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싯다르타의 사상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마음에 대한 실용적인 연구였음을 강조하는 책 두 권을 소개합니다.
불교는 왜 진실인가 - 진화심리학으로 보는 불교의 명상과 깨달음 (로버트 라이트)
저자는 진화심리학자로서 이 책에서 불교의 핵심 통찰을 현대 과학(특히 진화생물학과 뇌과학)으로 검증하며
싯다르타를 '인간 마음의 작동 원리를 직관적으로 꿰뚫은 초기 과학자'로 평가합니다.
그는 불교를 초자연적 신앙 없이 마음챙김 명상(mindfulness meditation)을 통해
실증 가능한 '인간 조건의 진단과 치료법'으로 제시합니다.
그는 불교의 세 가지 특징(무상, 고통, 무아)을 과학으로 뒷받침합니다.
- 고통과 갈애
삶은 본질적으로 불만족스럽습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곧 다시 배고파지는 것처럼
우리는 어떤 본능적인 욕구를 채워도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갈망에 빠지도록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건 진화가 우리를 '끊임없는 욕망'으로 설계해 생존과 번식을 촉진하도록 했기 때문이고
이는 만족을 영원히 미루는 함정입니다.
- 자아의 허구성(無我)
'고정된 자아'는 환상입니다.
뇌는 모듈화된 시스템(감정,인식,생각 등)으로 작동하는데
우리는 이 집합체를 '나'라는 자아로 인식합니다.
명상하며 관찰하면 자아가 순간순간 변하는 흐름임을 깨닫습니다.
- 무상, 공(空)
모든 현상은 상호의존적이며 고립된 '실체'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방대한 감각 정보를 처리할 때
생존에 유리한 정보만 선택적으로 강조하도록 진화해왔고
인간의 감각 시스템은 '현실 왜곡 필터'로 세계를 보며
마치 '실체'가 있는 것처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Buddhism without Beliefs: A Contemporary Guide to Awakening (스티브 배철러)
저자는 티베트, 한국, 인도에서 승려로 살아온 불교 실천자이자
'세속 불교(secular Buddhism)' 혹은 '무신론적 불교(agnostic/atheist Buddhism)'를 대표하는 사상가입니다.
그의 핵심 주장은
붓다의 원초적 가르침은 신앙이나 종교적 교리가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고통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라는 실존적이고 실천적인 탐구였다는 것입니다.
'신앙 없는 불교 : 깨달음을 위한 현대적인 지침' 정도로 번역할 수 있을 이 책에서 배철러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 붓다는 신비주의자가 아니라 치유자이다
붓다의 깨달음은 신이나 우주의 미스터리를 깨닫는 신비적 체험이 아니라
삶의 고통과 그것의 끝을 이해하는 실존적 돌파구였다고 봅니다.
붓다는 스스로를 '예언자'나 '구원자'로 보지도 않았고
의사처럼 진단(고통의 원인)과 치료(팔정도)를 제시한 것 뿐이었다고 해석합니다.
- 불교는 종교로 성립된 것이 아니라, 종교로 '변질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불교가 다양한 문화(티베트, 일본, 한국 등)에서
윤회, 업, 천신, 여래 등의 개념들을 흡수하면서
원래의 실천적 교훈이 신앙과 교리의 체계로 굳어졌다고 봅니다.
그는 이를 문화적 덧칠 혹은 역사적 우연으로 보며
종교적 형식은 (문화적 산물로서) 보존할 수 있지만
반드시 그대로 신앙해야 할 대상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아래와 같은 세속 불교(secular Buddhism)를 주장합니다.
- 무신론적/무지적(agnostic) 태도
윤회, 업, 천신, 여래 등의 전통적 교리를 반드시 믿어야 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대신, "이 가르침이 과연 내 삶에서 고통을 줄이고, 자유롭고 깨어있는 삶을 돕는가?"라는
실천적 질문을 우선시합니다.
- 과학과 충돌하지 않는 불교 해석
그는 현대 과학과 불교의 관점이 본질적으로 충돌하지 않으며,
오히려 불교의 무상, 무아, 연기와 같은 관점이
신경과학, 심리학과 잘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과학이 불교의 진리성을 입증했다"는 식의 과도한 주장도 경계하며,
불교의 실천 자체는 '믿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경험하고 시험하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 실존적이고 실천 중심의 수행
수행은 '나를 위한 평온'이나 '내세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대한 실존적 탐구입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마음을 돌아보고 고통의 구조를 보기 위한 명상과
윤리적 삶(정어, 정업, 정명 등)이 중심이 됩니다.
- 도덕은 '신의 명령'이 아니라 '공감과 책임'에 기반한 것
윤리(계;戒)는 '불경이 명령'한 것이 아니라,
고통의 원리를 이해했을 때 나와 타인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자연스럽게 선택'하는 행동이라고 봅니다.
그는 이것이 더 깊은 책임감과 공감에서 비롯된 윤리라고 설명합니다.

원래 '종교(宗敎;높은 가르침)'라는 한자어는 싯다르타의 사상을 가리키기 위해 중국에서 만든 용어이고,
이후에 일본의 개화기 시절 서양의 '신 숭배'를 뜻하는 religion을 이 종교라는 용어에 덮어서 번역을 한 겁니다.
