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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광주~서울 도보여행기 6. 포비아 [광주~서울 그 속도로]

3
2026-03-06 23:13:21 수정일 : 2026-03-13 21:17:38 124.♡.6.11
lomoman

6. 포비아


담양호 국민관광지 카페촌 앞 벤치에 배낭을 부렸다. 

물도 펜도 수첩도 떨어졌지만, 

틈틈이 충전한 휴대전화 배터리는 93퍼센트였다. 


나는 노트 앱을 켜고 글을 썼다. 

하지만 매번 휴대전화로 메모했다간 

배터리가 남아나지 않아, 

정작 길을 찾아야 할 때 못 쓸 수 있다. 

펜과 수첩이 필요했다. 

지도 앱에 나온 제일 가까운 편의점은 29km. 

게다가 목이 말랐다. 

벤치 뒤쪽에 갓 지어진 현대식 3층 건물, 

‘카페 글리제’가 눈에 들어왔다. 

유리로 된 미닫이문 안쪽에는 

40대 남녀가 앉아 있었다. 


회색 후드티를 뒤집어쓴 

소금에 절인 배추 같은 나의 등장에 

여자의 동공은 침입자를 감지한 

공작 깃털처럼 커졌다.


"혹시 물 있나요?"


나는 거지는 아니라는 듯 신용카드를 만지작거렸다.


"물은 안 파는데, 그냥 드릴게요."


내 행색이 측은했을까? 

그녀는 냉장고에서 

아이시스8.0 500mL를 하나 꺼냈다.


"아. 아니에요. 저도 돈 있어요."


나는 황급히 진열대를 봤다. 

뭐라도 사야 할 것 같았다.


"이거, 프리챌 하나 주세요."

"안 사셔도 돼요."

"뭘 먹기도 해야 해서요."


내 삼성카드는 그녀의 손을 지나 

카드단말기에 결합했다. 

그제야 남자는 주방으로 들어갔다. 

남자가 프리챌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여행에 관해 이야기했다. 

정적을 견딜 수 없어 무엇이라도 해야했다.


광주에서 서울까지 가는데, 

오늘이 첫날이고, 잠은 밖에서 잔다고 했다. 

몇 분 후 남자는 따뜻한 촉감의 종이봉투를 내왔다.


"여기요. 그리고 군고구마인데, 드셔 보세요."


엉겁결에 프리챌과 군고구마 꾸러미를 손에 쥔 

내게 그가 물었다.


"텐트는 쳐봤어요?

"아직이요. 유튜브 보면서 치려고요. 

군대에서 해봤으니, 뭐 어떻게 되겠죠? 하하"

"겨울에 걷는 거 힘들 텐데…."


남자는 걱정하는 눈빛으로 창밖을 봤다. 

다섯 시, 바깥 빛은 점점 바래지고 있었다. 


명절날 아들을 돌려보내는 노파처럼 

무언가 계속 손에 쥐여주는 주인장 때문에 

나는 출입구 키오스크로 갔다.


"그럼 커피도 하나 살게요."


여자는 안 그래도 된다고 연거푸 말했지만 

나는 그래야 마음이 편했다.


"남편이 대학 때 산악회였어요. 

그래서 마음이 가나 봐요."


그녀는 먹을 것 말고도 

포스트잇과 모나미 153 볼펜도 주었다. 

하루치 목숨과 하루치 기억을 배낭에 욱여넣었다. 

곧 해는 산등성이로 넘어갈 것 같았다. 

서둘러야 했다. 

등산 스틱을 다시 앞뒤로 힘차게 휘둘렀다. 


4km를 걷고, 걸터앉은 용치마을회관. 

굴뚝마다 새어 나온 연기가 

마을 저녁을 뿌옇게 덧칠했다. 

해는 추월산을 넘어갔지만, 

나는 산 하나를 더 넘어야 했다. 

남은 거리는 3.6km.


'한 시간이면 되겠지?'


섣부른 나는 남은 산길을 얕잡아 봤다. 

지도 위 남은 경로는 똬리를 틀고 있었고,

그 굽이진 한복판은 가파른 오르막이 버티고 있었다. 

나는 지게 진 나무꾼이 하던 대로 

허리를 고꾸라트리고 지팡이로 바닥을 짚었다. 

경보 선수처럼 다리를 재빨리 옮겨도 봤지만, 

정상은 쉬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기력이 쇠하면, 

지팡이에 기대어 선 채로 쉬었다.

오를수록 쉬는 주기도 짧아졌다. 

달빛조차 드문 그믐, 다니는 차도 없었다. 

무서웠다.


귀신은 두 지팡이로 냅다 십자가를 만들어 보이면 

줄행랑을 칠 것이고, 

떡 달라는 호랑이에게는 

대신 군고구마로 이번 고개는 물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굶주린 멧돼지 퇴치법은 

'은비까비의 옛날옛적에' 어느 편에도 없었다. 

