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도올의 기독교이야기'라는 원광대 강의 내용을 클리앙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
바울과 로마제국의 필요와 관점에 의해 성립된 기독교(신으로서의 예수를 섬기는 종교)에서 벗어나서
예수의 가르침 자체를 다시 보자는 것입니다.
( https://www.clien.net/service/board/lecture/9039802CLIEN )
우리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에게서 교훈을 얻을 때
굳이 그 시절 그들이 신앙했고 그들의 세계관으로 작용했던 그리스신화까지 믿을 필요가 없듯이,
예수에게서 교훈을 얻을 때 당시 유태인들이 믿었던 야훼신화까지 믿을 필요가 없다는 거지요.
저도 이런 미신적인 요소를 포함한 종교로서의 기독교는 인류사에 많은 폐해를 끼쳐왔고
(기독교 뿐 아니라 마찬가지로 야훼 신화에서 파생된 유대교와 이슬람교도요)
이건 지금 우리도 익숙하게 당해온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가 권력이 되었거나 권력에 기생해왔고, 마르크스의 표현대로 인간에게 마약으로서 작용해왔습니다.
몸학 기독교 연구소라는 곳이 있는데, '새로운 대안 기독교 탐구'라고 홈페이지 첫머리에 박아놓은 곳입니다.
http://freeview.org
그 중 이 곳에서 생각하는 예수관, 기독교관을 정리한 글이 있어 소개합니다.
제가 주관적으로 한줄요약해 보자면
'인간의 폭력성에 맞서는 방법론으로서는 예수의 방법이 짱인 것 같다(기독교는 오히려 스스로가 폭력이 되었고)'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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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수인가 : http://freeview.org/bbs/board.php?bo_table=b001&wr_id=651&page=3
엉성하게 요약해보면 이렇습니다. (미량의 제 주관적인 해석이 섞여 있습니다 --;)
생명체는 고통을 다른 개체에게 떠넘김으로써 자신에게 고통을 유발하는 스트레스를 경감시켜왔다.
(희생양 만들기, 왕따, 아동학대, 동물학대, 전쟁 등)
이런 폭력은 심지어는 쾌감을 주기까지 한다.
인간은 폭력과 힘에 대한 숭배를 본능처럼 습득해왔다.
인간은 사회를 이루면서 집단의 결속을 위해 이런 희생양의 대리 희생을 이용해왔다.
힘없는 약자들(병자, 장애인, 여성, 아이 등)을 '죄인'으로 취급하여 이런 희생양으로 삼아왔다.
이런 폭력은 구조화되고 거룩한 의식이 되고, 그 희생자들은 신의 대리자, 구세주 등으로 신화화되기도 했고
대부분의 고대 신화는 가해자를 대변하는 신화이다.
그런데 예수라는 인물이 스스로를 희생하여 이 폭력적인 희생양 메카니즘을 폭로했다.
로마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한 것을 목도한 마가 공동체는 이 점에 주목하여 예수 사건을 기록했다. (마가복음)
(하지만 여기에 기록된 '예수'라는 인물은 사실 실존한 어떤 한 명의 행적에 관한 게 아닐 수도 있다.
당시의 여러 예언자 운동, 메시아 운동을 결합하여 형상화한 문학적인 기록일 수 있다.)
'죄인' 취급받던 약자들을 '하나님 나라의 주인'으로 선포하며 계급의 전복까지도 내포한 예수의 급진적인 가르침은
바울 나름의 해석으로 인해 더 널리 퍼질 수는 있었지만
반대급부로 로마제국에 포섭될 수 있을 정도로 너무 온건하고 관념적인 종교가 되었고,
이후 지배체제에 봉사하는 아편이 되고 말았다.
민중신학의 관점으로는 예수의 수난은 개인의 수난이 아니고 민중의 수난, 인류 전체가 당하는 수난이다.
전태일 사건 등, 이들의 비폭력적 희생사건들이 폭력을 폭로하여 시대의 진보를 가져오며 진정한 구원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예수는 어떤 특정한 이스라엘인 한 명이 아니라 시대에 의해 희생된 자들 모두이다.
예수 사건은 2000년전에 한 번 일어난 특정한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가 겪어내고 있는 사건이다.
다른 신화나 종교 등에도 좋은 가르침은 많다.
하지만 예수운동은 우리 안의 폭력의 본성을 끝장내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알려준다.
하지만 주류 기독교 진영은 본래의 예수운동을 무참하게 왜곡시켰고 오히려 지배체제로 전락함으로서
폭력에 해당하는 '반예수운동'을 전파하였다.
필자는 제대로 된 예수운동을 꿈꾼다.
아파트에 전단지 살포. 지나가는 사람 붙들기. 타종교 비방하기 등등 노답;
무교이지만, 천주교 유치원(성당)을 나와서 수녀님 신부님에 대한 이미지도 좋고, 부모님은 불교 믿으셔서 불교에 대한 거부감도 없지만 개신교는 노이해;;
'죄는 죄가 없어. 죄짓는 놈들이 나쁜 거지'라는 말장난과 비슷한 구조의 말인 것 같아요.
신화로 보는 거야 무슨 문제가 있겠냐만, 그 자체가 폭력적이고 배타적인 야훼신앙을 절대진리로 받아들인다면 현대사회와 어울릴 수 없겠죠.
일단 링크해드린 본문 글에는 이렇게 써 두었습니다.
이제 내게 있어 <왜 예수인가>에 대한 답을 결론적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나는 솔직히 지라르의 주장처럼 희생양 기제를 폭로하고 폭력을 비판한 신화가 꼭 신구약성서 외에는 아예 없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어딘가 찾아보면 분명히 세계 곳곳에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월터 윙크의 경우도 인디언의 신화를 들기도 한다.따라서 몇몇 아주 드물지만 다양한 고대 신화들 가운데도 비범한 통찰이 있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구원하는 폭력의 신화가 갖고 있는 희생양 메커니즘을 고발하고 그 폭력적인 지배체제에 맞선 비폭력적 사건이라는 점에서 이를 드러내는 하나의 정형화된 모델로서는 성서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사건만큼 매우 뚜렷한 경우를 찾기란 힘들다는 사실이다.유교나 불교 같은 다른 고등종교 경전들의 경우 기독교 성경에 비하면 너무나 고상한 얘기들을 잘 담아놓고 있기에 고대 현자의 지혜를 잘 들려주고 있다고 생각한다....그러나 성서는 그동안 기존 기독교의 체제와 문화로 인해 그 진정한 뜻이 가리워져 왔었지만, 그 껍질의 눈을 벗고 좀 더 정면으로 깊숙이 들여다보면 예수운동이 인류의 정신사에 정확히 어떠한 의미를 지니게 되는지를 극명하게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운동은 우리 안의 본성처럼 달라붙어 있는 폭력과 전쟁의 유전자를 끝장내는 가장 효율적 방법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예수운동 밈(Meme)이라고 비유해 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