있게도 되었지요.
다르게 말하자면, 마음껏 혐오할 수 있는 핑계로 예수를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야훼를 향한 고대 이스라엘인의 기도와 이란을 침공한 미국인들의 기도.
부족본능은 부족신에게 자기 부족의 생존과 이방인(=적)의 타도를 요구합니다.
이렇게 후대의 종교인들은 전쟁신 신앙의 폭력을 초월해 보편적인 인류애를 이야기한 예수를 거꾸로 뒤집어서
그가 바로 전쟁신 야훼의 현신이라며 신격화하고 그를 숭배하며 기존 종교의 폭력을 이어갑니다.
이렇게 본다면 그들은 예수를 가장 모욕적인 방식으로 이용하는 셈이겠지요.
(브라만교의 부족주의적 폭력에 휘둘리지 말고
개인이 깨달음을 얻으라고, 자신을 등불로 삼으라고 한 싯다르타를 신격화하여 숭배하는
어떤 불교 종파들도 비슷한 셈일 테구요)
'하나의 밀알이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예수와 같은 삶을 산 김대중이나 전태일 같은 사람들이 있는 반면,
(남이야 어떻게 되든말든) 나는 시험에 붙게 해달라, 나는 천국에 보내달라며
예수를 내 소원을 들어주는 자판기 신으로 활용하는 종교인들의 우상이 된 셈입니다.
예수처럼 살기는 어렵지만, 예수에게 이것저것 요구하는 건 쉽습니다.
저는 우리가 예수나 싯다르타, 공자 등에게서 보아야 할 것은 그들의 '말' 자체가 아니리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함무라비 법전의 '눈에는 눈'이라는 동형복수법은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야만스러운 법이지만
그건 이전까지 당연시되었던 복수의 끝없는 확대재생산을 제한하는, 당시로서는 진일보한 법입니다.
"네가 나에게 해를 입혔으니 두 배로 복수하겠다"
"네가 그렇게 복수했으니 나는 더 크게 복수하겠다"라고 하지 말고
똑같은 양으로 정산하고 끝내라는 거지요.
이런 조금씩의 진일보들이 쌓여서 우리의 문명이 만들어져온 것이겠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렇게 당시의 한계를 뚫고 진일보하는 방향과 태도이지,
그 시대의 한계를 안고 있는 그 결과물 자체가 아닐 겁니다.
예수나 싯다르타, 공자 등의 태도에 주목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어록 자체를 절대시하며 그것이 영원불변의 진리라고 강변하는 건
현대에도 함무라비 법전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시대착오이며 야만일 겁니다.
( 이런 경향은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라는 사고방식, 즉 절대주의적인 사상에서 흔히 관찰되는 일입니다.
'예수 가라사대', '공자왈 맹자왈', '레닌 동지의 어록에 따르면'처럼
진리는 주어진 텍스트 안에만 들어있으니 그것만 암송하고 따르면 되고,
새로운 딴 생각을 하는 것은 죄악이라는 식이지요.
진리는 과거에 주어진 것이니 과거를 절대시하고, 새로운 생각과 발전을 거부하게 됩니다.
제가 보기엔, 이런 절대주의자들이 실제로 수행하는 작업은 '진리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질문을 막는 것'입니다. )
- 기독교 계열 신흥종교들의 근원적 문제
기독교라는 건 그렇게, 기존의 야훼신앙에
사람을 신격화하는 설정을 추가하며 기존의 유대교로부터 갈라져나온 신흥종교입니다.
( 우리가 흔히 '신흥종교들의 문제점' '사이비종교들의 문제점'이라고 지적하는 문제들 중 많은 것들이
기독교가 신흥종교였을 때부터 갖고 있었던 문제점들입니다.
- 사람을 신격화하여 숭배한다
- 종말이 가까웠다고 한다
- 무조건적인 믿음을 강요한다
- 공동체 생활을 강조한다
- 헌신과 헌금을 강조한다
- 자기네만이 진리라며 배타적인 태도를 취한다
- 전도를 중시한다
... )
그리고 그 구도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야훼가 예수의 몸으로 현신했었고, 또다시 문선명(정명석, 이만희 등)으로 현신했다"라는 식입니다.
그렇게 JMS나 신천지, 통일교 같은 것들이
기독교의 신격화 수법을 한 번 더 적용해서 기독교로부터 갈라져나온 거죠.
우리가 보고 있는 기독교 계열 신흥종교들의 문제는 그 신흥종교들 자체만의 문제가 아니라
기독교의 그 신격화 교리의 문제입니다.
현재의 신흥종교들만을 비난해봤자, 그 특정 신흥종교가 없어진다고 해도
기독교로부터 다시 똑같은 구도로 신흥종교가 나타나는 구조는 계속 반복될 겁니다.
