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처음 해본 이야기
광주 지도가 끝났다.
영산강 너머는 보잉747 활주로만큼
길게 뻗은 농사용 도로가 평야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길옆으로 ‘삼지’라 쓰인 이정표가 어슷했다.
이곳 이름이 삼지인가?
농로 끄트머리는 한 무더기 집들이
모듬지어 있었고,
나는 그 한복판 파란 천막을 두른 평상에 앉았다.
CU편의점에서 산 ‘쫀득편육’ 포장지 끝을
양손으로 비틀었다.
느닷없이 석방을 선고받은 편육 조각이
찢긴 틈새로 화들짝 뛰쳐나왔고,
나는 겨우 입으로 눌러 막았다.
엉겁결에 입속으로 들어온 눌린 돼지고기는
꼬들꼬들 고소했다.
추운 날에도 마실을 일삼는 삼지마을 할머니들은
행차 때마다 유모차를 앞세웠다.
그녀들은 유모차를 밀다가
때때로 그 위에 앉아 쉬었다.
내가 그들 코 앞으로 스쳐 갈 때
이방인에 대한 경계심인지, 돼지 누린내인지,
아침 해의 눈부심인지 모를
잔뜩 찌푸린 얼굴로 나를 맞았다.
내가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예에. 어디까지 가시당가?"
무리의 선봉, 주황 점퍼 할머니가 말했다.
"서울까지 걸어 가요. 오늘이 첫 날이에요."
"어째 친구랑 안 가고 혼자 가분디?"
"아유, 생각해 봐요. 누가 같이 하겠어요?"
"그라네, 참말로. 히히히"
유모차를 깔고 앉은 할머니들의 웃음은
까무룩, 풀숲에서 날갯짓하는 까투리 같았다.
그들은 평야의 안온함에는 심드렁했지만,
서울까지 같이 걸어갈 친구 하나 없는 여행객에겐
영구치에 씌운 금박을 반짝이며
호기심을 온통 드러냈다.
봉산농협 하나로마트에 들어갔다.
당분간 편의점이 없어
간식용 소시지나 햄을 살 작정이었다.
하지만 없었다.
그냥 나갈까 다른 대체품이라도 살까,
망설이는 사이 할머니 둘이 젊은 남자 점원에게
진간장 위치를 물었다.
점원은 나긋나긋
‘두 번째 선반 중간’을 정확히 지목했고,
할머니들은 젊은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친절하냐,
고 연신 칭찬했다.
그녀들에게 딸이 있다면
그를 당장 사위로 들일 기세였지만
그 딸들도 죄다 쉰이 넘은지라,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뛰어든
일일연속극 가난한 여주인공의 엄마라도 된 양
탄식했다.
나는 실시간 드라마를 청취하며,
CJ제일제당 찌개두부 한 모를 계산대에 올려놓았다.
마트를 나와 이 백여 미터를 걷는데,
남색 조끼를 입은 학동슈퍼 아주머니가 불렀다.
"커피 한 잔 혀고 가요."
나는 아니겠지?
혹시 뒷사람을 보고 말했을까,
돌아보았는데 아무도 없다.
그렇다.
그녀가 귀신을 보는 능력이 없는 한,
분명 나를 보고 말한 것이었다.
출발한 지 5분도 안 되어,
또 쉬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아주머니의 호의를 무시하기엔
그녀의 손이 무척 빨랐다.
그녀는 냅다 맥심 모카골드 봉지를 뜯었다.
슈퍼 평상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다,
대뜸 받은 배려가 문득 고마워
물메기 어포를 샀다.
시골까지 침투한 중국산.
하지만 어떠랴.
황해를 헤엄치다 운 나쁘게 잡힌 게
중국 어선이었을 뿐.
"만 사천 원인데 천 원 깎아줄게."
"현금이 없어서 입금해 드릴게요."
그녀가 식탁 위에 명함을 뒤집고 딴청 부리는 동안,
나는 휴대전화로 명함 뒷면 농협 계좌번호에
숫자를 집어넣었다.
"정금실 맞으시죠? 입금했어요. 확인해 보세요."
금실은 계좌를 보는 대신
예전에 봤다는 다른 도보 여행자 이야기를 꺼냈다.
나 말고 정신 나간 사람이 또 있을까 신기해
언제 다녀갔냐 물었더니,
금실은 꽤 오래 전이라고 얼버무렸다.
출발하려고 벌렁 누운 배낭을 당기자,
금실은 얼른 털신을 벗고 평상에 올라가
배낭 끈에 내 팔을 잘 꿸 수 있게 잡아 주었다.
나는 잘 먹었습니다, 인사하고 담양으로 걸었다.
뱃속은 걸음 마다 믹스커피의 온기로 찰랑거렸다.
길에서 만난 면식 없는 사람들과 처음 해본 이야기.
인스턴트커피만큼 짧았지만
이상하리만치 따뜻하고, 달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