(그러니 '불교는 신을 믿지 않으니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다'라는 말은 주객전도겠지요.)
싯다르타의 관점에서 본다면
자신의 사상이 기독교 힌두교 같은 신 숭배와 엮여서
같은 카테고리로 받아들여지는 걸 좋아할까 의문이 듭니다.
그가 말한 건 신을 숭배해서 복을 받자는 게 전혀 아니고
인간의 마음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관찰하고 훈련하는 것일텐데 말이죠.
제가 보기에는 이젠 본격적으로 '마음 혹은 뇌에 대한 과학을 바탕으로 한 훈련법' 같은 쪽으로
포지셔닝하는 게 어떨까 싶기도 합니다.
(명상이나 요가가 비슷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거겠지요)
싯다르타는 아직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기 이전 시절에
그걸 원시적인, 직관적인 방식으로 탐구했던 사람인 거겠지요.
기술적으로는 한계가 있었지만 지향한 바는 지금도 충분히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싯다르타의 탐구를 신앙체계로 둔갑시켜 유지해온
'불교계'라는 조직으로서는 그게 싫을 수도 있겠습니다.
신앙으로 유지하면 제사비나 시주를 받을 수도 있고
신도들에게 과도한 충성 혹은 존경을 받을 수도 있고
정신적인 지도자 행세도 할 수 있을 테니까요.
과학자들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말이죠.
어떻게 보자면 '신앙집단으로서의 불교계'라는 것의 의의는,
싯다르타의 사상을 후대에까지 보존하고 알렸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싯다르타는 브라만교의 폭력에서 벗어나
개인이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입니다.
굉장히 개인주의적인 사상이 될 수 있죠.
실제로 모든 것이 空하다며 자살을 하는 사람도 생겼고, 사회를 등지고 출가하는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러니 싯다르타의 사고방식을 좇기만 한다면
그의 사상은 뿔뿔이 흩어진 개인들끼리 전수되다가 소멸됐을 확률이 높았을 것 같습니다.
(아마 그런 식으로 도태된 사고체계가 인류 역사에 많이 있었겠죠)
일반적인 지배층으로서는 구성원들이 사회를 유지하려 힘쓰는 게 아니라
뿔뿔이 흩어져 자기 깨달음에 몰두하려는 걸 좋게 보기 힘듭니다.
사회친화적, 국가친화적이 되기 위해선
'대승' 불교 등의 변형을 통해 친사회적인 성격을 갖거나 하는 경우가 있었죠.
그렇게, 싯다르타의 지향과는 반대되는(?) 방식으로 환경에 적응하는 쪽으로 진화하며 생존하여
싯다르타의 사상을 보존해온 게 현재의 불교계라는 신앙집단이 아닐까 합니다.
그렇게, 싯다르타의 사상이 대중적으로 전해진다는 것에는 자체적인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괴로움을 해결하는 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전문 영역이고
직접 노동을 해서 내 것이 생기면 그것에도 집착이 생긴다... 라면서
속세를 떠나 수행에만 전념한다고 해도
결국은 타인의 노동과 집착이 있어야 하고 그것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거고,
그렇게라도 자기 마음을 어케어케 해킹해서 부처가 된다면
그는 이미 속세의 평판이나 조직 확장에 대한 집착이 없는 상태가 되었겠지요.
자신의 깨달음을 조직적으로 전파해야 할 '집착'조차 사라진 승리자들은
역설적으로 역사 속에서 조용히 사라졌을 확률이 높습니다.
결국 싯다르타의 사고방식을 실제로 실천하는 사람들은 조용히 사라져가고(사회적으로 도태되고)
그의 방식과 반대로 간 사람들은 대규모 부동산을 소유하고 비싼 제사비를 받는
'기업형 신앙집단'으로 진화하게 되는 셈입니다.
그들은 이런 모순을 합리화하기 위해 여러 방법들을 동원하게 됩니다.
- 방편(方便)
'거짓말로 진실에 이르게 한다'라는 논리입니다.
싯다르타의 수준높은 가르침은 대중이 바로 이해하기에 너무 어려우니
일단 기복, 신비주의, 제사 같은 '가짜 도구'를 써서라도 그들을 불교 근처로 오게 해야 한다는 마케팅 방법입니다.
- 이제설(二諦說)
일반인들에게는 기복, 윤회, 제사, 계율 등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종교적 차원의 진실(속제)가 있고
수행자들이 도달하는 공(空), 무아, 인과율 등의 진실(진제)은 별도로 존재한다는 설명입니다.
- 복전(福田)
시스템 보존을 위한 비즈니스 모델입니다.
수행자들이 싯다르타의 사상을 보존하고 연구하는 데에는 비용이 드니
재가자들이 이들에게 보시(시주)를 하면, 그 공덕으로 하늘의 복을 받는 거래 모델입니다.
하지만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싯다르타의 마음 탐구는 발전한 과학 기술이라는 도구와 만났고
그런 신앙 집단은 싯다르타의 탐구에는 쓸모를 다 한 게 아닐까,
그 집단은 아마 다른 용도(?)로서 생존을 도모하는 쪽으로 진화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합니다.
