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주말이면 어머니를 따라 종종 외가에 갔습니다. 그곳은 가을이면 바알간 감이 마을 곳곳을 수놓는 감나무골이며, 자식들이 모두 분가하여 객지로 떠난 후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두 분이 큰 집을 지키며 농사를 짓던 한적한 시골이었습니다.
어느 겨울이었습니다. 저녁을 먹으면 방으로 불씨를 담은 화로를 들였습니다. 화로 곁에 옹기종기 앉아 고구마를 구워 먹기도 하고 광에서 꺼내 온 살짝 언 홍시를 먹기도 했지요. 외할아버지는 식사가 끝나면 부리나케 일어나 사랑방으로 자리를 옮기셨는데, 거기서 밤늦게까지 새끼를 꼬아 맷방석, 삼태기 등을 만드셨습니다.
“아부지.”
오늘도 어김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외할아버지를 어머니가 붙잡았습니다.
“애들한테 그 얘기 좀 해줘유. 아부지 젊었을 적에 도깨비 만났던 얘기유.”
“도깨비?”
동생과 저의 숟가락이 동시에 멈췄습니다.
“할아버지이~ 도깨비 얘기해주세요~”
숟가락을 흔들며 조르는 저와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외할아버지가 “그랴.”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 ** --- ** ---
광복 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이었으니 외할아버지가 한참 젊었던 시절의 일입니다. 큰말에 사는 고모(어머니의 대고모)가 돌아가셨다고 해서 지게에 쌀을 지고 조문을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고 합니다. 보름달이 환하게 길을 비추는 밤이었대요.
가파른 언덕 끝에 웬 사내가 앉아 있었습니다. 초여름이긴 했지만,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동네라 아직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했는데, 사내는 저고리 옷고름을 풀어 헤치고 잠방이만 입고 있었다는군요. 소맷자락도 팔뚝까지 걷어붙였대요. 드러난 맨살에는 털이 수북했다지요. ‘희한한 양반일세.’ 낯선 사내가 말을 붙여왔습니다.
“여봐유.”
“야?”
“아니, 사람이 양심이 있으야지. 내가 질바닥(길바닥의 충청도 방언)을 닦아놔서 편하게 올라왔으믄 고맙다는 말 한마디라도 혀야지 그냥 가믄 돼유?”
외할아버지는 주위를 휘휘 둘러봤습니다. 그제야 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녁나절 여길 지나갔을 때는 그제 내린 비로 길이 엉망이었지요. 그런데 지금은 그 진창길이 말끔해져 있네요? 발끝에 숱하게 채던 돌부리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까 여기 지나면서 뭐랬슈. 질바닥이 이래서 댕기기 힘들다고 했슈, 안 했슈.”
“그짝이 여기 이르케 한 거유?”
외할아버지가 ‘대근했겠다.’고, ‘고맙다.’고 말을 건넸지만 사내는 시큰둥했다는군요.
“엎드려 절받기 지.”
“그럼 워뜨케 하라는 겨. 통행세라도 내라는 거유?”
“통행세는 됐고, 나랑 씨름 한 판만 해유.”
외할아버지는 동네서 소문난 씨름꾼이었습니다. 징용에 끌려갔다가 허리를 다쳐 힘을 잘 못 쓰는 와중에도 어지간한 장정은 발기술, 손기술로 단숨에 넘겼대요.
열 판이 넘는 동안 사내는 한 판도 이기지 못했습니다. 자기보다 체구도 작고 비리비리해 보이는 사람에게 자꾸 지면 분할만도 한데, 사내는 판이 거듭될수록 신이 나는지 밝은 얼굴로 “딱 한 판만 더해유.” 자꾸자꾸 졸랐습니다.
“이제 됐슈. 인자 허리 아퍼서 더는 못해유.”
“왜유? 딱 한 판만 더해유? 야?”
“징용 갔다가 다친 데가 아퍼서 못헌다니께.”
“워디? 여기유?”
사내가 외할아버지의 허리를 여기저기 짚었습니다. 그의 손이 닿을 때마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서늘하면서 따뜻한 기운이 흘러들었고 허리가 시원해졌습니다.
--- ** --- ** ---
“그렇게 한…, 백 판도 더 했을 겨. 아퍼서 못 하겄다고 할 때마다 ‘여기유?’, ‘여기유?’ 하믄서 손을 막 갖다 대는데,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드라고.”
다음 날 아침, 외할아버지는 몸이 이상했습니다. 눈을 뜨고 일어나기까지 허리가 아파서 한참을 꿈지럭대야 하는데, 아픈 곳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대요.
“그래 내가 간밤에 씨름한 데까지 단숨에 달려갔지 뭐여.”
비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던, 달빛이 창문을 환하게 비추는 맑은 밤이 지나간 그곳은 여전히 진창길, 어제저녁 처음 지나갔던 그대로였습니다. 그제야 외할아버지는 자기가 밤에 만났던 사내가 도깨비였음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허리 아픈 게 그 질루 나은 겨.”
