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의 양곤에는 '양곤순환열차'가 있습니다. 서울지하철2호선처럼 양곤을 빙글빙글 돌며 사람들의 발이 되어주는 기차인데, 우리돈으로 150원 쯤 내면 어느 역이든 갈 수 있습니다. 그냥 빙글빙글 돌아도 되구요.
사실 미얀마 도착한 다음날 삽질을 한번 했습니다. 기차를 잘못 타는 바람에 교외를 다녀왔죠. 그래서, 양곤에서의 마지막 밤에는 피곤하기도 하고 그냥 좀 쉬면서 보내야겠다 생각했었습니다. 열차는 다음에 타야겠다고요. 그런데...
눈을 뜨니 새벽 네시 반이었습니다. 고작 세시간도 못잤는데 이 무슨... 잠이 깬 건 억울했지만, 역시 가봐야 하나, 아니 피곤한데 그냥 이대로 뭉갤까, 안가면 후회하겠지, 다시는 못올 수도 있잖아, 잠깐 고민하다 억지로 일어났습니다. 피로는 하나도 풀리지 않았지만, 몸을 움직일 정도의 기운은 있었거든요. 카메라를 챙겨 택시를 불렀습니다. 양곤중앙역으로 가주세요. 구글링으로 찾아낸 시간표를 확인하고 여섯시 십분 출발하는 양곤순환열차를 타러 갔습니다.
식민시절 지어진 양곤역은 규모가 제법 큽니다. 미얀마 전통가옥 형태의 지붕을 현대적인 건물이 떠받치고 있는데, 제법 운치있습니다.
두번째 찾은 양곤역이다보니 헤매지 않고 플랫폼에 위치한 매표소를 찾아갔습니다. 양곤순환열차 1장이요. 창구 직원은 시계를 흘깃 보더니, 일곱시 사십오분 기차네요. 이따 다시오세요. 담담하게 얘기했습니다. 헐? 구글이 틀린 거였습니다. 시계를 보니 두시간이나 남아있었습니다. 허허허. 어찌 이런 일이. 내가 허허허, 웃자 창구 직원도 허허허, 웃으며 뒤를 가리켰습니다. 저 뒤에 의자가 있군요.
단 하루도 평온할 날이 없구나, 허탈해서 의자에 앉아있다가, 그래 역 구경이나 좀 하자, 언제 또 보겠나 싶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열차에서 뛰어내려 철로를 점령하는 사람, 배웅하는 사람, 돌아온 사람을 구경하고 플랫폼 제일 끝에 자리한 화장실도 구경했습니다. 플랫폼에서 양치하는 사람을 멍하니 보고 있으니 씨익. 웃음이 돌아왔습니다.
기차의 종류가 정말 다양했는데, 일본에서 온 기차가 많은 것 같았고, 우리 기차도 보였습니다. 저건 통일호네.
정신 없이 구경하다보니 열차시간이 됐습니다. 다시 창구로 찾아가니 아까 그 직원이 싱긋 웃으며 표를 내줬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뒤를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저 뒤에 와있죠? 저겁니다. 손가락을 따라가보니 JR(일본철도의 지하철)이었습니다. 와, 이게 양곤순환열차였구나, 지난번에 왔을때 플랫폼을 떠나던 그 열차였습니다. 난 대체 왜 JR과 기차를 헷갈린거지? 닭대가리인가? 딱 봐도 이건 전철이고 교외선은 기차였잖아. 한숨을 쉬고 열차에 오르려고 보니 제법 높았습니다. 플랫폼과 바닥의 높이를 맞추지 않다보니 상당한 높이의 전철에 사람들이 (말 그대로) 기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신기한 장면이었습니다.
열차 안은 낯설면서도 익숙한 풍경으로 가득했습니다. 우리의 시골 기차를 탄 것 같기도 하고, 어릴적 기차를 타고 놀러가던 때도 생각이 났습니다. 저마다 어디론가 향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이러저러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새벽부터 또 한바탕 삽질을 한 탓인지 슬금슬금 졸리기 시작했습니다. 잠깐 존 것 같은데, 눈을 뜨니 열차는 시장으로 변해있었습니다. 수많은 상인들이 역마다 기차를 오르내리며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침을 먹어볼까, 세번째 역에서 탄 빵장수 아주머니께 크림빵을 샀습니다. 달콤한 크림에 소금이 들어간 신기한 맛이라, 고개를 갸웃거리며 먹고 있는데, 어디선가 강력한 포스를 풍기는 노란 옷의 여자분이 머리에는 쟁반, 손목에는 목욕탕의자를 끼고 나타났습니다.