( 싯다르타는 브라만교 등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개인들의 깨달음을 이야기했는데
후대인들은 그 사상을 반대로 뒤집어 유사 힌두교, 유사 브라만교를 만들었습니다.
이건 예수가 유대교(야훼 신앙)의 폭력에 지배당하지 말고 서로 사랑하자고 말했는데
후대인들이 그 예수의 사상을 반대로 뒤집어
로마 제국주의 폭력의 첨병으로서 도로 야훼신앙이 되어버린 기독교의 경우와도 유사한 점이 있고,
시스템에 저항하던 RATM, 체게바라, 커트 코베인 등을 시스템이 인기상품으로 만들어버리는 경우와도
겹쳐지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선각자는 '기존 시스템의 파괴와 개인의 해방'을 선언한다.
-> 후대 조직은 그 사상을 보존, 전파한다는 명목으로 시스템 내부로 다시 포섭된다.
-> 그 과정에서 선각자가 거부했던 권위, 폭력, 기복, 신비주의 같은 것들이 다시 중시된다.
예수 신격화의 문제 : https://www.clien.net/service/board/lecture/19052800CLIEN )
영어 제목의 true를 출판사에서 진실이라고 번역한 거긴 할텐데...
종교인들에게 진리는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본질' 정도의 의미일 테고,
과학에서도 진실이나 진리라는 말을 쓰기는 하는데
보통은 '지금까지의 데이터로 설명할 수 있는 가장 확률 높은 모델'라는 정도의 의미로 사용하는 거겠지요.
신을 믿으라는 그 모든 종교는 사이비라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그신이 신이면 나도 신이고 땅에 있는 개미도 신입니다.
저 위에 어떤분은 진실이라는 말이 불교에서는 아예 없다라고 생각하시는지..
부처님의 침묵(십사무기, 十四無記)은 정말 최고의 대응이 맞았습니다.하하..
오... 그러고보니 말씀해하신 十四無記도 나름의 진보(?)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이런 깨달음을 주시다니...
소크라테스가 "나는 내가 모른다는 걸 안다"고 했던 것의 인도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여러 절대주의적 사고체계들이
"세상의 중요한 모든 것은 이미 경전에 적혀 있다, 성현이 이미 말씀하셨다"고 믿었던 반면,
과학적 방법론은 그와 반대로 "인간은 무지하다"는 것을 인정한 바탕 위에 전개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과학은 신이나 인생의 의미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그게 과학의 한계다"라는 식의 말들을 하기도 하는데,
저는 오히려 "과학은 모르는 것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게 과학의 강점이다"라는 말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거시기는 머시기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과학은 답할 수 없습니다.
'거시기'도 '머시기'도 정의되지 않은 무언가이기 때문이죠.
신이나 절대적인 진리, 인생의 의미 같은 개념들도 그렇습니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니 사람마다 다 다르게 정의하는,
보편적인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
(유발 하라리식으로 말하자면) '허구'죠.
"신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등의 질문은
"거시기는 머시기인가"라는 질문처럼 '잘못된 질문'이고,
그런 잘못된 질문들에 대해 답하지 않는 것,
인간이 무지하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것은
과학의 한계가 아니라 과학의 강점일 거라 생각합니다.
인류가 그렇게 '모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이후 역설적으로 지식의 양이 폭발적으로 증가해왔죠.
(한편 대승불교 같은 곳에서는 이 십사무기조차도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오묘하고 절대적인 진리가 저 너머에 있다"는 식의 신비주의로 포장하며
싯다르타의 사상을 '절대적 신비', '부처님만이 아는 비밀' 처럼 권위와 신앙의 대상으로 만들고...)
반갑습니다 :-)
혹시 어렸을 때부터 왜? 그건 또 왜? 라고 묻다가 혼나신 경험이 많은 분은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ㅠㅠ
요즘 세태에 맞게 불교의 무신론적 측면을 강조하는 것도 나름 새로운 버전의 격의불교라 할 수 있죠. 최소한, 대승불교의 한계에 대한 고민이 이뤄지고 있다는 건 의미가 있겠습니다.
아... 말씀대로 격의불교는
중국에서 불교가 나름대로 환경에 적응하며 진화한 한 형태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러고보면 본문의 학자들 관점에서 보자면 격의라는 과정은
싯다르타의 실용적이고 분석적인 사상을
도교, 즉 중국식 형이상학적 신비주의로 탈바꿈시킨 결정적인 계기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싯다르타의 空을 도교식으로 '우주의 텅 비어있는 신비로운 근원' 같은 걸로 번역하고
수행을 '오묘한 도(道)를 깨달아 초월적인 존재가 되는 신선놀음' 같은 걸로 번역하며
결국 선불교(Zen) 같은 것까지도 만든 셈인 거겠네요.
요즘 우리나라에서 원시불교에 관심이 높아지고, 무신론적 측면이 강조되는 흐름도 계속되다 보면 결국엔 우리 시대에 적응한 새로운 형태의 불교가 나올 수도 있다고 봅니다.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죠. 무신론을 가르치는 종교라고 하면 이상하죠.
그리고 불교에서도 절에서 굿즈파는 상술은 다 사라질거라 생각됩니다. 뭐하는짓인지
불공 시주, 기도 접수, 연등 접수, 제사비 같은 것들도 그렇고,
그런 게 바로 싯다르타의 사상이 아니라 종교집단을 위한 거겠죠...
