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색 배경의 자화상(Self-Portrait with Brown Background ) - 에곤 쉴레 (Egon Schiele)
인간의 뇌는 의식을 관장하고 육체적 인간으로서의 오감을 느끼게 하며 정신적 인간으로서 감성과 지성을 관장한다고 볼때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깁니다.
특정장기에 암이 생기기 시작하고 증식하여 타장기에 전이가 된다거나 다른 병이 시작될 때 육체의 사령탑인 뇌는 왜 그것을 못 느낄까요?
감정의 변화나 이성적 판단에 대한 인식이 빨리 되는 것에 비하면 신체변화에 대한 인지는 느린 이유가 있을까요?
의학의 관점에서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첫번째는 대부분의 내부 장기(간, 췌장, 폐 실질, 초기 대장 점막 등)에는 통증을 전달하는 신경종말이 거의 없거나 덜 촘촘하게 분포합니다. 반면 피부는 아주 치밀합니다.
그래서 같은 크기의 조직 손상이라도 피부에 난 상처는 즉각 느껴지지만, 간이나 췌장 안에서 자라는 종양은 피막(capsule)을 밀어내거나 주변 신경총을 압박할 정도로 커지기 전까지는 통증 신호 자체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통증이 늦게 온다기보다, 애초에 신호가 만들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성장 속도와 역치의 문제입니다. 암세포 증식은 대개 세포 하나 단위가 아니라 수개월~수년에 걸친 지수함수적 성장입니다.
신경계는 급격한 변화(급성 염증, 허혈, 파열)에는 민감하지만, 매우 완만한 변화는 "배경 잡음"으로 처리해 의식 위로 올리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건 뇌가 예측 오차(prediction error)가 클 때만 신호를 의식화하는 예측부호화(predictive coding) 모델과 일치합니다.
서서히 변하는 것은 뇌의 "정상 기준선" 자체가 같이 이동해 버려서 이상 신호로 잡히지 않는다는 이론입니다.
세번째로 뇌의 여과 기능(gating) 자체가 진화적으로 의도된 설계라는 점입니다. 내수용감각(interoception) 전체가 의식에 다 올라오면 우리는 심장박동, 소화, 혈압, 체온 변화 하나하나에 압도되어 정상적인 인지·행동이 불가능해집니다.
그래서 시상하부·뇌간·섬엽(insula) 수준에서 대부분의 항상성 신호는 자율신경계 수준에서 처리되고, 의식은 정말 "문제가 생겼다"는 결론이 난 신호만 나중에 보고받습니다.
즉, 뇌는 너무 많은 신체 신호를 의식에 올리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고 뇌는 사령탑이라기보다 ‘늦게 보고받는 왕’ 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DNA수준에서 죽음을 향해 매순간 다가가며 체세포복제의 제한이 있는 생명체인 인간의 생명시계의 의도적 작동원리중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체를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인간의 육체가 물질이고 그것을 관장하는 의식 또한 물질, 예로 양자파동이라면 이 양자역시 아원자영역의 일부로서 신체세포 단위의 변화, 예로 암세포의 발생, 증식, 전이와 파동으로 연결될 텐데 육체의 주인인 의식이 암의 발생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까요?
의식이 의도적으로 생명의 미세변화를 외면(관찰자효과의 부재)하는 것일까요?
로저 펜로즈나 하메로프는 미세소관 내부의 특수 환경(물 분자의 정렬, 마취제 결합 부위 등)이 이 결맞음을 보호할 수 있다고 반박하며 의식의 양자파동을 강조하지만 물리학자 맥스 테그마크의 계산에 의하면, 뇌처럼 따뜻하고 습한 환경에서는 양자 결맞음(coherence)이 10^-13초 단위로 즉시 붕괴되기 때문에, 신경활동이 일어나는 밀리초~초 단위의 시간 척도에서 양자 효과가 유의미하게 작동하기 어렵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의식이 양자파동과는 무관한 에너지의 흐름이기 때문일까요?
인간의 의식과 육체가 상호의존 및 상호보완적인 관계라면 위의 의문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습니다.
진화의 작동원리는 종족보전과 전달에 기울어져 있으며 개체의 번식이 끝나면 생명의 지속에는 제한이 있다 하지만 수백만년을 통하여 진화를 거듭해 온 최상위 고등생명체인 인간에게는 육체를 보전하기 위한 더 치밀한 의식의 방어기제가 있어야 합니다.
의식의 변화가 신체에 영향을 미치는 예로 "위약효과"의 효용성은 이미 입증된 바 있으며 이것은 의식이 육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증거이며 기타 후생유전학적 다수의 증거가 존재합니다.
결국 다음의 의문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인간의 의식은 육체에 완전히 종속된 것인가, 아니면 육체를 통해 일시적으로 표현되는 더 큰 무엇인가?
인간이 "나" 라는 자아를 붙들고 살며 죽는 그 순간까지 인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인간 육체의 근원적 한계를 인정한다면 두개골내의 의식은 단지 일시적 위임관리자이자 관찰자의 역할에 불과하며 그 이상의 초월적 에너지가 있으리라 추측해 봅니다.
모든 인간의 의식의 밑바닥에 초월적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원초적 그리움이 존재한다는 것이 그 증거가 될수 있습니다.
인간 안에는 육체 보존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초월의 그리움이 있고, 그 그리움은 결코 하찮은 착각이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이 자신의 한계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욕망너머에 무언가 존재한다는 의미이며 원초적 기억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종교체험이나 깊은 명상에서 자아 중심의 전두엽 활동이 줄어들고, 대신 전체성과 연결감이 강해지는 현상은 여러 연구에서 확인됩니다.
이것은 “나”라는 경계가 희미해지는 순간, 의식이 더 넓은 장과 연결될 수 있다는 증거로 볼 수도 있습니다.
나를 의식하는, 나란 베일을 걷어내면 전체를 만난다는 것입니다.
마치 불교에서의 무아와 해탈의 개념과 일치하는 지점입니다.
육체는 이 물질 세계에서 유한한 생명을 경험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대여한 '양자적 구속 장치'이며, 뇌는 그 구속 장치 안에서 시공간의 문법으로 세상을 인식하게 돕는 하드웨어일 뿐일 수도 있습니다.
정말 자유롭게 상상해도 된다면 — 저는 의식이 위임관리자 라기보다 "번역기"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초월적 에너지가 있다면, 그것이 인간의 신경계라는 아주 좁은 대역폭을 통과하면서 시간·공간·인과율이라는 문법으로 강제 번역된 것이 지금 우리가 "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상상입니다.
번역기는 원문을 만들지 않습니다.
다만 원문이 있어도 번역기가 고장 나면(죽음), 그 순간 번역된 텍스트(우리가 아는 '나')는 사라지지만 원문 자체가 사라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즉, 육체는 의식의 임시 거처일 가능성이 높고, 죽음은 거처를 떠나는 것이지, 의식 자체의 소멸은 아닐 수 있습니다.
이같은 의문에 대한 답은 누구에게 부터도 주어지지 않았고 가능해 보이지도 않는 영원한 숙제입니다.
결코 불가지론자는 아니었던 고다마 싯달타는 이 또한 번뇌요 고통이라 하시겠지요.
* 출처: A Bolg for StarFairyBaby ( https://blog.naver.com/manumoon/224340773230 )
영혼의 관점이고 마니교적이기도 합니당.
저도 이 모든게 실재의 은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요즘 하고있어요.
저는 종교적 신화적 베이스에서 찾고있어서 조셉캠벨과 칼융을 많이 뒤지는 편이에요.
죽음과 삶. 모두가 찾고있는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화이팅입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