뭐지, 쳐다보고 있으니 한쪽에 목욕탕의자를 내려놓고 아예 국수집을 차렸습니다. 헐. 내가 입을 못다물고 쳐다보니 옆자리의 아주머니가 씨익 웃었습니다. 저 국수는 먹어야 돼, 안먹으면 말이 안돼, 홀린듯 다가가 국수를 달라고 하는데 뭔가 고민하는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매뉴가 하나가 아닌가? 말이 안통해서 어버버하고 있으니 옆자리 아주머니가 다가와 미얀마어(!)로 통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까, 대충 이런겁니다. 여자분이 미얀마어로 얘기를 하면, 아주머니가 미얀마어로 나한테 얘기하고(대체 왜?), 그럼 난 영어로 아주머니한테 얘기하고, 아주머니는 다시 미얀마어로 여자분에게 얘기를 전해줬습니다. 문제는 아주머니가 영어를 전혀 못하는 것 같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쩐지 뜻이 통했습니다. 셋 다 만족하는 표정으로 무사히 국수 주문도 마치고 돈도 내고 국수를 받아 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며 씨익 웃었습니다. 국수가 무척 맛있어서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으니 사람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습니다. 같이 씨익 웃어줬습니다.
다음 역에서는 온갖 농산물을 짊어진 상인들이 잔뜩 올라탔습니다. 옥수수와 감자, 호박이 가득 든 푸대로 열차가 채워졌습니다. 한 아주머니는 아예 내 옆에 감자 푸대를 내려놓더니 나한테 붙잡고 있으라고 미션을 주셨습니다. 네, 그럼요, 제가 또 감자 푸대를 붙잡고 있는데 일가견이 있습니다. 감자 푸대를 껴안으니 사람들이 우하하 웃었습니다.
드디어 가치담배 상인이 열차에 올랐습니다. 객차에는 금연이라고 써있었지만, 그러던 말던 담배 상인은 사람들에게 불을 붙여줬습니다. 젊은이는 문앞에 앉아 담배를 피웠습니다. 열차 안으로 느릿느릿 담배 연기가 돌아다녔습니다. 담배 연기 사이로 노스님이 탁발을 했습니다.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이셔서 얼떨결에 합장을 했습니다. 담배 연기와 함께, 나른하고 향긋한 순간이었습니다.
세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열차는 양곤역으로 돌아왔습니다. 아, 내리지 말까, 그냥 이대로 두어바퀴 더 돌까, 잠깐 고민하는데 문앞에 앉은 모녀가 보였습니다. 짐이 제법 많아 보였습니다. 눈을 마주치고 짐을 나눠들었습니다. 아이 엄마가 활짝 웃었습니다. 아이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주고 플랫폼으로 내려섰습니다.
열차가 떠난 뒤에도 아쉬워 플랫폼을 서성였습니다. 언젠가 돌아올 수 있겠지, 그날은 하루 종일 타야겠다. 생각했습니다.
마지막 오후 일정을 위해 양곤중앙역을 떠났습니다.
아이들이 표사는거 도와주더니 저에게 물을 비싸게 강매했죠 ㅠㅠ
훌쩍 떠나고픈 마음 가득입니다
여행 못할때 보니까 더 가보고 싶어요 .......
사진 잘 봤습니다.
미얀마에서 얻은 것중 나쁜 추억이네요
또 가보고 싶은 곳~~^^
따로 후보정을 거친 건가요? 주로 어떻게 하시나요?
자유롭게 여행을 다닐 수 있었던 때가 사무치도록 그립네요.
미얀마는 아직 못 가봤는데 꼭 가보고 싶어졌어요 :)
근데.. 사람들 사진 찍을 때.. 그냥 찍으시나요? 자연스러운 표정들이 참 보기 좋네요..
하나하나 작품 같은 사진에 감탄과 함께 대리만족을 하고 갑니다~
사진 멋있네요 한번 가보고싶을정도요
인도 델리의 경우도 중고는 아니지만 지하철에 일본산 열차 쓰더군요. 대신 역사는 한국기업이 만들었습니다.
사람보는 재미는 있는데 한두시간 지나니 잠이 오기 시작.....
그나저나 사진 잘 찍으시네요.. 저는 저런 사진 정말 안나온던데... ㅜㅜ 부럽습니다 금손
밤에 찍어서 잘 나왔습니다.
지금은 코로나때문에 개장하지 않고 있어요
사진 하나 하나가 그 나라 일상을 평온하게 보는듯 싶어서 미소 짓게 만드네요
간접적으로 그 나라 일상을 보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동남아도 내가 알던 못 살던 동남아는 몇 곳 안남은것 같네요
미얀마는 아직 내각 알던 동남아네요
코로나가 끝나면 미얀마 함 돌아보고 싶네요
스틸이 주는 상상의 매력은 스냅사진만이 누리는 특권이 아닌가 싶습니다. 멋진 사진 잘 봤습니다.
사진속 풍경과 사람들도 좋고, 사진에 담긴 따뜻한 시선들, 재미있는 글도 좋아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정겨운 시골 풍경인 듯 해요...
구독해야겠어요.
감사드립니다.
저도 인도 갔을 때... 잔시 - 아그라 열차 탔던 기억이 떠오르네요...
잔시 역에서 만났던 아이들도 생각나고 ㅎㅎ
사진들을 계속 보고 있으면 뭔가 내가 해외여행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