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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이어집니다 ㅋ
얼마나 잤을까, 사람들의 기지개 소리에 눈을 뜨니 버스는 고속도로 휴게소에 도착해있었습니다. 김이 서린 창을 닦고 밖을 내다봤습니다. 휴게소라기보다는 주유소가 있는 거대한 주차장처럼 보였습니다. 구글맵을 켰습니다. 네피도 부근. 바간까지는 절반 정도 왔네요. 어둑하게 불을 밝힌 화장실에 다녀와 담요를 뒤집어 썼습니다. 버스 안은 에어컨을 얼마나 틀어댔는지, 너무 추워서 얼어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억지로라도 더 자야지, 에어쿠션 베개에 바람을 불어넣고 잠을 청했습니다.
버스는 아침 6시 30분 바간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예정보다 한시간 반 늦었지만 다들 그러려니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승객들은 시내로 가기 위해 택시(자가용 택시) 기사들과 흥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피곤하기도 하고 딱히 깎는데 소질이 있지도 않은터라 기사 중 한명을 붙잡고 물었습니다.
뉴바간에 가려는데요.
합승없이 텐싸우전.
고개를 끄덕이자 한쪽에 자리한 승합차를 가리켰습니다. 기사에게 호텔 바우처를 보여주고 시트에 몸을 기댔습니다.
바간으로 들어가는 게이트에서 티켓을 구입했습니다. '바간 고고학 지구'라 써있는 티켓은 3일권이었습니다.
항상 가지고 다니세요. 티켓부스의 직원이 씽긋 웃으며 말했습니다.
차는 30분 쯤을 달려 호텔 앞에 멈췄습니다. 배낭을 질질끌며 문을 열자 중국풍의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미얀마에는 중국 자본이 많이 들어와있다더니, 이 호텔도 그런건가, 두리번거리는데, 한쪽에 앉아있던 중국인이 엄청 반가운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습니다.
저 한국사람입니다.
실망한 표정의 중국인을 뒤로하고 잠이 덜 깬 리셉션 직원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얼리 체크인 안되는데요.
레터로 보낸 요청에는 답변도 없더니. 맘상해서 짐이나 맡아달라고 하자 프런트 맞은 편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되돌아왔습니다. 우와 제법 불친절하네?
하나만 더, 이바이크(전기오토바이)를 빌리려고 하는데요.
잠시 기다리라며 어디론가 사라졌던 직원은 코팅된 명함이 붙어있는 키를 들고 나타났습니다.
이걸 가지고 호텔 앞을 지나 오른쪽으로 꺾어서 걷다가 왼쪽으로 꺾으면 있는 바이크샵으로 가세요.
이상한 부분에서 친절하군. 짐을 맡기고 샵으로 향했습니다.
역시나 잠이 덜 깬 표정의 주인아주머니는 내 키를 보더니 늘어선 이바이크 중 가장 깨끗한 놈을 꺼내주셨습니다.
사실 바이크 자체를 타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냥 모터달린 자전거겠지 생각하고 간 것인데, 막상 시트에 앉아보니 작동법을 알 수 없었습니다. 멋적은 표정으로 이거 어떻게 해야 움직여요? 물어보자 아주머니의 표정이 싹 바뀌었습니다. 이녀석 초보구나. 아무 말없이 내 이바이크를 빼앗더니 가장 낡아보이는 것으로 바꿔주셨습니다.
이게 전원, 이게 엑셀러레이터, 이게 브레이크, 전조등은 이렇게 켜고, 깜빡이는 이렇게, 오케이?
오케이.
아주머니는 내가 휘청휘청하는 걸 지켜보다가 고개를 젓고 가게 안쪽으로 사라졌습니다. 골목끝까지 가는데 두번쯤 넘어질뻔 하고나서야 운전이 몸에 익었습니다.
2번국도에 들어섰습니다. 이라와디강을 따라 이어지는 도로는 몇개의 마을을 거치며 냥우로 향해있었습니다. 도로사정은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군데군데 패여 있었고, 대충 보수된 탓에 울퉁불퉁한데다 마른 모래까지 덮여있어 미끄러웠습니다. 멍때리고 달리다가는 풀숲으로 돌진하기 일쑤였습니다. 다행이라면 이바이크의 최고속도가 40km/h 인 탓에 어차피 때려 밟지 못한다는 정도였습니다. 빠르게 추월해가는 차들에 양보하며 달리다보니 왼편 언덕위로 유적이 나타났습니다.
부처의 고향 룸비니에서 봤던 절터와 비슷한 모습이었습니다. 벽돌로 지어진 터에 작은 파고다들이 보였습니다. 한쪽에 앉아있던 젊은 남자가 말을 걸어왔습니다.
