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문을 열자 바람에 진눈깨비가 날리고 있었습니다. 툇마루에 앉아 물끄러미 마당을 바라보다 신발을 신었습니다. 외할아버지는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조금 전 대문을 두드린 이가 재당숙의 부음(訃音)을 전하며, 호상(好喪)인데도 찾는 이가 없어 상갓집이 휑하다고 했거든요.
한때 식구라 부를 정도로 가까웠으나, 왕래를 끊은 지 벌써 십 년이 넘었습니다. 만석꾼은 아니어도 천석꾼은 너끈했던 재당숙은 도무지 만족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무시로 남의 것을 탐하고 내 것은 악착같이 움켜 마을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었습니다. 고리로 저당잡은 외할아버지네 논을 꿀꺽하려고 뒤에서 야료를 부리다 들통이 나서 대판 싸운 뒤로 이제는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 터였습니다.
지게에 쌀 한 말을 지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새 질척해진 땅이 자꾸 신발에 들러붙었습니다. ‘가는 게 옳은지. 이제라도 걸음을 돌려 그냥 집으로 가야 하는 지.’ 마음이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합니다. 진창길이 걸음을 부여잡고 신발에 들러붙은 진흙은 쇳덩이처럼 무거워 자꾸 걸음이 느려졌습니다.
멀리 불이 켜진 조등(弔燈)이 보였습니다. 꽤 먼 길이었는데, 금세 도착한 것 같습니다.
“형님!”
고민의 시간과 흔들리는 마음이 무색하게 상주(喪主)가 달려와 외할아버지를 맞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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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문을 하고 마당으로 내려왔습니다. 넓게 친 포장 아래 듬성듬성 사람들이 앉아있습니다.
“식사하고 가셔유.”
대문을 나서는 외할아버지를 상주가 붙잡았습니다.
“여까지 오셨는데 그냥 가믄 워째유. 여봐유! 여기 밥 좀 채려유.”
상주가 안채로 소리를 질렀습니다. 곧 둥근 소반이 외할아버지 앞에 놓였습니다.
까끌한 수수밥에 멀건 된장국, 반찬이라곤 짠지 몇 쪽이 전부였습니다. 가세가 기울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장날, 장 한 바퀴만 돌아도 재당숙네 재산이 몇 배씩 불어난다는 이야기가 항간에 파다했지요. 재당숙이나 그 아들이나 인심이 박하네요. 이러니 사람이 없지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 밥상은 어떤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다 한쪽 구석의 덩치 큰 사내와 눈이 마주쳤습니다. ‘저 양반이 누구 였더라.’ 낯은 익은데 누군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사내가 벌떡 일어나 외할아버지에게 다가왔습니다. 스치는 바람에 손이 곱을 만큼 추운 날인데, 팔꿈치까지 접어 올린 적삼과 얇은 잠방이만 입은, 누가 봐도 한여름의 차림새였어요. 드러난 맨살에는 털이 수북했습니다.
“나 알쥬?”
“야?”
외할아버지는 당황스러웠습니다. 아직 그가 누군지 떠올리지 못했거든요.
“나 몰러유? 허~ 참. 접때 나랑 씨름했었잖어유. 내가 그짝 생각해서 질바닥(길바닥의 충청도 방언)도 닦어 주구 그랬는데, 기억 안 나유?”
맞다! 그때도 상가(喪家)에 다녀오는 길이었습니다. 온통 진창이던 비탈길을 잘 닦아놔서 편하게 올랐는데, 그 일을 했다던 사람이 바로 눈앞의 사내였어요.
“아이구, 내가 왜 모르겄슈. 거! 씨름두 못하는 양반이 또 하자구 뎀빌까 봐 모르는 칙 한 거지.”
“허! 뭐유? 함 해보자는 겨?”
“뭘 또 승질을 부리고 그런댜, 웃자고 한 소리에. 아! 앉어유! 목 부러지것슈.”
사내가 흘끔 외할아버지 앞에 놓은 상을 내려다보고 코웃음을 쳤습니다.
“흥! 이걸 먹으라고 준 겨? 쌀을 한 말이나 지고 온 사람한테 이게 뭐여. 아! 발딱 인나유! 뭐 빌어먹을 게 있다구 이러구 있슈.”
엉거주춤 외할아버지가 일어서자 사내가 저만치 구석에서 뒷모습만 보이며 앉아있는 일행을 불렀습니다.
