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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공원

내가 겪은 정신질환, 그리고 의미찾기 9

19
2021-01-07 15:33:06 수정일 : 2021-01-07 16:01:39 99.♡.162.38
Poetic_Announcement

과거 약 10-15년간 각종 정신질환 진단을 거쳤으며 완쾌 후

정신과 의사가 되기 위해 의과대학원 준비중인 만학도임을 미리 밝힙니다.

"지금 내가 뭐라고 이렇게 (주제 넘는)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보다

지식의 권위를 빌리지 않는 수평적인 소통과 공감에 의의를 두겠습니다.


*쓰여진 내용의 순서

- 내 사고를 신뢰하기의 어려움

- 자책감

- 한발짝 물러나며 극복하기, 그리고 스스로 모은 데이터의 중요성

- 약과 구명조끼, 그리고 수영하기

- 제 개인적으로 어려웠던 시기

- 자주성 및 삶의 의미(?)

----------------------------------------------------------------------------------------------------------------------------------------------------


종종 정신질환과 분투하시는 분들의 글이 올라옵니다.

저도 이 글을 쓰다보니 그 분들의 용기를 새삼 다시한번 느끼고 있습니다.

저도 정신질환에 대한 말을 꺼내기 전까지 여러번의 머뭇거림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글을 쓰는 이유는 병에 대한 경험기를 공유하는 것에 그만큼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말을 꺼내는 순간 과거에 있었던, 혹은 미래의 견해나 생각들이 병리적인 맥락 상에서 해석될 리스크를 갖게되고, 발언의 신뢰성에 치명상을 입기 때문이죠.  


병리적인 맥락 상에서,

역동적이고 진취적인 발상은 한편으로 조울증이나 연관지어지는 순간 병리적 현상으로 해석될 수 있고, 

마찬가지로 보수적인 견해 또한 한편으로 불안과 연관지어지는 순간 병리적 현상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외부로부터 내 사고의 신뢰성을 잃는 것. 

이는 "진단 보유자"의 내부에서도 반복되는 루프죠.

Maxlen이라는 분이 올린 포스트에 있는 이미지에 잘 표현되어있습니다.

https://www.clien.net/service/board/park/15743277CLIEN

실제로 사고 신뢰성을 회복하는 것은 제 여행기에서 매우 결정적인 변곡점이었습니다.

잘못된 형식의 이미지 링크입니다.


다른 분들이 쓴 많은 글에 담긴 "자책감"에 공감하고 싶습니다.

저도 사람들과의 만남에 대부분 늦었고,

약속을 앞두고 캔슬하기 일쑤였으며

동료와의 공동과제 중 중간에 사라지기도 하고

가족들의 안위를 살피거나 보탬이 되어주지 못했으며

무엇보다 "최선"(결정적인 순간에 최대한 업무량을 쏟아붓지)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도움되는 말들"

하루에 한번씩 근력운동을 하는 게 우울감을 줄여준다,

수면시간을 규칙적으로 유지하면 기분의 파고가 얕아진다, 

업무량을 최소화해라,

등 조언의 형태를 띤 여러가지 "의무"들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스스로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도움이 되더군요. (정말 늦게 깨달았습니다)

기준치들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내 자신, 그 "미달함"이 너무나 "인간적"이고 당연한 겁니다.

저는 지금도 저러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해결하지 못할겁니다. 

완치(보다는 회복?)되고나서 주위를 둘러보니 저런거 다 지키는 사람 아무도 없더군요.


다만 저는 한발짝 물러나는법을 택했습니다.

만남을 최소화해서 중요한 만남에 집중했고

공동과제의 숫자를 최소화하거나 공동인원수를 최소화했고,

공동체보다는 제 자신의 생존에 이기적이었으며

최선을 다하려는 강박에서 벗어나려(아직 못벗어났습니다) 노력했습니다.


몇몇 일반인분들은 이걸 이해 못하실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회피지, 극복이냐.

회피라기보단, "한발짝 물러섬"도 극복의 방법이라고 말하고싶습니다. 

"한발짝 물러서기"로 판단하는 것, 그리고 물러서는 방법을 연구하는데 집중하는 것에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 용기가 없다면,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자동차를 빤히 바라보는 고라니처럼, 

심리적인 긴장감만 받다가 즈려밟히게 됩니다.  

자동차와 부딛혀 이겨낼걸 생각하는게 아니라 날 향해 달려드는 자동차의 크기와 속도를 관찰하고 

!!충분히 이른 시간에!! 피할 수 있는 "결정"을 내려야합니다.

