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끈한 국물이 좋은 맛집 좀 소개해 주시게."
온 사방 먹거리란 먹거리는 다 쑤시고 돌아다니며 SNS에 사진을 올려대는 여(余)에게 벗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사실 여는 미각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소위 '맛집'을 뚜르르 꿰고 있는 통도 아니다. 게다가 불혹의 나이를 넘긴 지금까지도 어린아이 같은 입맛을 버리지 못하여 빵과자나 분식에 환장하는 부류이기도 하다. 그런 여에게 '뜨끈한 국물'이라는 아저씨 메뉴를 추천해 달라고 하면 꽤나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름 기대를 갖고 질문해 온 벗들에게 가 보지도 않은 인터넷 맛집을 덜컥 추천해 줄 수는 없고, 그렇다고 대답을 안 해 주자니 '혼자서만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닌다'며 구시렁대는 소리를 듣게 될 터. 그래서 얼마 전부터는 딱히 입맛이 당기지 않아도 설렁탕이니 곰탕으로 유명한 가게들을 들러 보고 있다.
사실 서울 시내 한복판인 시청-명동 인근에서 일하다 보면 탕으로 유명한 식당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서울 곰탕집 중 가장 유명한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하동관 명동 본점. 역시 명동에서 밥 좀 오래 먹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는 50년 전통의 미성옥(설렁탕). 아마도 남대문시장의 맛집들 중 가장 오래되었을 80년 전통의 은호식당(설렁탕, 꼬리곰탕, 꼬리찜, 방치찜). 조금 더 움직이면 110년 전통의 국내 최고 노포 이문설농탕(설렁탕, 도가니탕)도 있고, 고려삼계탕, 백제삼계탕, 토속촌 등 내로라하는 삼계탕 맛집들도 전부 이 주변에 몰려 있다. 한마디로 이 동네는 식당이 없거나 멀어서 탕 요리를 못 먹을 일은 없는 동네인 것이다.
그러나 벗들이 원하는 가게가 그렇게 누구나 다 아는, 어지간하면 한 번쯤 다 찾아가 봤을 가게가 아님을 여는 잘 알고 있다. 아날로그 세대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노포도 아닌, 그렇다고 디지털 세대가 예쁜 사진과 화려한 문장으로 포장하여 소개하는 인터넷 맛집도 아닌, 어떤 동네에서 오래 머무른 사람들만의 맛집인데 인터넷에 소개하면 와! 하고 폭발적인 반응이 일어날 듯한 비밀의 화원 같은 가게에 너 혼자 다니고 있는 것이 아니냐!...라는 짐작으로 질문을 던지며 여의 반응을 살피는 것이다. (이보시게들... 여가 그런 가게들을 수십 군데씩 알고 있었더라면 어떻게든 그 길로 먹고 살 방법을 찾지 않았겠는가....) 이 때 아무리 '여는 잘 모른다'며 진실을 말해도 전술한 것처럼 구시렁구시렁 불평이 나오기 십상이니, '그래, 차라리 여가 맛집을 찾아 주마' 하는 심정으로 틈 날 때마다 평소 다니지 않는 식당들을 쑤시고 다니는 것이다.
한국은행 옆, 북창동 골목 안에 위치한 애성회관을 찾아 들어간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회사에서 가까운 곳이다 보니 그 앞을 지나친 적은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러나 'XX회관'이라는 이름이 왠지 흔한 동네 고깃집 같은 이미지를 주는 데다, '한우 곰탕, 파주 장단콩 냉 콩국수' 등의 주력 메뉴를 써 넣은 간판의 디자인이 산만하기 이를 데 없어서 이 집이 맛집일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처음 이 집에 들어가게 된 것도 어떤 의도가 있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 날의 변덕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 왠지 오늘은 모험을 해 보고 싶어졌다, 라는 식의.
그런데.
순간의 변덕으로 애성회관을 문을 열었던 여가 그 이후로 이 가게의 뼈덕후가 될 줄이야....