감사합니다 :-)
스님은 하루의 대부분을 수행해야 하므로
남한테서 돈을 받아야 생계가 가능합니다.
그러다보니 종교화 해서 고정수입원을 만든것이 불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불자의 목표는 마음수행하여 부처가 되는 것인데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부처의 마음과 비슷하게 된 분은 있을지언정 진짜 부처가 된 사람이 한명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네... 본문에서도 얘기했듯이 싯다르타의 사상이 전해진다는 상황은 좀 모순적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괴로움을 해결하는 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한 전문 영역이고
직접 노동을 해서 내 것이 생기면 그것에도 집착이 생긴다... 라면서
속세를 떠나 수행에만 전념한다고 해도
결국은 타인의 노동과 집착이 있어야 하고 그것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거고,
그렇게라도 자기 마음을 잘 해킹해서 부처가 된다면
그냥 그 사람은 우리 속세와 별 상관없는 사람이 되는 거고
자기 깨달음을 전해야 할 집착(?)도 없는 걸텐데 말이죠.
결국 싯다르타의 사고방식을 실제로 실천하는 사람들은 조용히 사라져가고(사회적으로 도태되고)
그의 방식과 반대로 간 사람들은
대규모 부동산을 소유하고 비싼 제사비를 받는 '기업형 신앙집단'으로 진화하게 되는 거고...
다른 댓글들도 그렇고,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다'라는 말은 주객전도"라는 제 의견에 동의하시는 분들은 없는 것 같군요 ㅠㅠ
참고로 뇌의 모듈화 패러다임은 이미 뇌과학자들 사이에서 폐기되다시피 했습니다. 지금은 네트워크로 이해하는 패러다임이 주류입니다(엘코논 골드버그 2018).
가끔 올리시는 글보면 종교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가지고 계시던데 저는 종교를 인간이란 비이성적 동물이 가진 일종의 디폴트값으로 보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작용이 아니라 특성이지요.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접착제라고나 할까요. 마치 국가나 화폐처럼요. (우스갯소리를 더하자면 애플, 테슬라도 포함될 수 있겠네요.) 이에 대한 훌륭한 근간은 로빈 던바의 '신을 찾는 뇌' 라는 책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양한 과학 이론만큼이나 다양한 사람들과 의견이 있으니 저는 그 다양성을 존중합니다.
종종 올리시는 글 항상 응원하며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반갑고 감사합니다 :-)
말씀하신대로 종교 같은 건 뇌의 기본적인 작동방식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라 생각합니다.
뇌는 생성형 AI와 유사한 알고리즘을 갖고 있어서
자기가 모르는 게 있다는 걸 모르고, 모르는 부분을 환각(hallucination)으로 채워넣습니다.
번개가 치는 이유를 모르던 시절에도, 신이 노하셨다는 식으로
'원인'을 자동적으로, 자연스럽게 환각으로 생성해 채워넣는 거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기 아이가 예쁘다고 인식하는 것도
짝짓기할 상대를 매력적으로 인식하는 것도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여긴 것도
여자는 남자에 비해 열등하다고 여긴 것도
신이 자연을 움직인다고 여긴 것도
신분에는 차이가 있다고 여긴 것도
(그것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인식하는 사람들 쪽이
생존하고 번식하기에 유리했기 때문일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자연선택된 meme이지요.
그들이 부도덕하거나 미쳤거나 뇌가 고장났거나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뇌가 정상적으로 작동한 결과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많은 현대인들이 다르게 생각하게 된 것은
현대인들이 더 똑똑하거나 윤리적이어서라기보다는
현대문명이라는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것이라 볼 수도 있겠습니다.
과학적인 탐구를 하는 등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게 된 건 비교적 최근에 나타난 흐름입니다.
인류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역사와 신화를 구분하지 않았고,
증거나 진상 같은 것보다는 권위나 신념을 중시해왔습니다.
인류가 '사실'을 중시하게 된 건
진화의 한 특이점인 것 같습니다 아마.
저는 강기진 저자의 '원효의 마음공부'을 권해봅니다.
불교가 자연선택에 의해 진화하여 생존하였다면 지금의 불교는 주변 상황에 잘 적응한 형태일 겁니다. 마치 초기의 석가의 가르침에서 변질된양 말씀하시지만 오히려 그러한 태도가 종교의 프레임에 갇혀있는게 아닐까요? 그 시대와 환경에 맞게 변하고 적응하는 것을 저는 긍정합니다.
책 추천 감사합니다.
얼마 전에 유튜브에서 강기진 작가의 책 소개를 겉핥기로만 듣긴 했는데
이 주제와도 연결되는 부분이 있긴 하겠네요.
현재의 불교계라는 신앙집단은 환경에 적응해 잘 살아남은 것이라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다만 저는 싯다르타의 원래 사상 쪽에 호감을 갖고 있는 건데, 그냥 제 취향일 뿐이죠.
진리는 가르침 안에 있지 종교나 신비주의에 있지 않아요.
비슷한 생각들을 슬쩍 하고 지나간 적이 있는 사람은 많을텐데 그런 생각을 끝까지 밀고가서 깔끔하게 정리해놓은 글을 보면 반갑기도 하고 그렇더라구요.