신발은 벗어야 합니다. 이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풍경이 아름다울거에요.
고맙습니다. 인사를 하고 무너진 벽 위로 걸어올라갔습니다. 멀리 이라와디강과 숲, 여기저기 파고다들이 보였습니다. 사진으로 보던 바간의 풍경이었습니다. 드디어 왔구나. 잠시 기대앉자 강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아름다운 풍경이죠?
돌아보니 입구에 있던 젊은 남자였습니다.
이 풍경이 보고 싶었어요.
바간은 처음인가요?
미얀마는 처음입니다.
환영합니다.
남자는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조용히 자리를 떴습니다. 바람을 조금 더 느끼다 자리를 털고 일어섰습니다. 입구에서 다시 만난 젊은 남자는 혹시 그림에 관심이 있냐고 물어왔습니다. 바간 사람들의 생계 중 하나라는 그림을 보여주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훌륭했습니다. 사고 싶은 욕구가 솟을 만큼요.
그림을 좋아하지만 지금은 사고 싶지 않군요. 조금 더 돌아다닐 생각이거든요.
남자는 더이상 권하지 않고 미소지었습니다.
좋은 여행이길 바랍니다.
남자에게 손을 흔들고 이바이크로 향했습니다.
길을 따라 조금 달리자 마을이 나타났습니다. 상점과 숙소들, 음식점이 늘어선 제법 큰 마을이었습니다. 그 입구에 마누하사원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1057년 세워진 마누하사원은 따톤왕국 마누하왕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합니다. 마누하왕은 바간왕국과의 전쟁 중 포로로 잡혀왔는데, 이 사원에 감금되어 지냈습니다. 사원에는 네 방향을 바라보는 세 개의 좌불과 거대한 와불 하나가 있는데 모두 크기에 비해 협소한 공간에 안치되어있습니다. 갇혀 지내야했던 마누하왕의 참담한 마음을 표현한 것이라고 합니다. 사원을 돌아다녀보니 안치된 부처의 얼굴을 제대로 보기 어려울만큼 공간이 좁았습니다. 와불 앞 통로는 한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정도였습니다. 사원의 분위기도 무척 차분했습니다.
네 방향의 부처와 와불을 뵙고 경내 한구석에 앉자, 다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사원 앞에서는 아이들이 고무줄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딘지 동작도 리듬도 어릴적 기억이 떠올라 한참을 보다 슈웨산도파고다로 향했습니다.
바간에 온 또 하나의 이유는 일출 또는 일몰에 보이는 탑들의 풍경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천 개의불탑' 위로 뜨는 해, 하늘 가득 떠 있는 열기구의 풍경을 보는 것은 많은 사람들의 버킷리스트에 포함된다고 했습니다.
슈웨산도파고다는 일몰로 유명한 곳입니다. 길을 따라 이름모를 사원과 파고다들이 만들어내는 풍경 속으로 달리다보니 멀리 파고다가 나타났습니다.
출발 전 뉴스를 통해 바간의 파고다는 폐쇄중이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2016년 대규모 지진 후 안전과 유적보호의 이유로 출입이 금지되었다는 거죠. 그래도, 지금쯤은 풀렸겠지, 희망을 가지고 왔는데, 실제 와보니 모든 파고다의 위로 올라가는 길이 막혀있었습니다.
슈웨산도파고다 역시 길이 막혀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파고다 위에서 보는 일몰의 풍경은 볼 수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실망한 표정으로 서있는데, 동네 꼬맹이들이 서툰 영어로 말을 걸어왔습니다.
제가 아는 파고다가 있는데 가실래요? 거기는 올라갈 수 있어요.
언젠가 들은 "아무도 모르는 비밀의 사원에 데려가준다고 해서 따라갔다가 문득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 혼자 버려져있더라."라는 얘기가 떠올랐습니다. 이 꼬맹이들이 그럴 것 같지는 않았지만 굳이 모험을 할 이유는 없어보였습니다.
괜찮아. 난 파고다에 올라가는 걸 좋아하지 않아.
대답해주고 걸음을 옮겼습니다.
슈웨산도파고다를 한바퀴 돌고 와불을 모신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마누하 만큼은 아니었지만 역시나 거대한 와불이었습니다. 그것 참... 멍하니 보고 있다가 나오자 파고다들 사이에서 자유롭게 풀을 뜯고 있는 염소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다가가면 슬금슬금 피하는게 재밌어 졸졸 따라다니다 이바이크로 돌아갔습니다. 그나저나 일몰을 어떻게 본다지. 구글맵에서 본 난민타워로 가야하나, 고민스러워졌습니다.
