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걸 검색하다가 우연히 찾은 사이트인데, 기원전 3천년부터 현재(2015년)까지 1년 단위로 변화하는 세계지도를 볼 수 있는 사이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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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관련된 자료를 이 지도를 열어서 같이 보면 재미있고 도움이 많이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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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나머지가 동오, 조위 인데요.
저 중국어는 모름...
신라가 제일 먼저 건국되는 거로 나오네요.
그냥 엉터리라고 생각하고 신경끄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여는 기원전3세기경에 송화강 유역에서 건국되었습니다.
단군조선이 망하고 위만조선이 세워지던때죠
부여, 扶余, 夫餘, Buyeo.
만주(현재의 중국 동북지방)에 존재했던 한국의 고대 왕조. 예맥족이 주축을 이룬 국가로 휘하에 읍루도 그 구성원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한민족의 뿌리가 된 국가중 하나라고 할수있다.
고고학적으로 부여의 전신은 기원전 10세기에서 4세기까지 존재한 길림성의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로 본다. 서주~춘추시대 초기에 성립된 서단산문화는 점차 발전하면서 요동/한반도의 청동기문화를 받아들여 발전하였으며, 요동/한반도와 같은 청동기문화권에 속한다. 특히 몽골리안계 인골의 발굴과 고조선을 비롯한 한국계의 유적/유물로 분류되는 석관묘, 비파형 동모/동검, 가는무늬거울 등이 발견되는 동시에 초기에는 요동/한반도와 유사하면서도 고유한 모습을 보이지만 후대로 갈수록 요동/한반도 지역과의 교류/친연관계가 점점 강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이후 석기/청동기 문화인 서단산문화는 초기 철기 문화인 대해맹유형(大海猛類型.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전 2세기)을 거쳐 철기 문화인 포자연유형(泡子沿類型.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으로 이어지는데, 여기서 하나의 국가인 부여로 발돋움한 건국 연대는 보통 위만조선과 비슷한 기원전 2~3세기로 보고 있다.
부여의 국호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부여라는 이름은 사슴을 뜻하는 만주어 '부루'에서 왔다는 설과, 평야를 의미하는 '벌'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그밖에 왕족의 성씨가 해씨였으므로, 태양숭배, 불숭배와 관련하여 '불'이 어원일 거라는 설도 있으나 이 모두 명확한 사료가 없어 추측의 단계에 머물고 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몽골의 부리야트(Буряяд)가 부여의 원음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발음의 유사성과 위치의 근접성 말고는 사실 가깝지도 않다. 이렇다할 근거가 없으니 참고하는 선에서 끝내자. 참고로 부리야트는 부리야트 공화국으로 현존하는 나라인데, 러시아에 속해 있다.
경주는 형산강 지구대의 중심에 위치한 형산강 평야의 핵심 부분이기도 하다. 특히 사로국의 국읍(國邑)에 해당하는 경주분지는 삼면을 에워싸고 있는 하천의 범람에 의해서 퇴적된 선상지라고 할 수 있다. 즉 시가지 서쪽을 남쪽에서 북쪽 방향으로 흐르는 형산강 외에 북천(일명 알천)과 남천(일명 문천)이 경주분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북천은 토함산 서쪽 계곡에서 발원하여 명활산과 금학산을 통과한 뒤 직선방향인 서남쪽으로 흐르지 않고 서북쪽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시가지 북쪽을 흐르는 남천과 합류하여 주변 여러 곳에 늪지를 발생시켰다. 그런 까닭에 경주분지 내에서는 북천의 범람을 피할 수 있는 지역에 일차적으로 거주공간이 마련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최근의 경주분지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조사의 성과를 갖고 본다면 황성동유적에서 삼한시대 초기에 해당하는 서기전 1세기 중반경의 고식(古式) 와질토기가 발견된다거나 대단위 취락이 형성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인왕동고분군 하층 유적에서 볼 수 있듯 서기 3세기 전반경부터는 왕궁이 있었던 월성(月城)을 중심으로 한 반경 약 1㎞ 이내의 지역으로 확산되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는 어쩌면 황성동 일대가 포화상태에 이르자 공간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월성 주변으로 옮겨진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남천에 의해서 분리되어 있는 이 황성동지역과 월성지역 사이는 뒤에 조정에 의해서 개발되기까지 오랜 동안 습지상태로 남아 있었던 듯하다.
한편 경주평야는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중국의 경우처럼 수도 외곽에 별도의 나성을 쌓을 필요가 없을 만큼 천연적인 성곽을 이루고 있었다. 사로국을 구성한 여섯 촌의 시조전설을 보면 시조들이 하늘에서 경주 주위의 표암봉·형산·이산(일명 개비산)·화산·명활산·금강산에 각기 내려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경주의 지리적 조건과 결부시켜 윤색한 것이 분명하다고 하겠다.
어쨌든 경주의 성곽도시적 성격은 초창기 사로국의 발전과 자위(自衛)에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형산강과 그 지류들을 끼고 주위의 산으로 둘러싸인 이 국읍은 외부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방비할 수 있었으며, 국가의 내부적인 통합을 꾀하는 데 있어서도 유리한 점이 많았다. 국가의 지배체제가 아직 정비되지 않았던 진한 12국 시대는 국가들 사이에 연맹과 전투가 끊임없이 되풀이 된 시대였는데, 사로국이 이같은 소용돌이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주위의 소국들을 모두 병합할 수 있었던 비결의 하나는 바로 이 지리적인 이점(利点)때문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신라인의 보수성이랄까 지역적인 폐쇄성이랄까를 양성하게 된 요인이 되었다.
신라는 진한의 동료국가들을 모두 병합한 뒤 소백산맥 동남부의 영남지방을 본부로 하여 삼국 항쟁의 대열에 뛰어들었다. 소백산맥은 북방으로부터의 침공에 대해 영남지방을 보호하는 천연적 장벽의 구실을 톡톡히 했으나, 한편 교통상으로는 그 만큼 큰 장애물이 되어 심한 격절성(隔絶性)을 띠었다. 이를테면 외부의 주민들이 북쪽으로부터 소백산맥을 넘어 영남지방에 일단 정착하게 되면 마치 울타리 안에 갇힌 꼴이 되어 다시는 여기서 좀처럼 빠져나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고조선의 멸망을 역사적 계기로 하여 광범위하게 진행된 주민 이동의 물결 속에서 뒤에 진한과 변한을 형성하게 된 이주민들이 여러 단계에 걸쳐 소백산맥을 넘어 영남지방에 중층적으로 잡거(雜居)하는 가운데 이 지방의 독특한 지리적 환경에 적응하면서 비교적 빠른 기간 내에 동질화의 과정을 밟게 되고, 더욱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강한 토착적 성격마저 띠게 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