근본 문제는 기독교의 예수 신격화입니다.
감사합니다-
예수, 슈퍼맨, 토르, 트랜스포머등 인간보다 절대적으로 우월한 존재가 있는데 먼지같이 하찮은 인간을 보살핀다는 전제를 믿는 것이지요.
그렇죠. 서양의 신 숭배 개념이 그렇습니다.
종교(宗敎)는 마루, 으뜸, 높음을 뜻하는 宗 자와 가르침을 뜻하는 敎 자로 이루어진 단어로, '높은 가르침' '으뜸가는 가르침'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 종교라는 말은 원래 싯다르타의 사상을 가리키기 위해 중국에서 만든 말이고,
이후에는 유교도 종교에 포함시키기도 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religion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서구권에서 기독교, 이슬람교 등 '신 숭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일본 개화기 시절 서양 문물을 한자어로 번역하던 때에
이 religion을 종교라는 말에 덮어 번역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서양의 religion에 해당하는 것이 동양에도 있으니 미개하다고 무시하지 마셈"이라는 느낌으로)
그런데 그러고 나니 종교라는 게 너무 범위가 넓어졌습니다.
힌두교와 유교와 불교와 기독교 등등 그 많은 것들을 모두 아우르는 정의라는 게 불가능해졌지요.
종교에 관해 찾아보다보면 '종교라는 건 명확하게 정의가 불가능하다' '종교에 대해 어떤 정의를 해도 반례가 등장한다'는 말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불교나 유교는 신을 믿지 않는 무신론적 사상이니 종교가 아닌 철학이다'라는 식의
앞뒤가 뒤바뀐 기괴한 말까지 심심찮게 나오게 되었습니다.
( 물론 싯다르타의 사상에 관세음보살, 지옥 같은 힌두교 브라만교의 미신적인 내용을 추가한 불교의 종파가 있고
공자의 사상에 더해 형이상학적인 우주의 원리를 설명하겠다는 성리학 같은 유교의 분파가 있긴 하지만)
저도 그냥 습관적으로 '종교'라는 말로 퉁을 쳐서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엄밀하게는 신 숭배를 뜻하는 religion과 싯다르타나 공자의 사상을 가리키는 종교를 분리하여 생각하는 게 오해의 여지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https://www.clien.net/service/board/lecture/18713227CLIEN
감사합니다-
우리는 어차피 이만희나 정명석이 신이 아니라고 증명할 수도 없으니까요 :-)
누구도 가미카제를 신이 보내지 않았다는 증명도,
아테나가 그리스를 돕지 않았다는 증명도,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는 증명도 할 수 없습니다.
원이님이 정명석이나 이만희가 신이 아니라는 걸, 흑은 그들이 부활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할 수 없듯이요.
증거씩이나 있는 일이었나요.
박혁거세가 알에서 나온걸 본 사람들이 있다는 구전이 있으니 그럼 그것도 사실이 되나요?
누가 사진이나 동영상, 아니면 의사 진단서라도 있나요?
이 정도시면 그냥 믿기싫어 내시는 무논리 아니예요?
그 전에 예수가 실존인물이라는 증거 좀 보여주세요.
그 복음서 말고요. 다른 역사적 기록 같은거요.
하지만 신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 또한 그분들의 믿음이 그 입장에서는 이해가 갑니다
제가 생각하는 종교의 사용법은 전지전능한, 인간을 뛰어넘은 상위의 개념이 있고 그 개념적 가르침과 행동을 이행하며 자신과 사회의 이득이 된다면 언제든지 그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믿는 상위의 개념을 인정해주고 얘기하고 싶은 생각을 하고 살았던거 같습니다
올려주신 시리즈나 댓글 흥미롭게 잘 봤습니다 종교의 대한 논쟁은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급의 난제라고 생각은 됩니다만 어차피 존재할 수 밖에 없는게 종교라면 조금 더 인간들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으로 사용되길 빕니다
클리앙에서 절대로 정치나, 종교,논란이되는 사회문제들에 대해서 글이나 댓글을 달지않으려고 했는데 이정도는 괜찮지 않나 싶어 댓글을 달아봅니다
/Vollago
네 흥미있게 봐주셨다고 하니 감사합니다 :-)
저의 다른 글에서도 몇 번 얘기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아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고 인식하는 것도,
자기 짝짓기 상대가 가장 매력적이라고 인식하는 것도,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여긴 것도,
여자는 남자에 비해 열등하다고 여긴 것도,
신이 자연을 움직인다고 여긴 것도,
신분에는 차이가 있다고 여긴 것도
(그것이 사실인가와는 별개로)
그들에게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인식하는 사람들 쪽이 생존하고 번식하기에 유리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자연선택된 meme이지요.