"어서 오세요."
"곰탕 한 그릇 주십시오."
"특으로 드릴까요?"
"...아뇨, 그냥 보통으로 주십시오."
애성회관의 메뉴는 지극히 간단하다. 술안주를 겸한 요리로는 한우 수육과 한우 불고기, 낙지볶음, 그리고 한우와 낙지를 동시에 즐기는 메뉴가 전부이다. 식사 메뉴 또한 한우 곰탕과 특 사이즈 곰탕, 그리고 여름 한정 메뉴인 장단콩 콩국수가 전부이다.
"식사 나왔습니다."
곰탕이 서비스되는 속도는 상당히 빠른 편이다. 맑으면서도 진한 색깔의 국물에 서운치 않은 양의 밥이 말아져 있고, 그 위에 1++ 등급으로 보이는 한우 수육 두 점과 소면 한 덩어리가 얹혀 있다. 숟가락을 들어 우선 국물 맛을 보기로 한다.
'.....!'
기름기 하나 없어 보이는 맑은 국물에서 진한 육향과 고소한 지방의 풍미가 느껴진다. 하동관 등 유명 곰탕집의 그것처럼 위장을 기름기로 코팅하는 듯한 느낌이 아닌, 담백한 듯하면서도 진한 고기맛이 우러나는 곰탕이다. 새삼 자세를 바로 하고 소면을 풀어 국물에 충분히 적신 뒤 후루룩 후루룩 먹기 시작한다. 아마도 가게에서 직접 준비하는 듯한 소면은 약간 도톰한 듯한 굵기인데 적당히 탄력이 있어서 식감이 좋다. 양 또한 적지 않은 편이라 위장이 작은 사람이라면 이 소면만으로도 어느 정도 허기를 채울 수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이다. 면과 국물의 조화를 즐기고 나서 기대를 갖고 수육 한 점을 입으로 가져간다.
'음! 이 맛은......!'
일반적으로 탕 요리에 들어 있는 수육이라 하면 여러 시간 끓여서 기름기가 대부분 빠진, 두꺼운 지방 층이 붙어 있다면 모를까 고기 자체에 들어 있는 기름기는 대부분 국물에 빼앗긴, 약간 퍽퍽한 듯하지만 좋은 고기라면 본연의 단맛을 즐길 수 있는, 반대로 질이 떨어지는 고기라면 아무런 맛 없이 국물 적신 가죽이나 헝겊을 씹는 듯한 맛이 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애성회관 곰탕의 수육은 마블링이 좋은 한우 고기를 사용하여 국물을 뽑아낸 뒤에도 기름의 고소함과 부드러움, 고기의 단맛이 좋은 풍미를 전해 주며, 식감 또한 쫄깃함과 부드러움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더 마음에 든 것은 다름아닌 김치와 깍두기의 맛이었다. 우리네 전통의 탕 요리를 맛있게 먹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 바로 김치와 깍두기이며, 맛있는 탕으로 유명한 가게들은 대부분 맛깔난 김치나 깍두기를 제공하고 있다. 애성회관의 김치와 깍두기는 배추와 무의 식감이 상쾌하고 그 맛은 매콤달콤하여 자칫 기름기에 지칠 수 있는 입맛을 확실하게 돋워 주고 있다.
곰탕에서 더없이 좋은 인상을 받은 여는 며칠 간격을 두고 벗들과 함께 애성회관을 찾아 수육과 불고기, 낙지볶음 등을 맛보았다. 호평이 이어졌다. 곰탕에 대해서는 여와 같이 '하동관을 넘어서는, 서울 시내 최고 수준'이라고 평하는 벗들이 다수 있었고, 고기를 먼저 먹은 후 국물에 밥이나 소면을 말아 먹을 수 있는 한우 수육 메뉴 또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설탕이나 조미료의 인위적인 풍미가 최소화된, 양질의 고기를 옛날식으로 두껍게 손질하여 불룩한 불판에 굽는 한우 불고기도 좋은 식감과 풍미를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의외의 대박 메뉴는 한우 요리가 아닌 낙지볶음이었다. 검붉은 양념은 보기와 다르게 전혀 맵지 않으며, 낙지의 식감 또한 지극히 부드러워 이가 약한 사람에게도 아무런 부담이 없다. 여느 낙지 전문점에서도 맛보기 힘들 만큼 만족스러운 수준의 낙지볶음을 고깃집인 애성회관에서 맛볼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어떻게 이런 맛집을 찾았는가?"
