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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잠깐 말씀드렸던 그 날입니다. 여행 기억을 떠올리다보니, 새삼 참 여러곳에서 여러가지 삽질을 했군요. 어쨌든...
미얀마 양곤에서의 세째날, 아침 일찍 슈웨다곤을 다녀와서 짐을 챙겨 숙소 리셉션으로 내려갔습니다.
체크아웃 하려고.
어디로 가?
바간행 야간버스를 탈거야.
바간은 멋진 곳이야.
짐을 맡겨도 될까? 좀 나갔다오려고.
물론, 몇시에 돌아올 생각이야?
여섯시 쯤. 이따봐.
스탭에게 손을 흔들고 양곤순환열차를 타러 갔습니다. 양곤순환열차는 서울지하철2호선처럼 도심을 빙글빙글 돌며 시민들의 발이 되어주는 기차입니다. 우리돈 150원 쯤을 내고 타는 기차안 풍경이 근사하다고 해서, 미얀마 여행을 계획할때부터 꼭 타기로 했었습니다.
처음 보는 역사가 근사했지만, 열차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구경은 나중에, 곧장 표를 사러 갔습니다. 양곤순환열차는 특이하게도 역사내 창구에서 표를 팔지 않았습니다. 7번 플랫폼으로 가면 매표소가 있다고 했습니다. 7번이 어딜까, 일단 대합실로 들어갔습니다.
열심히 두리번거렸지만 7번 플랫폼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머리속에서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역사로 나가 제복을 입은 직원에게 물었습니다.
7번 플랫폼이 어디죠?
육교를 건너 저쪽으로 가세요.
그럼 그렇지, 대합실에서 기다려서 될 게 아니었습니다. 직원이 가르쳐준 길을 따라 육교로 올라가니 표지판이 보였습니다. 저기군.
무사히 도착해서 티켓부스를 찾았습니다.
순환열차를 타려고 하는데요.
여기 있습니다.
열차가 언제 오나요?
곧 출발합니다.
표를 받고 플랫폼을 보니 멀리 전철이 한 대 보였습니다. 우와, JR이네, 저걸 기차로 쓰는구나, 신기해하며 다가가는 순간 열차가 출발했습니다. 한 남자가 열차를 따라 달리더니 점프해 탑승에 성공했습니다. 멋지네. 박수를 치고 두리번거리며 내 열차를 찾았지만 아직 도착 전인 것 같았습니다.
오래지 않아 열차 한대가 도착했습니다. 7번 플랫폼, 낡은 열차 - 예상했던 양곤순환열차의 모습이었습니다.
조금 높은 발판을 밟고 올라서니 양쪽으로 좌석이 배치된 아늑한 공간이 나타났습니다. 좌석은 플라스틱처럼 보였지만 나무에 페인트칠을 한 것이었습니다. 문이 있어야 할 공간은 뻥 뚫려 있었습니다. 창문은 닫을 수 있는 것 같았지만 문과 마찬가지로 열려있었습니다.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자, 열차는 긴 경적소리를 울리고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양곤에서 종종 보이던, 철로에 빨래를 늘어놓고 말리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저 라인은 계속 안다니는 걸까, 열차 스케줄에 맞춰 빨래 위치를 바꾸는 걸까, 궁금해졌습니다.
열차는 조금 속도를 냈지만 그다지 빠른 속도는 아니었습니다. 도심을 벗어나자 산업시설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낡은 풍경들이 스쳐지나갔습니다.
기차는 제법 많이 흔들렸습니다. 때때로 기우뚱하고는 그대로 한참 달려갔습니다. 설마 넘어지는 건 아니겠지 불안하면서도 놀이공원에 온 것 같은 기분도 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신발을 벗고 양반다리로 앉거나 비스듬히 기대거나 아예 누워서 가고 있었습니다. 두 남자가 자리에서, 그리고 문 앞 계단에 앉아 담배를 피웠습니다. 기차 안으로 담배 연기가 느릿느릿 돌아다녔습니다.
세 번째 역에서 수박을 파는 행상아주머니가 열차에 올랐습니다. 우리돈으로 300원. 아주머니는 수박 한조각을 네모나게 잘라 긴 꼬지와 함께 비닐봉지에 담아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수박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어느새 열차 안은 수박냄새로 가득했습니다. 나른하고 평화로운 여름날이었습니다. 규칙적으로 덜컹이는 기차의 리듬에 맞춰 차창밖을 보고 있으니 슬그머니 눈이 감겼습니다. 다리를 길게 뻗고 자리에 누웠습니다.
잠깐 잠든 것 같은데 한시간이나 지나있었습니다. 어느새 멈춘 객차에는 나 혼자뿐이었습니다. 다시 머리속에서 경고음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구글맵을 켜보니 양곤 동남쪽의 어느 곳이었습니다. 지명이 써있기는 한데 읽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가 어디지? 대체 왜 여기에? 가방을 챙겨 열차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이 기차는 객차간 연결통로가 없어서 플랫폼에 내린 다음 다른 객차에 타야하는 구조였습니다.) 뒷 칸에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이 왁자지껄 얘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실례. 네들 중 누가 영어 하니?