그들이 부도덕하거나 미쳤거나 뇌가 고장났거나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뇌가 정상적으로 작동한 결과일 것입니다.
https://www.clien.net/service/board/use/18959299CLIEN
그리고 한편으로는,
저는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종교는 마약'이라는 비유가 참 그럴듯하다고 생각하는데,
극단적인 경우에 우리가 마약이 필요한 경우가 있듯이 그런 종교를 사용하는 게 효과적인 경우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다 잘 될 거야'라는 말 같은 것도 그렇게,
실제로 문제를 해결해주는 건 아니지만 고통을 줄여주는 마약류, 진통제라고 할 수 있을지도...)
그런데 제한적으로 조심스럽게 사용되어야 할 것이
지금은 함부로 엄청나게 남용이 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한 거구요.
물론 그렇게 믿는 신도들이 많습니다 :-)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왜 사이비가 계속 창궐하는지 궁금했었는데 궁금중이 해결되는 느낌이네요.
감사합니다 :-)
시대의 한계를 돌파한다는 게 누구나에게 쉬운 일은 아니니...
노무현도 무려 '바보' 노무현이죠 ㅠㅠ
즉 합리적으로 예수는 죽었다 부활한 사실은 없습니다. 다만, 그것을 메타포로 받아들여 묵상하고 신앙을 키우는 일은 충분히 허용되는 자유죠. 그걸 증거라 주장하는건 자유가 아니라 ‘무지’입니다.
예수 부활설은 음모론의 일종이라고 생각합니다 :-)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등으로 나뉘어져 있는 야훼신앙은 사실 수백년 전부터 비슷한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 태양신...이집트로부터....)
저 또한 신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삶에서 도저히 감당해낼 수 없는 사건들을 마주하면서
현실과 사회적 구조 안에서
스스로를 위로 받고 생에 대한 동기부여를 얻고자
자연스럽게 나타난 사회적 현상이자 산물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을 통해
우리는 긍정적인 효과를 많이 얻게 되니,
잘못되었다 말할 수 없는 것이죠.
'사실이 아닌 것이라도 믿는 것'은 인류의 진화과정상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일인 것 같습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 중 많은 수는 예수 귀신을 모시면서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하는 무당 같은 거라고 하는 사람도 있죠...
수천년 짜깁기 소설을, 해석한다고 난리를 치고
세월따라 이랬다 저랬다 편집하고
종교의 유일한 순기능은 도덕과 윤리뿐.
말씀 감사합니다.
뇌는 외부 자극을 그대로 받아들여 저장하는 게 아니라
먼저 '예측'을 하고 단편적인 정보를 바탕으로 전체를 추론하고 보완해서
하나의 '그럴듯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스토리텔링 장치라서
모르고 있는 것에 불안을 느끼고,
그 불안을 없앨만한 설명이나 이유가 없다면, 또 이야기에 빈 곳이 있다면
그것을 스스로 '생성'해내어 스토리를 완성시켜 낸다고 합니다.
인간의 뇌와 생성형 AI는 '예측과 생성'이라는 공통된 알고리즘을 갖고 있다고 하지요.
AI는 모르는 것도 모른다고 하지 않고 환각(hallucination)을 만들어 이야기를 만들어내듯이
우리의 뇌도 이야기의 빈 곳에 진리, 이데아, 신,
그리고 라캉이 이야기하는 큰 타자(the Big Other) 같은 환각을 생성해내는 것이 기본적인 작동방식인 것 같습니다.
우리의 뇌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진화하기 전에는 우리는 그렇게 살겠죠 아마...?
단순히 이렇게 생각하다 끝나는 분들이 있고.
좀 더 고민해본 분들이라면
담백하게 인간이다 쪽은
바울이 예수를 이용하여 기독교를 탄생시켰고.
이후 무수한 역사를 거치며 각 시점마다 기독교를 이용한 권력자들에 의해 여기까지 온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만 놓아주고 초기 예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자기희생,이웃사랑)
아무래도 신이 맞다 쪽은
한 가지 설명이 안되는 부분에 의해 고민하는것 같습니다.
당시 제자(동료)들은 예수처형 당시 두려움에 의해 도망가고 예수를 모른다고 부정 했으나.
바로 얼마 지나지 않아 단체로 거리로 나와 죽음을 두려워 하지않고 당당히 복음을 전파하고 다녔다는것입니다.
이건 성경에 나온대로 부활한 예수를 직접 대면하는 신비한 경험을 하지 않고는 힘든부분이라고 보여집니다.
네, 마지막에 말씀해 주신 포인트가 사실 기독교 변증론에서 자주 나오는 주장입니다.