"우연히 들어왔다가 대박을 친 셈이라네."
"고기도 맛있고 낙지도 맛있으니, 나도 앞으로 자주 와야겠네."
"몰래 왔다 가지 말고, 소개해 준 벗에게 밥이라도 사 주시게나."
벗들이 만족스러워하는 것을 보며 여 또한 내심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만사가 모두 그러하듯, 이 가게에 만족하지 못하는 벗들도 있었다. 국물이 너무 진한 것 같다든가, 기본 곰탕의 수육이 너무 적은 것 같다든가, 드물게는 '마블링이 너무 좋은 고기라서 수육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불만을 토로한 벗들도 애성회관의 고기가 1+내지는 1++ 등급의 한우가 틀림없다는 것과, 그에 비하여 이 가게의 가격이 상당히 합리적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무시로 드나들며 곰탕이며 요리를 사 먹는 사이에 시간이 흘러 이른 더위가 찾아왔고, 또 금세 여름이 되어 애성회관에서도 콩국수를 내기 시작하였다.
애성회관의 콩국수는 간판을 통해서도 피로하고 있듯이 파주 장단콩을 갈아서 콩국을 만들어 낸다. 장단콩이라 함은 품종명이 아니라 파주 장단면 인근에서 생산되는 백태(하얀콩)를 가리키는 통칭이다. 예로부터 좋은 콩의 산지로 이름이 높았던 이 지역은 남북 분단 이후로 민간인들의 출입이 어려워지자 자연히 청정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장단 지역의 콩은 그 자체로도 뛰어난 맛을 자랑하며, 된장 등 장류를 담가도 좋다. 오래 전부터 고급품으로 유명한 콩이다 보니 가격도 무척 비싼 것이 흠이라면 흠인데, 애성회관의 장단콩 콩국수는 인근의 유명 콩국수집인 진주식당에 비해 상당히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되고 있어서 고맙기까지 하다.
콩 이야기를 하니 왠지 같은 문장을 두 번씩 반복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콩 이야기를 하니 왠지 같은 문장을 두 번씩 반복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콩 자체가 좋으니 콩국 맛도 무척 좋다. 하지만 소면은 조금 아쉽다. 콩국수에 들어가는 소면은 곰탕의 그것과 동일한 것으로 보이는데, 뜨거운 한우 육수에 담가 먹을 때에는 참 만족스러웠던 소면이 차가운 콩국에서는 매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좀 더 굵고 찰진 면을 쓰면 정말 기막힌 콩국수가 될 것 같은데... 콩국 맛에 빠져드는 것을 소면이 방해하는 듯한 느낌에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래도 곰탕 전문점이다 보니 콩국수용 소면을 따로 삶는 것은 무리일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역시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다.
6월도 며칠 남지 않았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될 것이다. 작년 이맘때에는 점심시간마다 이열치열을 위한 더운 음식이냐, 더위를 피하기 위한 차가운 음식이냐를 두고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올 여름에는 메뉴를 정하지 못해 고민이 될 때에는 일단 애성회관으로 갈 것이다. 보양을 위하여 한우 곰탕을 먹을 것인지, 더위를 식히기 위하여 장단콩 콩국수를 먹을 것인지는 식탁에 앉은 다음에 정하면 그만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맛 때문에 후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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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1 : 혹시 평어체에 불편함을 느끼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P.S.2 : 애성회관의 정기휴일은 매주 일요일입니다. 그 외 공휴일에도 쉬는 것으로 압니다.