“여봐유! 여기는 꼬라지가 글러 먹었슈. 밥 나오기 지달리다 배곯다 가겄네. 가유! 나랑 술이나 먹게.”
사내의 부름에 그의 일행이 벗어 놓았던 갓을 들어 꼼꼼히 살피며 모양을 잡고 머리에 썼습니다. 그가 일어서서 등을 돌리는 순간, 외할아버지는 머리끝이 쭈뼛 섰다고 합니다. 하얀 얼굴, 붉은 입술, 색을 알 수 없는 기괴한 눈동자…, 보는 것만으로 소름 돋게 하는 사람이었대요. 스윽. 그가 나는 듯 걸어왔습니다. 물 비린내가 났습니다.
상주에게 간다는 인사를 하려는데, 덩치 큰 사내가 말렸습니다.
“그냥 조용히 주는 거나 처먹고 꺼지라는 소리유. 그 나이 먹도록 그것두 몰라유?”
대청에 있던 상주가 외할아버지를 힐끗 보고 못 본 척 고개를 돌렸습니다.
“거봐유!”
사내가 “쯧쯧” 혀를 찼습니다.
대문 문턱을 건너자 한켠에 사자밥이 놓인 작은 소반과 신발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갓을 쓴 얼굴이 하얀 사내가 걸음을 멈추고 밥상을 한참 바라봤습니다. 소반 위에 놓인 건 얼기설기 제멋대로 얽힌 돌멩이뿐이었지요. “왜? 왜?” 뒤가 허전하자 앞서갔던 덩치 큰 털복숭이 사내가 되돌아왔습니다. 세 사람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였습니다.
“씨부랄! 이게 뭐여!”
털복숭이 사내가 사자밥으로 차려놓은 소반을 걷어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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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림길입니다. 이쯤에서 헤어지기로 했습니다. 털복숭이 사내와 갓을 쓴 사내는 송오리로 넘어가서 술을 마시겠다고 합니다.
“그류? 그짝 동네에 말술 하는 양반이 하나 있어서…, 왔다 갔다…, 그 동네, 우리 동네 술은 싸그리 비웠는데…….”
“그 양반이 누구유? 말술 하는 양반이믄 말두 잘 통하겄네.”
“우리 처오삼춘(처외삼촌의 충청도 사투리)인데 몸이 안 좋아서 둔 눠 있은 지 오래유. 말 나온 김에 내일 가봐야 것네유.”
털복숭이 사내가 뭔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뜬금없이 돈을 빌려 달라고 했습니다.
“사람 하나 더 불를라니께 돈이 모질라서 그래유.”
외할아버지는 혹 조의금으로 쌀은 안 받는다고 하지 않을까 하여 따로 챙겨왔던 돈을 털복숭이 사내에게 건넸습니다. 복잡하고 다단한 감정의 실타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자신을 건져준 사내가 고마웠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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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쾅! 쾅! 쾅쾅쾅!
누군가 시끄럽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습니다. “누구유!” 외할아버지는 사랑방 문을 열고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여! 문 좀 열어봐!”
자리에 누워 오늘내일 죽을 날만 기다린다던 처외삼촌이었습니다.
“아니, 삼춘! 이게 어뜨케 된 겨. 괜찮어유?”
“너야 말로 뭘 어뜨케 한 겨. 왜 도깨비허구 저승사자가 날 데리다 술을 멕이냐.”
“야?”
“아니 그게 말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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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 이생!”
저녁 내내 미열에 시달리다 이제 잠이 막 들었는데, 누가 담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름의 주인은 대답이 없고 계속 부르는 소리만 허공을 맴돌았지요.
“허이구. 이생이 누구여. 왜 대답을 안 혀서 남 잠도 못 자게 지랄이여.”
“이생! 이생! 자네여! 자네!”
“나? 나라고?”
“그려. ○○이가 돈 줬어! 술 마시러 가자!”
개 비린내가 훅 풍기더니 누군가 팔을 잡아 끌었습니다. 휙! 어딘가 빨려가는 느낌이 나는가 싶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술집 앞이었대요.
‘그려! 까짓것, 술 안 마시고 내일 뒈지나 술 마시고 오늘 뒈지나 그게 그거 아녀?’