저도 얼핏 생각만 스쳐지나가다가, 갑자기 꽂혀서 정리해보고 싶어질 때가 있네요 :-)
불교만한 수준 높은 철학은 없는 것 같아요.
한가지 조심스러운 이야기를 드리자면, 불교의 저명학자라고해서 수행의 깊이가 더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물론 그 분을 폄훼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불교의 기본은 수행에 있고, 각자의 가치관이나 성향에 따라 다른 수행법, 다른 중간 결과 값을 가집니다. 학문적 논증만으로는 그 한계가 명확한게 또한 불교이기도 합니다.
불교가 태동되었다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에 있어 말씀드리자면 초기 불교에서도 업과 윤회에 대한 논쟁이 있으며, 카르마와 윤회에 대한 개념은 힌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보입니다, 다만, 힌두와의 차별점을 두기 위해 자아의 영속성이 아닌 정보, 데이터의 이전, 전송 개념으로 설명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각묵스님은 이를 재생연결식이라고 표현한 것으로 압니다. 그리고 국내 위빠사나 선원에서도 대부분 재생연결식이라고 표현합니다.
천신에 대한 부분 역시, 초기 불교에서 천신에 대한 개념을 받아 들였다기 보다, 이미 당시에 신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었고, 다만 이를 배격하기보다는 무기(?) 했다고 생각합니다. 논쟁의 의미가 없는 것이었던게 아닐까 싶습니다. 즉, 신이 없다라고 이야기 하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신봉하지도 않았다라고 보입니다. 천신들의 부탁에 법을 펼치기로 했다는 이야기도 있는 것으로 봐 단지, 종교화 되면서 이를 체계에 맞게 변형시켰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 같습니다.
가끔 그런생각을 해봅니다. 조계종이나 테라와다 불교에서 불교 강의나 공부강좌를 많이 열기도 합니다만, 그렇게 교육된 공부도 좋으나, 붓다고사가 주해해놓은 부분 같은 것을 제외하고 봤을 때 얼마나 붓다의 이야기가 테라와다 승단이나 조계종등의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것과 다른 부분이 있는지 고찰해봄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아주 아주 가끔 해봅니다.
몇해전인가 강화도 길희성 교수의 주인 없는 심도학사를 잠시 들러보고 오는길에 들었던 생각입니다.
우린 얼마나 예수를 알고 얼마나 붓다를 이해하고 있을까요.
그러고보니 길희성교수도 예수와 싯다르타의 공통점에 대해 고민을 했던 분이네요 :-)
또 구글등 대기업에서도 명상한다니.. 그건 그만큼 효과를 본다는 말이겠죠.
유튜브 검색하시면 석가모니가 수차 강추하신
모든 명상의 기본인 `호흡관찰명상 (= 수식관 = 팔리어: 아나빠나사띠, Anapanasati)) 라는
명상법의 설명영상이 많이 있으니 시도해 보세요.
하루 5분에서 ~ 45분쯤
차츰 시간을 늘려가며 두어달쯤 하다보면..
첨엔 우울증이나 불면증등 스트레스로 인한 것들이 사라지며
몇달 안 지나 명상시간이 하루중 가장 기다려지는 행복한 시간이 됩니다.
또
명상 시간만큼 뇌파가 안정되어 잠을 덜자도 되니 시간 걱정은 마시고요.ㅎ
이후 6개월 ~3년쯤해서 `4선정 단계`의 뇌파에 이르면
사업 아이디어나, 자기와 인연되는 사람, 성공할 사업을 보는 순간 바로 아는 직감력, 예지력등
자기속에 잠자고 있던 능력들이 올라 옵니다.
여러분들도 아는 사람으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티비등에서 문득 박그네를 보면 `저사람은 몸이 몹시 차구나` 같은 정보가 그냥 알게 됩니다..
그래서 검색해 확인해보니 `청와대 있을때 에어컨을 못틀게 해서 밑에사람들이 애먹었다`는..
또 제가 수개월전에 한덕수는 기 다 빠진 사람이라고 얘기했는데.. 결국 얼빠진 짓 했고..
그후, 김병기도.. 혈기를 주체 못할거라 했었고..
또 정성호도 눈빛이 거시기 하다고 했죠.
근데.. 어째 명상의 장점을 이야기하다보니 흐름이 제가 점쟁이처럼 되버린ㅎ
암튼 명상의 우선 목적은 마음의 평화를 이루는거고
최종 목표는 모든 생사 윤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거죠.
그 과정상에서 여러 신기한 능력도 나타나는거고요.
위의 책 내용같은 불교이론에 대한건 공부가 좀 된 뒤에 하는게 낫습니다.
예를들어
`공` 이라는 글자 하나의 뜻도 명상을 오래할수록 점점 마음으로 느껴지는 의미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실제 수행없이 머리로만 따지는건 별로 비추.
암튼 저는 60여년 살면서 중요한 판단의 순간에 명상의 도움을 많이 받았으며,
또 명상시간 자체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운 시간이기도 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매일 샤워, 헬스등 육체 물질적인 것에만 노력하고
기장 중요한 마음의 샤워, 정신 조각모음 내지 심리포맷 평생 안하는거 보면 정말 답답합니다.