“아부지. 그거 말고 다른 거 있잖어요. 도깨비가 귀신 쫓아준 얘기요.”
“또! 또! 또 해주세요!”
외할머니가 화로에 고구마를 올렸습니다. 덜컹! 덜컹! 겨울바람이 자기도 듣고 싶다고 문을 흔들었습니다.
어? 사실 아니었어요?
넵! 그럼 내일은 '귀신을 쫓은 도깨비'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아이들이 도란도란 앉아들으면 좋겠어요~~@쎄미님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드
재미있게 읽어 주셔서 오히려 제가 더 감사합니다. _(__)_
아이공. 미천한 제 글을 기억해 주시는 군요. 감사합니다. _(__)_
'외할아버지가 도깨비와 씨름한 썰', 이런 간단한 이야기인데 재있게 읽어 주셔서 다행입니다. 그런데 닉네임이 어마무시하시네요. ^^;;;;;;;;;;;;
근데 도깨비들은 씨름을 좋아하나봐요.
어렸을 적에 어렴풋이 아버지가 들려준 시골길 도깨비 이야기에서도 밤새 씨름하고 났는데 싸리빗자루다고 하신거 같은데요
그러게나 말이에요. 싸리비 이야기는 '맹꽁이 서당'에서 저도 본 기억이 나요.
다음편은..., 어, 음..., 내일 밤에 하나 더 올리겠습니다.
넵! 내일은 '귀신을 쫓은 도깨비'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아이고. 근데 이렇게 호언장담 해놓고 내일 못 올리면 어쩌나 걱정부터 드는군요.
우리 고모 이야기가 생각나 몇 자 적어봅니다.
디스크가 심해 수술을 해야 하는데 수술은 안 하겠다 고집을 부리면서 몇달을 기어다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디스크가 터져 주저 앉아 하반신 마비 증상까지 약하게 나타날 무렵, 약에 취해 낮잠에 들었는데 돌아가신지 몇년 된 할미가 꿈에서 엄마 손이 약손이다 엄마 손이 약손이다 등을 어루만져주셨답니다. 설움이 복받쳐 엉엉 울다가 깨었는데 다리에 느껴지던 타오르는 것 같은 신경통이 안 느껴지고 몸이 가볍더랩니다.
며칠 후 병원에서 MRI를 찍었는데 터져버린 디스크가 왠일인지 쪼그라 들어 더 이상 신경을 건드리지 않았다고..
그 이후로 허리 블편함 없이 잘 지내고 계십니다.
그런 게 기적인가봐요. 포기하지 않고 참고 버티고 견디고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 고모님처럼 기적이 찾아오나 봅니다. 고모님과 멍청이탐지견님께 제 로또 확률을 나눠 드리겠습니다. 늘 건강하세요.
잠 온다고요? 노래 한 곡 하겠습니다.
"옛날하고~ 아주 머언 옛날~ 호랑이 담배피고 놀던 시절에~"
^^;;;;;;
내일 밤에 올리겠습니다. 아이공..., 이렇게 호언장담을 해놓고 약속을 어기면 안 되니 저는 얼른 자판을 두드리러 가야겠어요. ㅠㅠ
감사합니다. 곰국논문 님이 이렇게 기억해주시고 댓글 달아주셔서 부쩍 힘내고 있습니다.
아마도 내일밤이지 싶어요. 지금 최종 베타를 돌리고 있거든요.
아이공... '또'가 너무 많아요. ㅠㅠ
'또! 또!'까지만 하면 안 될까요?
저희 이야기 식당을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_(__)_
게으른 주방장을 닦달하여 맛있는 이야기를 최대한 이른 시간에 배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여니님 아이콘이 사탕 같아서 그런지 댓글도 달달하네요. 감사합니다. _(__)_
구독합니다~^^
자! 이 이야기는 어디에 가까울까요, 1번! 배추도사 무도사, 2번! 은비까비! 정답을 아시면... ^^;;;
댓글 감사합니다. 오늘은 행복한 꿈을 꿀 것 같아요.
다음 글 올라올때 알림 뜨게 하는거 있나욤
너~무 재밌어요!!!
앗 혹시 '주시하기' 저건가요
저는 구독하는 법을 몰라서 작성자님 아이디로 "작성글 검색"해서 북마크 해놓고 가끔 눌러봅니다.
https://www.clien.net/service/search/board/park?sk=id&sv=heimatCLIEN
내일 밤에 안 올려주시면 씨름하러 갑니다!!
넘나 잼나요!!
시적 표현이 멋집니다. 도깨비 이야기 넘 재밌고요^^
도깨비가 실존했던게 아닐까 상상해봅니다
옛날 kbs는 티비 문학관
글구 mbc는 베스트 극장 같네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