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알약 계수기를 개발하던 시절 이야기를 꺼내려면, 먼저 그때의 답답함부터 털어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시 저희가 구현하고 싶었던 기능들, 도입하고 싶었던 부품과 장비들이 분명히 존재하긴 했습니다. 다만 문제는 가격이었습니다. 조금만 제대로 된 사양을 갖추려 하면 부품 하나에 1,000달러를 훌쩍 넘겼고, 그나마도 전문 산업용 시장에나 유통되는 물건들이었습니다. 스타트업이 소량으로 시제품을 만드는 입장에서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구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엔 가능한 범위 안에서 타협을 거듭하며 개발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습니다.
2025년, 저희는 피벗 버전 2의 재개발을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일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엄두도 못 냈던 그 부품들이 이제는 현실적인 가격대에 구할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기술의 대중화라는 것이 이런 식으로 찾아오는구나 싶었습니다. 저희가 첫 개발 당시 "이게 있으면 좋겠다"고 노트에 적어두었던 것들을 이제는 실제로 손에 쥘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재개발을 준비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장도 다시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눈에 띄는 점이 있었습니다. 비전 기반 알약 계수기를 개발한 업체들 대부분이 한국 시장보다는 미주 시장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부 업체는 결국 소프트웨어만으로는 한계를 인식했는지, 하드웨어를 결합한 형태의 제품을 내놓기 시작했습니다.
역설적이었습니다.
저희가 처음부터 하드웨어 개발을 선택했을 때, 주변에서는 굳이 그 어려운 길을 가야 하느냐는 시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장이 결국 그 방향으로 수렴하고 있었습니다. 애초에 저희가 선택한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시장이 스스로 증명해주고 있었습니다.
이쯤에서 투자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전 같으면 TIPS나 각종 투자자 연결을 타진해볼 시점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은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방향성이 옳았다는 확신이 생긴 이상, 저희 힘만으로 최종 시제품을 완성해냈고, 그 결과물이 손에 있습니다. 지분을 나누고 외부의 간섭을 받아가며 진행할 이유를 찾지 못하겠습니다. 개발의 주도권은 끝까지 저희가 쥐고 가려 합니다.
제품은 알약계수기와 제포기 두 가지를 순차적으로 출시할 예정이고, 가격은 각각 350만 원으로 정했습니다.
저항이 있을 거라는 걸 압니다. 시장에는 이미 무료 앱들이 있고, 스마트폰 카메라로 약을 세는 것으로 충분한 약국이나 병원이라면 솔직히 저희 제품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따금씩 카운팅이 필요한 정도의 업무량이라면, 다른 대안으로도 충분하다고 저희도 생각합니다.
저희 제품이 필요한 곳은 다릅니다. 약국 문을 열 때 제품을 켜고, 업무가 끝날 때 끄는 곳. 업무시간 내내 대시(dash) 상태로 언제든 즉시 사용 가능해야 하는 환경. 카운팅이 루틴의 일부인 곳. 그런 약국을 위한 제품입니다.
그리고 이번 피벗 버전 2를 자신 있게 소개할 수 있게 된 데는, 실시간 카운팅에 대한 철학적 접근의 차이가 결정적이었습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많은 제품들을 보면서 저희와 근본적인 시각 차이를 느꼈습니다. 핵심은 이겁니다. 사람이 트레이를 흔들었을 때와 흔들기 전의 결과값이 달라진다면, 과연 누가 그 기능을 신뢰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같은 알약, 같은 트레이인데 측정할 때마다 숫자가 달라진다면 그것은 계수기가 아닙니다.
저희의 기본 원칙은 분명합니다. 심하게 뭉쳐져 있다면 결과값을 표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판독 불가 상태에서 숫자를 내보내는 것보다, 작업자의 개입을 요청하는 것이 훨씬 정직한 동작입니다.