부디 여러분들 속에서 잠자고 있는 초능력 아이템들을 좀 꺼내 쓰시길 바랍니다.
또 사족으로..
명상을 하고나면 유튜브 음악 하나도 감도가 달라집니다.
예를들어
유튜브서 평상시 듣던 음악이 감도100정도의 느낌으로 감흥이 느껴졌다면,
명상을 할수록 3백, 9백, 3천이 됩니다.
저는 미대다니며 그림그리고, 음악도 하고, 온갖 주색잡기 좋다는거, 각종 유흥 오락에,
요즘 돈으로 매일 5백만원쯤 일이년쯤 쾌락을 쫒아 써보기도 했습니만.. 결국 허무 뿐..
그런것이 주는 즐거움은
명상의 즐거움에 비하면 그저 유치한 애들 딱지치기 수준입니다.
** 명상을 하실때는
조언을 해줄 선생님을 on이든 off에서든 꼭 두세요.
그래야 허송세월없이 진도가 빨리 나갑니다.
저는 명상을 해봐야지 하면서도 너무너무너무너무 재미없고 힘들기만 해서 금방 포기합니다 ㅠㅠ
지인에게 얘기해봤더니 저처럼 '납득'을 해야 뭔가를 받아들이는 타입은 힘들 거라고...;;;
돈 많으셨네요. 부럽.. 나도 유치했으면 좋겠다.
일단 영상보고 해서 맛을 보고난뒤, 본격적으로 할거면 선생을 두라고 썼습니다.ㅎ
저도 30년전 첨 할때 며칠은 정말 지루했습니다.
한참 앉아 있은거 같은데 겨우 2분지나고..ㅠㅠ
그렇게 며칠하다가.. 오늘은 졸더라도 30분은 그냥 무조건 앉아 있어보자..하며 버텻고..
그후에 일어난 경이로운 경험은 생략합니다.
왜냐면 제 말을 듣고 님의 의식을 일부러 그렇게 조작할수 있기 때문에 제말이 독이 될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매우 좋습니다. 매우 매우..
그러니깐 스님들이 하루 10시간씩 앉아 있는겁니다.
그때부터는 하지말래도 그시간이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됩니다..
명상은 멍때리면서 뇌파를 낮추는 작업입니다.
다만 멍때림과의 차이는 명상은 호흡등 어떤 포인터에 의식을 초집중해 준다는 겁니다.
보통의 멍때림은 그런 집중점이 없기에 잡념이 계속되고
뇌파가 깊이 못내려 갑니다.
명상 몇달하면 자신에게 마치 스트레스를 튕겨내는 갑옷같은게 생긴걸 진짜 느낍니다.
그렇게 어딘가에 의식 집중을 계속 하다보면
몇달~몇년후 4선정에 듭니다.
4선정 설명
윤홍식 이분의 이론적 설명만 참고로 하세요.
철학 전공자이고 실수행도 한 젊은 분이라 요즘 말로 하니 이해하기가 편한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견성한 사람이라도 우파, 좌파 다 있습니다.ㅋ
4선정의 의식상태를 들락거릴 정도가 되면
그 의식상태에서는 어느날 마당의 부서진 의자 하나를 봐도,
심지어 골목 전봇대 구석 구토물도.. 전부 각자 제자리서 당당하고 찬란하게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의식이 바뀝니다.
처음엔 내가 미친건가 싶어 평소 더럽게 보이던걸 일일이 다시 보고 ( 그때 본게 화단속 개똥 ㅋ)
내 의식을 확인도 했습니다.ㅎ
또 가끔 영체도 보이고, 전생도 보이고, 불경책의 빛도 보이고,
차안에 앉은 남의 마음이나 몸 통증도 까지도 그냥 느껴지고,
또 박지성이 축구하던 레알 마드리드 구장의 강력한 주술처방 해놓은 기운까지 화면으로 느껴집니다.
또 티비속 MB에게는 역겨운 검은 오라가 보이기도 하고요.ㅎ
명상은 사람따라 차이나지만
보통 자전거 타기나 기타배우기 또는 술,담배 맛을 느낄 정도의 시간은 필요합니다.
첨엔 좀 편안하게 개기듯 또는 졸듯.. 하다보면 결국 한달 안가서 살짝 맛을 보게되고
몇달~몇년만에 깊은 4선정에 이릅니다.
명상의 2가지 핵심은 `이완`과 `집중` 입니다.
몸과 생각의 힘은 빼고,
의식은 한점에 초집중.
그런건 경험자 말듣고 대충 간접 경험이 낫습니다.
직접하면 깨닫는게 더 강하긴 하지만 시간낭비죠.ㅎ
저는 20대 후반에 명상을 처음 했는데..
제가 서른쯤에 `옴마니 반메훔` 육자진언을 차에서 운전하며 하루 한두시간쯤 한적이 있습니다.
직업이 식품업이라 아침 배달 한두시간 운전하고
그날도 집에 돌아와 마누라가 밥 챙겨 올 동안 잠시 방의 벽에 기대 앉았는데..
방바닥에 편안하게 눈 감고 벽에 기대앉은지 한 3초쯤 됐을까요?