from CV
from CV
본문에도 썼지만, 사실 식당이나 음식에 대해 평할 만한 입맛은 못 되어 페북에 흰소리나 늘어놓곤 합니다ㅜㅜ
한번 꼭 가 보십시오^^
기름기 많은 곰탕을 선호하시는 분들께는 어떻게 느껴질지 모르겠습니다만, 요즘 입맛에는 오히려 잘 맞는 곳이 아닐까 합니다.
from CLIEN+
곰탕 여러 종류가 있지만
제가 먹어본 곰탕중엔 최고입니다.
심플하죠. 국물과 밥, 소면, 고기 몇 점. 가격은 7,000원.
밥은 별로 안좋아하고 고기, 소면, 국물 좋아합니다.
국물이 좀 짜다는 의견도 있지만 저는 좋아합니다.
파 많이 넣어 먹는데 곰국엔 역시 파가 잘 어울립니다.
전에 데려간 친구 왈...'고기가 어쩌면 이렇게 부드러울 수 있어요?'라더군요.
맨날 삼겹살 싸구려 소고기만 먹다보니...ㅠㅜ
#CLiOS
글 진짜 맛깔나게 잘쓰십니다 ㅎㅎㅎ
#CLiOS
고기가 보기보다 두툼한 편이라 그리 적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일부러 찾아 갈 시간 안나면 메모 해 두었다가 ... 근처 지나 갈 때 꼭 한 번 들러봄직 하겠네요.
좋은 소개글 감사합니다.
혹시 차를 가져가시게 되면 가게 바로 앞에 노상 공영주차장이 있으니 거기를 이용하시는 게 좋습니다. (30분 3000원)
이노가시라 씨의 포스와 식탐(...)은 도저히 따라가기 어렵습니다ㅜㅜ;;
감사합니다. 콩이여 영원하라!
곰탕이 반 미친 인간이라...하얀집을 꼭 한달에 한번은 갑니다
여기도 서울 갈일 있음 꼭 가야겠어요!!!
아...제가 사랑하는 하얀집은...고기 양이 난리 납니다 ^^ 고기반 물반
호남 지역으로 출장 갈 기회가 생기면 어떻게든 한번 들러 보고 싶어지네요^^
같이 곁들여지는 수육 두점은 양보다 질의 만족감이 뭔지 확실히 보여주죠.
간장맛이 진해서 싫다고 하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그래도 좋아합니다.
from CV
꼭 가볼께요
#CLiOS
고
한번 가봐야겠네요.
#CLiOS
한번 시간내서 찾아가봐야겠습니다. 곰탕 7000원, 특 9000원인데 가격도 이만하면 저렴하죠.
from CV
점잖은 문체라 완전 빵터졌네요 ㅎㅎ
콩은 역시 까야 제맛
from CLiOS
ㅋㄲㅈㅁ ㅠㅠ *
저도 곰탕 좋아하는데 한번 들려봐야겠습니다. 가격도 저정도면 몹시 착한 수준이네요. *
기회가 되면 콩 국수도 맛보세요^^ *
여름 휴가때 한국에 가면 들려 봐야 겠어요. 울 아들도 곰탕 설렁탕 엄청 좋아라 하는데..암튼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전통의 기름지고 짠 스타일과
반대로 기름 다 빼고 싱거룬 스타일.
양 쪽 팬들은 점점 극과 극이 되어갑니다.
비에어컨 세대와 에어컨 세대로 나뉘어서.
이 집은 에어컨 세대 스타일인가 보네요.
from CLIEN+
예전에는 확실히 기름진 곰탕 한 그릇의 영양으로 더위나 추위를 이기곤 했었죠.
요즘은 저칼로리 식단이 인기이기도 하고, 냉난방이 잘 되는 곳이 많다 보니 기름진 음식의 인기도 예전만 못한 듯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