이기적인 유전자를 전달하기 위해 각 동물 개체들이 자기를 희생하는 일은 흔하게 관찰되는 일입니다.
새끼를 위해 목숨을 바치기도 하고, 벌은 무리를 지키기 위해 자살공격을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생물들은 개체를 희생시키더라도 유전자를 많이 퍼뜨리는 쪽으로 진화해온 거죠.
그리고 인류는 유전자(gene)의 전달매개체일뿐만 아니라 meme의 전달매개체이기도 합니다.
이기적인 meme을 퍼뜨리기 위해 개인들이 스스로를 희생하는 일은 얼마든지 일어납니다.
가미카제 조종사, 초기 이슬람 공동체, 마오쩌둥 시절 홍위병들, 현대 종교 추종자들(짐 존스의 인민사원, JMS, 신천지, 전광훈 등의 추종자들)도 자신을 희생하는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언뜻 생각하면 바보같은 짓을 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건 우리가 gene이나 meme이 아닌 각 개체들을 기본 단위로 생각해서 그런 것이겠죠.
당연히도, 그런 희생이 일어났다는 게 그들의 믿음이 사실이라는 증거가 되지는 않습니다.
강력한 집단적 믿음, 환각적 체험, 카리스마적 리더십, 절박한 사회적 상황이 결합하면 그런 이벤트가 종종 생겨나지요.
물론 '우리만은 다르다'라고 생각하는 쪽이 기독교인들이겠죠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혹시 도미닉 크로산의 책 중에 읽어볼만한 책 추천해주실 수 있을까요?
아마 예수는 누구인가 가 가장 유명할 것 같습니다 :-)
1. 권력과 종교 권위의 결탁
예수의 신격화는 단순한 신앙적 해석이 아니라, 권력과 종교 권위가 결탁하면서 생겨난 산물이라는 점에서 문제적입니다. 예수가 남긴 메시지의 혁명적, 사회적 의미가 지워지고, 제국이나 교권 유지에 필요한 순응적 상징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종교가 원래의 정신을 왜곡할 수 있다는 경고로 읽을 수 있습니다.
2. 인간적 모범을 지워버린 신격화
예수를 신격화하면, 그가 본래 보여주고자 했던 인간으로서의 삶의 모범(사랑, 용서, 자기희생)이 오히려 멀어집니다. “예수니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해버리면,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적용하지 않고 단순한 숭배에 머물 수밖에 없죠. 즉 신격화는 오히려 인간적 본보기를 무력화시킵니다.
3. 신화적 사고와 역사적 사고의 단절
신격화는 역사적 인물 예수를 신화 속으로 밀어 넣는 작업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현대의 우리는 역사적 사고를 통해 현실을 성찰해야 합니다. 예수가 실존 인물로서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떤 선택을 했는지를 보지 못하면, 역사는 교훈을 잃고 신화적 이야기로만 남게 됩니다.
4. 절대주의의 폐해
예수를 신격화하면, 그의 말과 행동이 “절대적 진리”로 고정됩니다. 그러면 더 이상 질문과 비판, 재해석이 허용되지 않게 되고, 결국 종교가 살아있는 사유의 장이 아니라 닫힌 교리 체계로 변질됩니다. 절대주의는 언제나 새로운 사고와 발전을 억누르는 방식으로 작동해왔습니다.
5. 반복되는 종교 구조의 문제
글에서도 지적하듯, 신격화는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신흥종교에서 반복되는 보편적 구조적 문제입니다. 즉 특정 교리의 본질적 약점이 시대와 집단을 바꾸어가며 되풀이되는 것이죠. 예수 신격화를 비판하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종교를 형성하는 방식 자체에 대한 성찰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예수 신격화 비판에 공감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유는 종교 권력의 왜곡, 인간적 모범의 상실, 역사와 신화의 혼동, 절대주의의 횡포, 그리고 종교 구조의 반복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단 종교 뿐만 아니라, 정치인이든 연예인이든 스포츠 스타든 한 개인을 과하게 숭배하고 의지하는 문화 자체가 공감이 전혀 안 됩니다. 아마 타고난 기질의 차이겠지요.
사이비에 잘 속아넘어가는 사람들은 아마 이 숭배 기질이라는 게 강한 사람들일 거고요.
네 타고난 유전자와 어릴 때의 경험이 기질을 만들 거고, 그 영향이 크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의 설명에 만족을 못하는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물어봐서 대답을 들어도 '그건 또 왜 그런가' '그게 다인 건가' '그거 정말인가' 라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더 캐물어봤자 좋은 말 못들을 거 같다는 생각으로 그냥 눌러담고 살았을 뿐...