눈앞에 갑자기 대형 티비 스크린이 켜지듯
검은 밤의 강물? 바다?경치가 화려하게 나타납니다.
강물 뒤에 녹색 산봉우리 세개가 보이고 산봉우리 뒤엔 불이 활활타고 있습니다.
그 불길을 보는 순간
저건 인간 영혼이 넘을수 없는 울타리 벽임을 그냥 직감으로 압니다.
그런데 그 불벽 너머에서 별똥별처럼 또는 영화속 UFO처럼
작고 둥근 황금 빛덩어리가 내쪽으로 날아 옵니다.
몇초후
내눈앞에 그 노란 황금빛 덩어리가 마치 추석날 밤 동산 위의 보름달처럼 우뚝 섰습니다.
밝고 둥근 구체가 장엄한 황금빛을 번쩍거리면서 내 눈앞에서 가만히 있길래
마음속으로 `이게 머지?...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장엄한 둥근 빛이 내 머리속에서 울리는 텔레파시로 대답했습니다.
`너는 아마 나를 이런 존재로 인식할거야`...하며
그 노란 원광속에
극히 더밝은 흰색 광선으로 마치 그림의 본을 떠듯 선들을 주욱 보여 줍니다.
그 밝은 선들과 약간의 담채 칼라로 내게 나타난 형상은.....
백일 관음기도해서 날 낳은 제 모친이
어릴때 내손을 잡고 데려가던 대구 관음사 절의 족자 속 관음보살 모습이었습니다.
`아 관세음보살님이시다`..
나는 환희심으로 가득차 계속 바라보고 있다가..
잠시 약 20~30초후
내가 지금 꿈을 꾸는건 아닌가 싶어 살짝 눈을 떠 밧습니다.
분명 제방이 맞고 맞은편 벽위의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 오는것도 보입니다.
다시 눈을 감으니 관세음보살 황금색 원광이 또 보입니다.
그리고 천천히 서서히 원광이 엷게 사라졌습니다.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이 확실하진 않지만.. 1990년쯤인듯 한데
그렇게 관음보살 친견후 부터 갑자기 장사가 잘되기 시작하여
그후 몇달뒤
엘란트라 차를 뽑을때 300만원 쯤 줬는데..
그때쯤 한달에 천오백 이상씩을 순수입으로 벌게 되었습니다.
한달 오백 쓴건 제친구가 당시 대기업 회장 아들이라 같이...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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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머 까마득한 옛날 일을 자랑할려고 쓰는게 절대 아니고..
돈을 많이 벌려면 또는 인생에서 바램을 이루려면
흔히 요즘 말하는 머 끌어당김의 법칙이니 시크릿같은 법칙,
또는 관세음보살같은 영적존재의 도움 같은게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에너지를 모으는게 일반인들은 잘 안됩니다.
왜냐면..
그걸 현실에서 작동 시킬려면 자기 뇌파의 집중되고 순수한 의식의 힘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저 하루 몇분 책읽듯 일반뇌파 상태서 흥얼거린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ㅎ
자기가 원하는 세상을 만드는건 자기 의식의 힘입니다.
유발 하라리가 하루 매일 2시간쯤 명상한다더군요. 호흡명상..
그 정도하면 그 집중된 의식을 현실에 적용하면 머든지 할만 합니다.
스티브 잡스도 그랫고..
공부도 집중 잘하는 애가 성적이 잘나오듯.. 세상 모든일의 성취 관건은 의식의 집중된 파워입니다.
참고: 서울대 황농문교수 쇼츠
저 교수분은 몰입을 강조하는데
가장 좋은게 명상이고, 일반인들에겐 저런 식의 몰입이라고도 설명하죠.
저건 일종의 불교의 화두명상 비슷한 기법이기도 하고요.
참고로 제가 호흡 명상을 할때 숨을 한번 쉴때마다
코털이 호흡에 흔들리는 것을 수십장의 슬로 비디오 화면을 찍듯
초집중 합니다. 그래야 집중력의 파워가 생깁니다.
암튼 님 인생을 원하는대로 바꾸는것은 님 의식의 순정 파워입니다.
명상으로 의식을 집중시켜 꿈을 현실화하시기 바랍니다ㅎ
어릴때 참선공부를 조금 해서 내조를 합니다. 기도나 삼천배 이런 것은 안하구요...
그후 색욕이 올라와서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외수 작가님의 들개를 보면 젊은 수행자가 그런 번뇌에 빠지는데, 결말을 불교적으로 보면 이상하게 내서 별로 안좋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윤회의 때가 벗겨지면서 5욕7정이 분출했던 것 같습니다.
그뒤에 법상스님 유투브 설법을 계속 들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반야심경이나 금강경의 내용이 이해된다고 생각되었고, 실생활에서의 큰 변화는 겁을 상실하게 되더군요.ㅎㅎㅎ
겁이 많아서 넓은 사무실에 혼자 야근하고 있으면 불이 밝아도 소름 돋고 머리털 설 정도로 무서움에 빠졌는데 그런 것이 없어졌습니다.
지금은 그냥 평안합니다. 슬픈 것도 그렇게 슬프지 않고 기쁜 것도 그렇게 기쁘지 않습니다. 운전할때 버럭하는 것도 없어진 것 같습니다.