앞으로 나가는 결정은 "용기"만으로도 가능하지만 뒤로 물러서는 결정은 "복잡한 계산"과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잘못된 형식의 이미지 링크입니다.


*해야한다-하다- 등의 단언적인 어투를 써서 죄송합니다. 

최대한 피하려 해도 제 개인적인 경험이라 여지를 남기는 어투를 사용하기 쉽지 않네요.

덮치는 자동차를 빤히 고라니가 바로 저였거든요.


자, 그러면 그렇게 피하고만 살것이냐?

네. 꽤 오랜 시간동안 피하는 방법을 익혔습니다. 충분히 피하는 방법을 충분히 익혀야 피하기 전에 여유부릴 시간이 늘어납니다.

여유를 부리는 동안 자동차의 질량과 속도를 계산해서, 내가 이길수 있는 것이냐 이길수 없는 것이냐를 판단하는

어려운 작업을 자연스럽게 익히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피할 것은 피하고, 싸울것은 싸워 이겨내게 되더군요.


이렇게 위기를 선별하는 방법을 익히고 대처하며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는 동안,

이렇게 몇년단위로 누적된 "통계치"는 

이후 의사로부터 독립할 수 있을만큼의 판단력을 갖게되는 밑거름이 됩니다.

(회복 후 의사로부터의 독립이 저는 가장 힘겨운 과정이었습니다)


잘못된 형식의 이미지 링크입니다.



위와 같은 맥락에서 약은 저에게 매우 중요했습니다.

의사와 약은 저에게 구명조끼와 같았고, 판단력을 기르는 것은 수영을 배우는 것이었죠.

마지막에 의사는 저와 토론틀 통해 약의 용량과 사용을 결정했고 사용량/법에 대한 재량권을 일정부분 저에게 주었습니다. 

저는 회복의 과정에서 이 토론의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의사는 아주 한정된 시간(일주일에 한두번)만을 볼 뿐이지만 환자는 매순간 자신을 느끼고, 관찰할수 있으니까요.


약에 대한 환자의 "자주성"이 확보되지 않으면 영원히 의료체계에 귀속되게 되고, 

저는 이부분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재활분야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다만, "약물을 의사의 말을 듣지 않고 스스로 조절하는 것은 무조건적으로 피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주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약물의 지속적인 복용이 제 판단이나 선택을 신뢰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긍정적/부정적 생각들이 왔다갔다 어지럽히고 기분이 오락가락 할 때, 

약물은 최소한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그리고 내일의 나를 일관적이게 유지시켜주었고, 

그 최소한의 일관성이 내 어제 판단의 근거를 오늘까지 유지시켜주었습니다.

만약 그 일관성이 없다면 나는 누군가요?

일관성 없이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완전히 단절되어버린다면 나는 사고를 진전시킬 수 없습니다. 

데이터를 잴 수 있는 줄자의 눈금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셈입니다.

따라서 약물이 잘 듣지 않는것같아보여도, 최대한 보수적으로 약을 변경하고 용량을 조절하는 방향이 좋다고 봅니다.


약에 의존한 당장의 나는 진정한 내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일단은 통계적인 데이터를 쌓을 기준을 확보해야합니다.

이렇게보니 제 경우엔 <의사에게 판단주권 절대적 이양-회복기에 주권 되찾음>이라는 명확한 과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잘못된 형식의 이미지 링크입니다.


위에 대단한 무용담을 써놓은 것 같지만 그것은 마지막 몇년간에 불과하고, 그 이전 훨씬 더 긴 기간을 안정제에 취해 살았습니다.

깨있는 시간은 하루에 여덟시간 미만. 병원가고 밥 챙겨먹고나면 깨있는 대부분을 침대에 누워서 반쯤 잠애든채 영화를 봤습니다. 

거의 1000편쯤 다운받아놓고 본 것 같은데, 나중에 기억하는 줄거리들은 온통 뒤죽박죽이더군요. 

움직이지 못하니 체중은 두배로 불고 씻는것도 게을러져서 귀에 염증도 나고...그 이외에 말할수 없는...아무튼 일반인들은 상상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간 지나간 진단명도 다이나믹합니다.

우울병/조울병/다수의 성격장애/ADHD/PTSD/강박불안 등 조현병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진단을 경험했습니다.