저같은 성격도 '이걸 무조건 믿어라'라는 절대주의적인 태도와는 맞지 않죠 ㅠㅠ
모태신앙으로 나름 열심히 복음주의 신학을 따라 신앙생활을 했는데 어느 순간 너무 답답하더라고요.
자유주의 신학을 접하고 이 답답함이 해결되었는데 조금 더 널리 퍼지면 좋겠습니다ㅠ.ㅠ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자유주의는 거의 욕설 같은 걸테니까.... :-)
절대주의적인 도그마에서 벗어나려면 많은 걸 접해보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절대주의자들은 '지금의 이것이 절대적이고 유일한 정답'이라고 강요하는데
인류의 역사를 공부하고, 다른 문화를 접해보고 하다보면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고
그것을 상대화시켜 볼 수 있게 되지요.
= 자녀는 엄마의 클론
= XX 유전자 (딸)
예수는 여자지만 당시 여성에 보수적인 사회상에 따라
목수라는 힘든일을 직업으로 택하고
여러 남자제자를 거느림
않습니다. 애초에 예수를 믿는거랑 본인이 예수라 칭하는 자들과의 문제점은 신격화 문제가 아니라 종교를 믿는다는거 부터가 문제니까요. 슈퍼맨을 믿는 아이들이 옥상에서 뛰어내리고 본인을 슈퍼맨이라고 칭하는 자들을 믿고 모여서 범단을 이루고 범죄를 저지른다는데 이유를 슈퍼맨의 신격화에서 찾는게 맞아보이지는 않으니까요. 슈퍼맨이 진짜라고 믿는 분별력이 문제죠. 무신론자 입장에서 진짜 문제는 현재 슈퍼맨을 믿는 자들이 너무 많고 덕분에 정부에서도 종교의 자유니 하면서 슈퍼맨은 진짜다 라고 아이들에게 어린나이때부터 교육하는걸 방치하고 있단거죠. 사후세계니 천국이 어떻니 지옥이 어떻니 온갖 판타지도 추가해서요.
다시 쿨타임이 차자 종교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서서히 종교권력의 붕괴가 시작되고 시민사회의 태동과 과학의 발달로 어렵게 종교를 분리시켜 근대를 열었습니다만 ...
이십일세기에 신정 혹은 그에 가까운 통치를 원하는 트렌드가 생긴다는 소식도 들려요. 우려스러운 일이죠. 반동의 힘이 만만치 않습니다. 규율과 질서 전통이라는 덕목 아래 있지도 않은 미화된 종교적 과거로 돌아가자는 이들이 상당하다네요.
아브라함계종교가 유달리 폭력적이라 그렇다기보단 대다수 종교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닐까 합니다. 신앙이 힘과 권위를 가지거나, 차별과 혐오, 배척을 할 타이밍에 종교가 가장 요긴한 도구가 되죠. 힌두교도들이 이슬람교도를 학살한 예나, 한국의 이슬람 사원 근처에서 일부러 돼지바비큐 파티를 한다든지... 배경을 들여다보면 사실 종교의 탈을 쓴 배척과 혐오겠죠. 종교가 권위가 되는 많은 나라에서 벌어지는 사적인 복수나 이득추구 과정에도 교묘하게 종교가 이용되기도 하쟎아요.
본문에도 말씀드렸듯이 '절대 진리가 있다' '이것만이 정답이다'라는 절대주의라는 사고방식이 일반적으로 그렇게 폭력을 부르거나 폭력 그 자체일 거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
단지 종교만 그런구조가 아니며 과학이론도 결국 우주의 모든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은 아직 없고 다 부분적인 것들입니다.
과학에서도 양자역학이 그렇고 비트코인의 전파과정도 그렇죠.
다만 종교는 그 자체보다는 우리가 아직은 세상을 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두려움의 취약함을 이용해 그것을 악용하고 우두머리의 사욕을 쟁취하기 위한 집단이 문제인 것이죠.
절대주의는 '인간은 유한하다. 그런데 우리만은 그걸 초월한 진리를 알고 있다. 그러니 넌 우리 말을 들어야 한다'라는 태도이고
그런 절대주의와 반대되는 것의 예로 과학적 사고방식, 그리고 (다원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가 있을 겁니다.
과학자들은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합니다.
"과학의 가장 중요한 발견은 인간이 무지하다는 사실이다"라는 말도 있지요.
과학적인 방법론은, "우주는 존재하고 인간은 그것을 관찰할 수 있다"는 등의 몇 가지 공리/전제 위에서 자연에 대한 더 좋은 설명을 찾아나가는 활동입니다.
과학교과서에 쓰인 모든 내용은 자연에 대한 잠정적인 설명일 뿐이고, 언제든 더 나은 설명이 등장할 가능성을 받아들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과학적 진술이란 미래에 틀린 것으로 밝혀지기를 기다리는 진술들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민주주의는 인간에 대한 불신을 체계화한 시스템입니다.