그런 감정이 올라와도 '아~ 감정이 올라왔구나' 하고 바라보면 사라집니다.
어제 법상스님 유투브 설법에서 '생각하게 되면 두려움이 올라온다', '과거의 일을 미래로 비추는 생각을 하지마라'라고 하시더군여. 그런 생각들에 끌려가지 않으면 생각들이 사라지고 가벼워집니다.
이렇게 보임을 해서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 열반적정을 완전히 이루어서 이번 생에 대장부 할 일을 다 마쳐야겠지요.
원글에서도 언급되었듯이 불교신앙인들이 너무나도 큰 상을 만들어놔서 이 맛없는 맛의 경계를 의심도 하고 그러지만, 보임하는 자리에서 다른 증명할 것도 없고 보여줄 것도 없고 해서 법상스님 설법만 듣고 1분 명상도 했다가 일상생활하면서 지내는 것 뿐입니다~^^
요즘은 유튜브로 좋은 강연을 많이 들을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습니다 :-)
눈 밝은 스승과 좋은 도반은 정말 필요충분 조건입니다. 불교를 배우려면 무조건 찾아가서 확신이 서면 귀의해야 하는 것이죠. 사이비를 구분하고 진짜 스승을 찾아내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자세히 살펴봐야 합니다.
그래서 좋은 강연보다는 스승을 찾아야 해서 저는 늘 주변에 법상스님을 추천드리지만 본인과 안맞으면 어쩔 수 없지요...
암튼 유투브로 설법을 들을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은 가히 지금이 불교의 황금기라 할 수 있겠습니다.
꼭 신의 존재를 믿지 않더라도
불교가 가지는 가치관, 윤회, 죽음 이후 등등
이 모든건 종교죠.
간단하게 보자면 개인주의적인 싯다르타의 사상을 대중적으로 퍼뜨리는 과정에서 일종의 신앙으로 진화했고,
그 신앙집단은 뇌과학이 등장한 지금은 또 다른 것으로 진화하지 않을까 하는 거겠네요.
묘하게 양자역학이나 다중우주론과 이어지는 부분이 있어보이고
마음을 잃어버리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특효 디지털 디톡스가 될 수 있겠죠.
여담이지만 기독교는 스스로 교리에 갇혀버려 진화에 실패할것 같습니다.
제2의 예수같은 존재(종교개혁가)가 나타나지 않는 한 말이죠.
불교도 흰두교 우퍄니샤드에서 나온 갈래이지 않나 싶어요.
재미있습니다
https://m.blog.naver.com/bestprpr/220698459124
와, 말씀대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블로그의 다른 글들도 읽어보고 싶네요.
이런 부분들이 특히 인상적인데요,
'소통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깨달은 사람이란, 자신이 '깨달았다고 말하는 사람'일 뿐이다.'
'사람들은 삶의 저항을 피하는 방법을 원하지만, 본질적인 해결책을 가르쳐주면 모두 황망히 자리를 뜨게 되어 있다.
무아를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남아서 눈동자를 반짝이는 사람들의 대부분도 동상이몽이다.'
읽으면서 저에 대해 돌아보게 됩니다.
저도 '명상을 하면 집중력이 좋아지고 머리가 맑아진다고 하니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
라는 등의 생각을 하기는 하긴 하는데,
저에게 그렇게 명상이 좋다고 얘길 하는 사람들도, 그걸 듣고 끌리는 저도
결국 어떤 '효과'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 게 아닐까,
'더 나은 나' 같은 것에 대한 집착을 하는 게 아닐까,
글쓴이가 말한 '동상이몽'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 본문에서도 얘기한 '모순'의 문제가 계속 떠오릅니다.
'깨달은 사람들만 있는 사회'라는 게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런 상태가 된다면 그 사회는 어떻게 될까,
그 사회가 유지될 수 있을까 아니면 도태될까, 하는 생각입니다.
('깨달은 사람'은 결국 사회적으로는 존재감이 0인 사람,
사회적으로는 죽은 거나 다름없는 사람이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위의 로버트 라이트의 지적대로,
유전자는 자신을 퍼뜨리기 위해 인간 등의 생물을 만들었고,
그 기능을 하기 위해 '갈애'를 심어두었습니다.
'깨달음'이란 결국 이 유전자 전달 메커니즘 자체를 정지시키는 것,
즉 '유전자 복제 기계'로서의 소명을 자발적으로 거부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생물학적 관점에서는 명백한 '도태'를 수용하는 셈일텐데,
역설적으로 진화의 압박을 완벽히 극복한다는 점에서
이것이 진화의 최종 단계인 것일지,
아니면 진화라는 거대한 흐름에서 완전히 이탈해버리는 지적 돌연변이인 것인지
여러 생각이 드네요.
글이 긴데, 아래부분에 핵심내용이 있으니
시간 되시면 한번 읽어 보세요
https://m.jungto.org/pomnyun/view/85632
https://m.jungto.org/pomnyun/view/85633
감사합니다 :-)
시청했던 기억이 나서 올려봅니당
엉.... 신천지 영상인가요.
저는 영혼이나 신, 초월적인 진리, 이데아 같은 건 뇌가 생성해내는 환각(hallucination)이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