자신의 병명때문에 너무 좌절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위 사실을 밝혔구요,

생각보다 뇌는 탄력적입니다. 우울증 있을때의 제 IQ와 우울증 없을때의 IQ 측정치 차이가 거의 30점이 나온 적도 있고

(같은 검사자/같은 검사방식) 위에 언급한 다양한 진단들 중에서 마지막엔 단 하나로 추려지더라구요.



잘못된 형식의 이미지 링크입니다.


마지막으로, 글 제목에 쓴 "삶의 의미"에 대해 짧게 말하자면...

저는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사는 사람만이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판단을 신뢰하는 못하는 상황은...저의 의지 자체를 소멸시켰기 때문에,

위에 특별히 사고능력, 결정능력, 자주성을 기르는 것을 강조해봤구요.


다만 혹시 힘든 상황에 있으신 분이 이 글을 읽고 계신다면, 위에 강조한 점(사고능력/결정능력/자주성) 조차도, 그냥 이런 사람도 있었다, 라는 정도로 받아들여주시는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것들도 누가 가르쳐주거나 의식적으로 한게 아니라 제 생존본능이 저렇게 자연스럽게 이끌었던 거고, 5년-10년단위의 시간동안 진행되었던 작업들이기 때문입니다. 

막연하고 지리멸렬하게 길-게 버티는동안 저도 모르게 뇌는 다양한 회복작업들을 하고 있더라구요. 


저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었지만 이보다 훨씬 더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많을거라 생각합니다.

다만 어떠한 진단을 받았다고해서 삶의 희망을 잃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진단은 바뀔수도 있으니까요.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oetic_Announcement 님의 게시글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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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리고 영상을 찍고 글을 씁니다.
일상이 일희일비인, 흠결투성이 인간입니다. 
마음의 역동성에 관심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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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9]
삭제 되었습니다.
Poetic_Announcement
IP 99.♡.162.38
01-07 2021-01-07 15:39:09
·
@누님 동감합니다
심장과커피
IP 122.♡.59.131
01-07 2021-01-07 15:46:19
·
훌륭한 의사가 되실것 같네요. 제가 만나본 의사들은 최악이었습니다.
Poetic_Announcement
IP 99.♡.162.38
01-07 2021-01-07 15:48:15 / 수정일: 2021-01-07 15:49:38
·
@심장과커피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리고 뒷부분도 상당부분 공감합니다
강한리
IP 118.♡.41.242
01-07 2021-01-07 15:48:17
·
좋은 글 감사합니다
Poetic_Announcement
IP 99.♡.162.38
01-07 2021-01-07 15:56:11
·
@강한리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귀차나차나
IP 222.♡.14.102
01-07 2021-01-07 15:50:42
·
눈에는 보이지 않으니 별 것 아니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충분히 지난하고 고통스러웠을 과정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사히 넘기셔서 다행입니다.
Poetic_Announcement
IP 99.♡.162.38
01-07 2021-01-07 15:52:32
·
@귀차나차나님 새생명 얻었다고 생각하고 사는 중입니다. 감사합니다
삭제 되었습니다.
축지법연구가
IP 116.♡.73.239
01-07 2021-01-07 17:06:18 / 수정일: 2021-01-07 17:07:04
·
글과 사고를 간결하게 하시는 것이 앞으로의 공부에도 도움이 되실 듯 합니다. '외부로부터 나의 사고의 신뢰성을 잃는것' 이라고 어렵게 관념을 떠올리려고 하지 마시고 그냥 '내 생각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식으로 간명하게 생각하세요. 그런 몽롱한 사유가 습관이 되면 자기 자신을 객관화하기 어렵고 내적 커뮤니케이션이 힘들어집니다. 명쾌하지 못한 생각은 명쾌하지 못한 발화가 될 수 밖에 없고 이것은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악영향을 끼치고 그 악영향이 결국 자신에게로 되돌아옵니다.
아주 오래전 일이지만 저도 정신과 신세를 져본 적이 있었고 그때의 경험으로 한때 정신과의사를 꿈꿨던 적이 있어서 글쓰신분이 남같이 느껴지지 않네요. 아무쪼록 건강한 정신과 몸을 유지하시고 훌륭한 의사선생님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Poetic_Announcement
IP 99.♡.162.38
01-08 2021-01-08 02:43:01 / 수정일: 2021-01-08 03:12:49
·
「@돈데크망*crosscut*
옳은 말씀 감사합니다.
특히 앞부분이 간결하지 못하고 장황한 것 같습니다.
관념적인 것을 날것으로 전달하고 싶은 욕망이 앞서서 많은 사족이 붙은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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