주기적인 선거로 지도자를 물갈이하고 권력을 나누어 서로 견제하게 하며, 그 모든 것을 감시하는 언론의 기능을 중시하는 시스템이지요.
민주주의는 너와 내가 서로 죽이지 않고 공존하기 위해 '인간은 평등하다'는 명제 등의 최소한의 공리/전제를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자유에 맞기는 다원주의를 바탕으로 한 사회계약입니다.
(공리로서 받아들인다는 것의 의미는,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걸 절대진리로 믿는 게 아니라 공존을 위해 '그냥 그렇다고 치자'는 것입니다.)
결국 과학적 사고방식과 민주주의의 공통점은 "뭔가를 절대적이라고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 대상이 과학적 사실이든 민주주의든 무신론이든,
무언가를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절대주의자인 것이겠습니다.
절대주의는 태도의 문제이지, 대상의 문제가 아니니까요.
https://www.clien.net/service/board/lecture/18713227CLIEN
좋은 책 하나 읽어 내려가는 것도 좋지만 이런 여러 사람들의 이성적인 이야기 나눔이 저는 더 좋습니다.
모두들 뛰어난 인문학적 식견들을 장착하고 계시네요.
쉽지 않은 주제인데도(쉬워 보이지만 굳이 꺼내서 이야기 하기 어려운) 글쓴이와 댓글쓴이들은 점잖게 비판을 잘 하는 것으로 저는 느꼈습니다.
제가 이렇게 스스로 주제넘은 평가를 하는 것도 대부분의 글과 댓글에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종교… 믿음의 영역이지..이성의 영역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을 이용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원흉일 것이나 이것 또한 인간이 만들어낸 세상이고 진화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500년쯤 흐르면 제2의 다윈이 인간의 진화 2막에서 종교에 대한 내용을 다룰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다시 잠을 청합니다.
이런 글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gene과 meme의 통합 진화론이... :-)
저는 종교를 믿지 않지만, 가족의 영향으로 조금이나마 이해하려고 노력해본 입장에서 극단적으로 단순화 해보면 "종교는 마약이다."로 함축되었습니다.
취미생활 하나 정도로 종교를 믿는다면 큰 문제가 없지만, 주객전도가 되는 경우가 많아 큰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뜬금 없게도 영화 메멘토에서 주인공이 선택한 파편적 증거들을 가지고 행동하는 장면들이 생각나네요.
극단적인 경우에 사용할 수 있는 마약 같은 것 같고,
지금은 그게 제한적으로 조심스럽게 사용되는 게 아니라
너무 함부로 남용되고 있는 게 아닐까 합니다 :-)
중국의 태평천국 운동처럼 기독교 영향을 받은 신흥종교도 있지만, 우리나라 원불교 대종교처럼 그렇지 않은 신종교도 있습니다.
유일신 종교의 대표가 아무래도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천주교와 개신교)이고, 실제로 존재했던(또는 실제로 존재했다고 알려진) 사람을 신으로 여기는 종교가 기독교 하나 뿐이긴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 때문이다.'라고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면서 비윤리적 행위를 자행하거나 추종의 대상자가 행하는 비윤리적 행위를 돕거나 방조하는 것이 신흥 종교 또는 사이비 종교가 보여주는 문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추종을 약간 느슨하게 본다면 다단계 판매 조직에서, 90년대 주사파에서, 최근에 법원을 침입한 폭도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JMS, 신천지, 통일교 등이 기독교의 형식을 빌린 건 이미 그 형식이 널리 알려져 있어서 유인할 수 있는 대상의 수가 많으며, 그 쪽 신흥/사이비 계통들 나름대로(최태민부터 아니 어쩌면 그 전부터) 만들어진 사업 모델을 가지고 시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예전에 이이제이 종교 특집에서 들었던 것 같습니다.).
믿고 따르는 것 자체는 어느 순간에는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이성적인 판단에 따라서 움직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기 어려워 망설이기도 합니다. 성공을 추구하는데, 내가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 길을 알려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믿고 행동한다면 우리는 어떤 행동을 주저하지 않고 할 수 있게 됩니다. 또는 다른 누군가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도 있게 되고요. 더 큰 선을 위해서. 나와 가족을 위한 개인적인 성공도 그렇지만 독립, 민주화, 선교, 전쟁의 승리 같은 좀더 큰 단위에서 성취를 추구할 때에도 그렇습니다.
원래 남기려고 했던 댓글보다 길어지게 됐습니다..
드리고 싶는 말씀은 '꼭 기독교의 신격화 개념 때문이라기 보다는 믿음을 갖는 사람들의 무조건적인 수용, 그 믿음을 악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 같다'입니다.