얼른 고개를 넘는 수밖에.


쉬다 걷기를 수십 번, 

오르막 경사가 완만해지더니 드디어 천치재 정상. 

전남과 전북의 경계인 천치재 너머는 

마트 고추장 판매대에서 본 순창이었다. 

길 가장자리 복흥포도농장 가판대에 

배낭째 널브러졌다. 

온몸이 땀범벅인 채 가쁘게 숨 쉬는 나는 

귀신도, 호랑이도, 배곯는 멧돼지마저도 

거들떠보지 않을 만큼 쉰내 나고 

물러터진 거봉 같았다.


발바닥은 몰매 맞은 볼기짝처럼 몹시 욱신거렸다. 

어기적어기적, 

목적지 답동삼거리로 내려왔다. 

'늘한식' 식당과 '늘까페'가 붙어 있었다. 

밥 먹고 입가심으로 차를 마시는, 

주인입장에서 일타이피 혹은 

일거양득으로 치밀히 설계된 코스였다. 

하지만 주인의 기대를 저버리고 

나는 곧장 늘까페로 갔다. 

식당은 한우버섯불고기 같은 전골 위주라 

혼자 먹을 만한 게 없기도 했다.


“블루베리 베이글이랑 고구마라떼 주세요.”


폐점 시각 8시까지는 한 시간. 

손님이라고는 50대 남자 둘과 여자 하나로 된 

한 팀이 전부였다. 

전기난로 앞에 배낭을 내려놓고, 

콘센트를 찾을 요량으로 

카페 안을 기웃거렸지만 없었다. 


열렬히 불타는 난로 꽁무니에 달린 선을 

눈으로 따라가니 손님들 탁자 아래 멀티탭이 있었다.


"아유. 죄송합니다."


나는 다짜고짜 테이블 아래로 몸을 구겼다. 

2구 멀티탭에는 난로와 선풍기가 연결되어 있었다. 

철도 모르고 뻘쭘히 서 있는 선풍기 코드를 뽑고, 

휴대전화 충전기를 꼽았다. 


손님들은 잠시 대화를 멈추었다, 

다시 시작했다. 

내게 부끄러움 따위는 바닥난 지 오래였다. 

휴대전화는 어둠 속 길잡이 이자 

내 목숨 줄이었으니까.


배낭에서 지도를 인쇄한 A3 종이를 꺼내, 

뒷장에 모나미 153으로 일기를 적어 내려갔다. 

깡그리 잃어버린 수첩을 대체하려고, 

기억 속 어제를 더듬고 오늘을 뒤적였다. 

옆 테이블 아저씨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 여행해요?"

"예, 광주에서 서울까지 걷고 있어요. 오늘 첫날이에요."


베이글을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그는 내 무모함에 알은체했다.


"그라믄 한 보름 걸리겠네요?"

"네. 그 정도 걸릴 것 같은데, 

부지런히 걸어서 9일 안에는 가려고요."


결혼은 했냐, 아이는 있냐, 

이어진 호구조사가 끝나고, 

그는 다시 일행의 대화로 옮아갔다. 

나도 종이 위로 다시 펜을 끄적였다. 


무서웠다. 

잃는 것이. 

길 위에서 사라지는 육신만이 아니라, 

길바닥에 나뒹굴다 흩어지는 기억들마저도. 

그래서 더 악착같이 적었다. 

악독하게 걸었던 하루를. 


여덟 시, 마감 시간이 됐다. 

자리에서 일어난 아저씨는 

빡빡하게 적는 나를 흘긋 보며 말했다.


"성공하겠네."

"네?"

"여행 말이에요. 가만 보니 성공하겠어요."


기억을 잃는 게 두려운 사람이 

편집증적으로 휘갈긴 문자의 고랑 사이에서 

그는 어떤 성공의 증거를 발견했을까?


오후 산 중턱 버스정류장에서 쉴 때였다. 

회사 동기 단톡방에 새 글이 떴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의례적 메시지. 

나는 여행 이야기를 적을까 했지만 참았다. 

실패하면 우스운 사람이 될 것 같았다. 

고작 길에서 만난,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만 이야기했다. 

심지어 아내와 딸, 다른 가족들도 몰랐다. 

‘성공한 다음에 알려줘야지.’ 

난 실패를 무서워한 겁쟁이였다.


텅 빈 카페, 배낭을 둘러멨다. 

이제 다음 교시 시험을 치를 차례. 

영하의 추위에 어디서 자야 할지, 

별빛 하나 없는 하늘처럼 캄캄했다.


전북 순창군 복흥면 답동. 

어떤 풀이도 틀리지 않고 모두 정답인, 

이름마저 너그러운 산속 동네. 

그래서였을까? 

나는 빈 답안지를 들고 있었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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