여학생들이 일제히 남학생 하나를 가리켰습니다. (ㅋㅋㅋ)
이 열차 양곤 가니?
가는데요.
남학생이 대답했습니다. 휴우, 다행이다. 돌아가기는 하는구나.
여기서 얼마나 걸리니?
한 시간요.
여학생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습니다. 다른 학생들이 일제히 아냐, 더 걸려, 진짜? 토론을 시작했습니다.
두 시간요.
다른 여학생이 대답했습니다. 합의에 도달한 것 같았습니다. 식은땀이 났습니다. 애초에 세 시간 정도 타고 터미널을 가려고 했었는데, 소요 시간이 네 시간 반으로 늘어나있었습니다.
이 열차가 순환열차 맞니?
아뇨, 교외선인데요.
헐. 열차를 잘못 탄 거였습니다. 어쩐지 순환선이 자꾸 스위치백을 하더라. 어쩐지 도심이 아닌 것 같더라. 시간을 계산해보니, 다행히 야간버스는 탈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아, 한숨을 쉬고 학생들에게 감사인사를 했습니다.
고마워. 덕분에 살았다.
별 말씀을요.
손을 흔들고 학생들의 맞은편에 자리잡고 앉았습니다. 내 표정을 살피는 것 같아 억지로 웃음을 지으니 그제서야 다시 자기들끼리 얘기에 빠져들었습니다.
어쨌든 풍경은 아름다웠습니다. 순환열차는 타지 못했지만 교외선을 탄 덕에 열대의 농촌 풍경을 보게 된 거였죠. 이제와 조바심을 내봐야 소용 없었습니다. 풍경과 이 시간에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기차가 양곤에 접근할 때 쯤 스콜이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창문이 열려있으니 비가 그대로 열차 안에 들이쳤습니다. 비가 왼쪽에서 들이치면, 사람들은 오른쪽 좌석으로 옮겨 앉았습니다. 다시 오른쪽으로 비가 들이치면 사람들은 왼쪽으로 옮겨 앉았습니다. 비를 피하기 좋은 문 옆자리에 쭈구리고 앉아서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웃음이 났습니다. 내가 낄낄 웃자, 눈이 마주친 건너편의 아이가 같이 웃었습니다. 폭우속을 덜컹거리며 열차는 양곤역으로 향했습니다.
양곤역에 도착했을 때 비는 그쳐있었습니다. 예정보다 한시간 반 늦은 시간, 그랩으로 택시를 불러 숙소로 향했습니다. 시간이 얼마 없었습니다. 스탭에게 팁을 주는 것도 잊고 서둘러 버스터미널로 향했습니다. 조금 빨리 가주실래요? 택시기사님의 터프한 운전 덕분에 버스 출발 30분 전에 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말이 터미널이지 벌판에 띄엄띄엄 작은 건물들이 모여있고, 각 건물들에 버스회사가 있는 식이었습니다. 통합 시스템이 아니라 그냥 아무데나 내리면 자기 버스를 잃어버리기 딱 좋은 시스템이었습니다. 불빛도 거의 없었습니다.
가슴을 쓸어내리고 티켓카운터(로 보이는 곳의) 직원에게 바우처를 내밀었습니다.
네 버스는 한시간 반 뒤 거네? 저기 대합실에서 기다리렴.
헐. 이번에는 버스 시간을 착각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역시 대단하네, 허탈한 웃음이 났습니다.
잠시 터미널을 구경하고 바간행 버스에 올랐습니다. 당분간 안녕. 멀어지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잠을 청했습니다.
너무 재밌어요~~~ㅎㅎ
더 많이올려주세요 기다리다보니 현기증나요...
2001년에 양곤에 갔을 적에 시내에만 있느라 님처럼 교외 한적한 풍경을 느낄 시간이 없었는데 덕분에 즐길 수 있어 고맙습니다.
비행기로도 가보고... 참 아름다운곳 입니다
저는 사업때문에 가장최근에는 2월에 가봤지만
미얀마는 참 숨은 진주입니다
빨리 코로나가 잡혀야 할텐데요...
하하하... 제가 "멋진 여행작가님" 이라고 메모한 걸 눈치채셨군요.^^
앞으로도 좋은 글과 멋진 사진 부탁드립니다.
한번은 가보고 싶네요
이렇게 평화로이 여행을 할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그 날이 온다면..
그땐 여행지에서 겪는 실수와 낭패에
글쓴분 처럼 너털웃음으로 반응하리라.
나에게 조금은 더 관대해 지리라.
마음에 새겨 봅니다.
그리고 카오산에서 만난 가게 아주머니 고향이 미얀마셨는데
코로나 걱정이 엄청 많으셨습니다 (올해 2월에 방콕에 있었음...이때까지만해도 금방 좋아질줄 ㅠㅠ)
잘 지내고 계신지 궁금하네요. 빨리 코로나가 끝나면 찾아가봐야겠습니다 ㅎ
공감 66번입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