모든 신흥종교가 아니라 기독교 계열의 신흥종교에 대해 얘기한 거라서 그렇긴 합니다.
"믿고 따르는 것 자체는 어느 순간에는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이 이성적인 판단에 따라서 움직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기 어려워 망설이기도 합니다."
; 뇌는 정확성보다는 신속성을 선택하는 쪽으로 진화해온 것이니
말씀대로 뭔가를 속단하고 확신하고 하는 것이 뇌의 원래 작동방식에 맞기는 하지요 :-)
https://www.clien.net/service/board/lecture/19029084CLIEN
너무나 멋진 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천주교인이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신으로 보는 사람에게도
사람으로 보는 사람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를 다시 생각케 하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질문을 막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매우 동의합니다
제가 근본적으로 대부분의 종교(뭐라 부르건)의 문제가 도그마화되어 질문을 틀어막게 되어 결국 고여서 썩기 때문이라고 봐왔거든요.
전 깨어있는 개신교신자라면 타락한 한국교회를 과감히 탈퇴하고 다른 방법으로 신을 찾아야 하는거아닌가 합니다
신흥종교가 기독교 논리의 허술한 고리에서 많이 나온 것은 사실이지만, 기독교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일정 확률로 ‘자신이 신이다. 혹은 신의 대리자다 ’라고 나타날 사람은 있었을 듯 합니다.
넷 그런 건 언제라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겠습니다.
인류 역사상의 왕조 중 자신이 신이라거나 신의 대리인이라고 하지 않은 예는 별로 없겠고...
누군가가 다른 사람을 통치할 수 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럴 때 가장 쉽게 찾을 수 있는 정당화의 근거가 '신'이나 '절대진리' 같은 것이겠죠.
네, '존재하지 않는 것을 믿는 것' '사실이 아니더라도 일단 그렇다고 속단하는 경향' 같은 건 인간의 진화과정상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중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칠때는 야훼를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였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도미닉 크로산이 제기하는 문제점은 아마도 중세 니케아공의회에서 확립된 삼위일체론에 따라
예수를 고유의 신성을 가진 절대자로 우상화했다는 문제점을 말하는것으로 보입니다.
기독교가 타락하고 쇠퇴한 이유가 어쩌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는 반성이기도 하고요.
그렇다고 예수가 그저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폄훼도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살아온 궤적과 가르침, 그의 죽음이 미친 인류적 영향력은 '초인적'이니까요.
예수가 신성을 가진 위버멘쉬가 아닌, 부활하지 않은, 동정녀가 남자와의 교합없이 단성생식으로 출산하지 않은, 물을 포도주로 만들지 않은, 죽은 사람을 살리거나 병을 낫게하는 기적을 행하지 않은,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생물학적 본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의 가르침이 인류에게 전한 선한 영향력은 단연 '신성'을 띌 정도로 '초인적' 이었습니다. 이는 그가 사람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이고요.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도 따지고 보면 예수 당시에 쓰이던 아람어('바르 나샤, bar nasha')를
수십 년 뒤 헬라어(그리스어)로 옮겨 쓰면서 생겨난 애매한 표현 중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아람어에서는 ‘바르 나샤’가 꼭 신비한 호칭이 아니라
그냥 '어떤 사람', '나 같은 사람' 정도를 뜻하는 일상적인 말이었다고 하죠.
이게 번역과 공동체 해석의 과정을 거치면서 의미가 겹겹이 덧칠되어 버린 것 중 하나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건 그시대상황을 현 시대 대한민국 법률로 보면 증거 있다 라고 할거같아요 ㅋㅋㅋ 저정도 인원에 저정도 증거물로 재판시에 갈리는거 꾀 봤는데 ㅎㅎ
떼법... ㅠㅠ
이에 맞서는 것은 이성입니다. 이성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이야기 선호와 권위 추종을 거슬러, 근거를 요구하고 검증을 반복하도록 훈련합니다. 과학과 기술의 쓸모있는 성취가 충분치 않았다면, 우리의 이성은 종교 자체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자리까지 도달하기도 전에 축출당했을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특히 큰 사회적 해악을 드러내는 사례로 아브라함 계열의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 및 수많은 파생상품들)를 지목할 수 있습니다. 물론 대다수의 종교가 인물의 신격화와 꾸며진 이야기라는 공통 요소를 갖지만, 아브라함 계열의 악랄함이 두드러지는 까닭은 몇 가지 도그마가 가진 구조적 특징 때문입니다. 핵심은 종말론과 배타성입니다. 종말론은 최후의 심판과 영원한 보상을 약속하거나 영원한 형벌을 경고하며, 공포를 이용해 공동체 이탈을 심리적으로 차단합니다.