이 원칙을 하드웨어 설계에도 그대로 녹여냈습니다. 이번 버전에서는 트레이의 벽면을 충분히 높게 설계하여, 작업자가 높은 위치에서 알약을 부어 넣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뭉침이 해소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알약이 트레이에 쏟아지는 순간 미세한 진동을 흘려보내 알약끼리 달라붙는 현상 자체를 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뭉침이 감지되면, 결과값을 표시하기 전에 상황에 맞는 추가 진동을 주어 스스로 해결을 시도합니다. 그래도 해결이 되지 않을 만큼 심각한 뭉침이라면, 해당 위치를 화면에 표시하여 작업자의 개입을 유도합니다. 숫자는 그 이후에 나옵니다.
실제 테스트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탑을 쌓듯 알약을 한 곳에 억지로 뭉쳐놓지 않는 이상, 작업자가 손으로 직접 뭉침을 해결해야 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장비가 할 수 있는 것은 장비가 하고, 그래도 안 될 때만 사람을 부르는 구조입니다. 저희가 생각하는 신뢰할 수 있는 계수기의 모습이 바로 이것입니다.
5~6년 전에 저희가 구현했던 기술들을 지금의 앱들이 여전히 구현하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그리고 초기엔 생소했던 비전 알약 계수기에 대한 시장의 이해도가 그사이 충분히 높아졌다는 걸 보면, 이제는 저희 제품을 실제로 보여줬을 때 그 차이를 명확하게 느낄 수 있는 시장이 만들어졌다고 봅니다.
많이 팔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다른 업체들이 한국 시장보다 미국 시장에 집중하는 것을 보면, 한국 시장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이미 정해진 결론처럼 보입니다. 저희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대신 현실적인 목표를 세웠습니다.
팀원들이 이 프로젝트가 마무리된 이후에도 향후 5년간 유지보수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수량. 우선은 500대를 목표로 합니다. 팀원 중 한 명이 제품을 직접 들고 테스트를 원하는 약국들을 방문하는 방식으로 판매할 생각입니다. 유통 채널을 통하지 않고, 저희가 직접 문을 두드리는 구조입니다.
500대 기준으로 제품당 생산 원가는 약 1,400달러, 대략 200만 원 수준이 됩니다. 판매업체가 아닌 개발업체 입장에서 소량 생산에 50% 미만의 마진을 붙이는 구조가 썩 좋은 비즈니스 모델은 아닌 걸 압니다. 그렇지만 저희의 심리적 마지노선이자 시장에 제시할 수 있는 가격은 350만 원입니다.
현재 국내에 수입 판매되는 레이저 투과 방식의 구형 알약 계수기가 800만 원을 넘는 점을 감안하면, 저희는 훨씬 새로운 기술을 절반 이하의 가격에 내놓는 셈입니다. 그 점에서는 충분히 매력적인 제안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돌아보면 긴 시간이었습니다.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데 이렇게 오래 걸렸지만, 그 확신을 가지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은 꽤 든든한 일입니다. 이제 남은 건 만들어낸 것을 세상에 보여주는 일입니다. 지금 제품은 워킹 목업 제품입니다. 정식 예약 구매를 받게되면 성형사출을 할 예정이라 디자인이 변경될것입니다. 그리고 자잘이 눈에 보이는 버그들도 수정할 예정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댓글로 남겨주세요.
약국 개업 패키지 같은데에 포함시키는 방안 등등
현실적으로 혼자 전국 커버하기는 어려우실텐데
데모는 팀원 중에 한 분이 하시더라도
영업 채널 자체는 넓히시는게 낫지 않을까요?
저도 항상 응원하고 있습니다.
CSO 대상으로 하는 오픈플랫폼 같은 곳에
제품을 등록해서
프리랜서 영업망을 활용하는 방법도 검토해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 쪽은 총판이나 레퍼런스요구 같은게 없어서 상대적으로 초기진입은 쉬운듯 합니다.
읽는 내가 긴장되네요..
대단하십니다..
저걸 기획부터 다 하시는 거보고 대단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낼 거라 믿으며,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