그렇게 처음 보는 사람들과 술을 마시다 보니 날이 밝아왔습니다. 술에 취해 잠이 쏟아지는데, 누군가 “흐흐흐” 웃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래서 너희 도깨비 족속들 하고는 상종을 하면 안 디야…,”
“흐흐흐. 술 잘 읃어 자시구서는 왜 그런댜. 사자님, 워쩔 겨.”
쿵! 쓰윽, 쓰윽.
“됐지?”
“야.”
까무룩 잠이 덮쳤습니다.
외할아버지의 처외삼촌은 눈을 뜨자 몸이 개운했대요. 근래 느껴보지 못했던 활력이 몸 안에 가득했다네요. 이상한 일입니다. 혼자 힘으로 쉽게 몸을 일으킬 수 있었거든요. 꿈 같은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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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이걱. 대문을 열자 대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사내가 벌떡 일어섰습니다.
“왜 이제 나와유!”
이 양반이 누구더라….
“받어유!”
작은 봇짐을 넘기고 휙 뒤돌아선 덩치 큰 털복숭이. 도깨비였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시리즈는 계속 되어야 합니다~!!!
무슨 말씀을요.
비밀 한가지 알려드리면, 이 분은 작가님이십니다.
제가 유료구독자거든요.^^
오니와 도깨비를 섞어서 알고 계시네요.
도깨비는 위 글의 묘사가 정확하고 일종의 터주신같이 착한 이에게 복을 주고, 씨름과 술 좋아하고, 생 돼지고기를 좋아하는 존재입니다. 드라마 도깨비가 비슷한 역할을 하죠. 보통 사람 손때가 묻은 물건이 오래되면 도깨비가 된다고 합니다.
오니는 악귀입니다.
전공이 그쪽 관련이다보니 대학에서 정확히 알게되었답니다. 일제강점기때 내선일체를 위해 우리 문화를 일본학자들과 친일학자들이 많이 왜곡시켰다네요. (고려장이 대표적)조금 알고있던 제 작은 지식을 기분 좋게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한의 정서도 근현대사에서 너무 힘든 일을 많이 겪다보니 생긴건데 그걸 유독 우리 민족의 정서라고 강조하는 것도 일본인+친일학자의 영향이랍니다.
우리네 고전 소설이나 조선의 판소리, 설화만 봐도 해학, 풍자, 골계미의 정서가 주된 정서입니다. 귀신들도 나라법은 철저히 지켜서 장화홍련전만 해도 자신들의 억울함을 사또를 통해 법적으로 풀고 승천하지요. 자신의 억울함을 풀고나면 마음의 응어리를 모두 풀고 자유로워지는 결말입니다.
이와 달리 일본의 설화는 남편에게 버려진 아내가 원망을 안고 죽어서 뱀으로 환생한 후, 바다를 건너가 남편을 직접 물어 죽이는 복수로 끝을 맺는 식이라 우리 정서와는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넘 재미나게 잘 읽었습니다 오늘 같은 추운 날씨에 딱! 어울리네요 ㅎㅎ
(내도 한 술 허는디 도깨비양반 좀 도와주소 ㅎㅎ)
진짜 문학적 도깨비였군요.
너무 재밌어요.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저 나름대로의 재미라 공감하실 지는 모르겠습니다.^^
얼른 다음 편 보고 싶어요~
다만, 요즘 글을 잘 안 읽어서인지 마지막 문단 파악이 힘드네요
어디의 대문을 열었고 누가 나왔다는건지...
술술 재밌게 읽었습니다.
흡입력도 있고 재미도 있어요
잘 읽고 갑니다
특히 우리 고유의 도깨비 이미지를 잘 살리셨네요
👍👍👍
스토리와 분위기 기억 속의 이야기 까지 모여서 한방에 타지는 느낌이예요 .
나중에 책으로 나오면 사고 싶네요.
가끔 이렇게 아는 옛것이 나오면 저걸 알 정도로 나이를 먹었다는 것이 좋을 때가 있습니다.
전북 곡성에 가면 도깨비마을 있는 거 아세요? 어떤 분이 도깨비를 좋아하셔서 도깨비마을 만드셨대요~ 그 안에 있는 서점에서는 도깨비 관련된 책들 팔고요! 웬 도깨비마을?이라고 생각했는데 찬우물님 글 읽다보니, 요런 매력에 빠지신거구나 싶어요ㅎㅎ
재밌는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