배타성은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명령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배타성은 다른 모든 교리에 달라붙어, 다른 종교뿐 아니라 같은 집단 내부의 상이한 해석마저 이단으로 규정하게 만듭니다. 이 지독한 배타성이 폭력적으로 작동한 결과, "의심은 곧 배신, 질문은 곧 불신앙"이라는 단순한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이 두 가지 근본 교리가 다른 종교와 다른, 더 강력한 심리적 속박과 타집단에 대한 폭력에 무뎌지게 하는 세뇌의 중추 역할을 합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경우 ‘대속’ 즉 ‘회개하면 리셋’이라는 교리가 결합합니다. 이는 개인 차원의 도덕성을 거세시키는 방향으로 사람들을 오도하는 강력한 무기가 됩니다. 구조적으로 도덕적 해이의 유인이 생기는 셈입니다. 영화 ‘밀양’은 “신에게 용서받았으니 끝났다”는 태도가 피해자의 고통과 책임의 문제를 어떻게 뭉개버리는지 잘 보여줍니다. 개인의 성찰과 공동체적 책임의 자리에 초월적 면책이라는 달콤한 해법이 대신 들어가게 됩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사람이 악인이 되지 않기가 더 어렵습니다.
현대 사회는 자본주의의 지배 하에 있습니다. 하나의 집중화된 권력이 그 모든 자본을 통제하지 못합니다. 기독교 중에서도 개신교는 지난 백여년간 전면화된 자본주의에 발빠르게 적응하여 소위 번영신학이라는 것을 만들어냈습니다. 순복음에서 노골적으로 내세운 ‘삼박자 축복’(영혼·건강·물질의 동시 번영) 같은 교리는 “우리 교파를 따르면 현세에서도 복을 받는다 = 부자 된다”는 메시지입니다. 처음에는 다소 점잔을 빼던 다른 교파들도 경쟁적으로 이를 도입하여 부끄러운 줄 모르고 이 장사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종말론적 공포, 배타적 소속 논리, 대속과 회개의 면책 구조, 그리고 현세적 번영 약속이 한데 얽히면, 공동체는 비판을 봉쇄하고 순응을 보상하며 책임을 면탈하는 방향으로 작동합니다. 이 공동체들은 애초에 신념의 유지와 확장을 최우선 목표로 설계되어 있고, 세뇌의 반복, 소속의 보상, 이탈의 처벌을 통해 구성원을 심리적으로 강고하게 속박합니다.
통일교니 신천지니 하는 기독교 파생상품들도 구조적으로 똑같은 바탕을 갖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사회악은 이렇게 작동하고 있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진화론, 뇌과학과도 겹치는 부분이 있고, 대체로 공감합니다 :-)
탁월한 해석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비전이 공동체 구성원 스스로 요직에 올라 큰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 라는 내적 원동력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권세가 확장되고 단단해 지는 것 같습니다.
저로서는 정리할수 없는 생각들을 대신 정리해주신 기분입니다.
"제 생각과 같다" 라는 숟가락 얹기는 아니구요.
제가 설명하고자 하는 개념들을 명확하게 말씀주셔서 감사한 마음입니다.
감사합니다 :-)
어쩌면 사상을 탄압당한 뒤, 민초들이 무의식적인 반발, 보상으로서 그들을 영웅화 신격화 시켜 지켜내려는 것 같기도 합니다.
특히나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좋은 시스템을 만들려고 노력해야지,
이재명이든 누구든 '영웅'이 나타나서 내 문제를 해결해줄 거라 기대하는 건 건강하지 못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신이란 무엇인가'부터 각자의 생각이 다 다르기에 그 이후에 이어지는 '신은 존재하는가'에 이르러서는 논쟁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생각을 공유하는 것으로 충분하죠. (하지만 그걸 이용해먹는 나쁜놈들은 때려잡아야...)
감사합니다.
'신이란 무엇인가'부터 각자의 생각이 다 다르다고 하신 것처럼,
신 같은 건 보편적으로 정의되지 않는 무언가에 대한 이야기이죠.
'과학은 xx에 대해 답하지 못한다. 그게 과학의 한계다'라는 말이 종종 들립니다만,
가령 과학은 '거시기는 머시기인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합니다.
그건 정의될 수 없는, 정의되지 않은 무언가에 대해 잘못된 질문을 하기 때문인 것이지,
과학의 한계라고 할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신은 존재하는가' '우주의 목적은 뭘까'라는 말 등은 그런 '잘못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류의 철학사, 사상사라는 건 그런 잘못된 질문의 '답'을 찾아내어온 게 아니라
그 질문과 관련된 예상치도 못했던 부수적인 것들을 발견하며 확장되어온 역사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