2번국도로 돌아나오자 맞은편에 거대한 파고다가 보였습니다. 호기심이 일어 파고다 방향으로 향했는데, 점점 길이 좁아지더니 결국에는 샛길로 들어섰습니다. 파고다 부근까지 가보니, 파고다의 뒤로 이어지는 길이었습니다. 길 끝의 철조망 중 한 칸이 비어 있었습니다.
꼬맹이들이 말한 '올라갈 수 있는 파고다'가 여기를 말한 거였나, 파고다 경내로 들어섰습니다.
파고다의 상부로 올라가는 계단 밑에서 보니 문이 열려있었습니다. 아마도 유지보수를 위해 공사 인부들이 드나드는 문인 것 같았습니다. 아, 이런 곳으로 올라간다는 얘기였구나.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네, 근데 딱히 자랑스럽게 해도 되는 일도 아니겠네, 생각이 들었습니다.
파고다에서 본 풍경은 무척이나 아름다웠습니다. 잠시 풍경에 취해있다 철조망을 통해 돌아나왔습니다. 만약 이런 식이라면, 꼬맹이들이 가리킨 방향에도 올라갈 수 있는 파고다가 있지 않을까, 궁금해졌습니다. 담마얀지사원쪽으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십여분을 달리자 들판 한가운데 불쑥 사원이 나타났습니다. 바간의 파고다와 사원들은 멀리서는 작은 건물처럼 보이는데 막상 다가가면 압도적이기 일쑤였는데, 담마얀지 역시 규모가 어마어마했습니다.
입구에서 입을 헤에 벌리며 사원의 규모에 놀라다, 경내 나무에 걸린 마리오네트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네팔에서 본 녀석들과 모양도, 색도 비슷했습니다. 꽤나 먼 거리인데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있는걸까 궁금해졌습니다.
사원의 안쪽으로 들어서자 입구에서 한 남자가 바닥에 그림을 펼쳐 보여줬습니다. 이 남자도 그림을 파는구나. 고개를 흔들자 더 권하지 않으며 안쪽의 통로를 가리켰습니다. 저쪽이 시원할거에요. 사원 안쪽을 돌며 네 방향의 부처를 뵙고난 후 남자가 가리켰던 곳에 앉았습니다. 살랑살랑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오는데 선선하고 아늑했습니다. 아까의 남자에게 고개를 끄덕여 감사인사를 건넸습니다.
사원을 나와 아까의 꼬맹이들이 가리킨 방향으로 이바이크를 몰았습니다. 길 끝에서 작은 사원을 발견했지만, 폐쇄되어 있었습니다. 꼬맹이들이 얘기한데가 더욱 궁금해졌지만, 그만 돌아야가야겠다 생각이 들었습니다.구글맵을 켜고 일몰언덕이라 이름붙여진 전망대로 향했습니다.
언덕이래봤자 평지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이곳에서의 일몰도 그다지 감동적이지는 않을 것 같았습니다. 아무래도 난민타워로 가봐야하나, 두리번거리다보니 커다란 나무 아래 노점상이 보였습니다. 바이크를 한쪽에 대고 다가가니 아주머니가 두 팔을 벌려 환영인사를 하고는 그늘 아래 탁자와 의자를 펼쳐주셨습니다. 앉으라는 손짓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나무그늘 아래 비스듬히 앉아 쉬는데, 어디선가 나타난 꼬마아가씨가 아주머니와 교대했습니다. 딸일까, 코코넛! 코코넛 드세요! 물도 있어요! 시원한 물이에요! 호객을 하는데 제법 당찼습니다. 눈길이 마주치자 씽긋 웃는게 예뻤습니다.
착한 아이구나. 사진 한장 찍어도 될까? 물론이죠!
꼬마아가씨를 담고 가게를 떠났습니다. 안녕히계세요. 멀리 앉아있던 아주머니가 손을 흔들었습니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주] 바간은 미얀마 최초의 통일왕조 바간왕국의 동명 수도로 '천 개의 불탑'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기 1047년 세워졌고, 1287년 몽골의 침략으로 멸망할때까지 번성했습니다.
바간은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인도네시아 보로부두르와 함께 세계 3대 불교 유적으로 불립니다. 서울 강서구 정도의 크기지만 2,227개의 불탑과 수도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지역인 올드바간과 유적 보호를 위해 주민들을 이주시켜 건설한 뉴바간, 공항과 슈웨지곤파고다가 위치한 냥우 지역으로 구분됩니다다. 바간의 왼편으로는 이라와디강이 흐르는데, 강을 따라 북쪽의 만달레이까지 갈 수 있습니다.
옛 추억이 새록새록나네요. 사진 감사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