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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문화 광주~서울 도보여행기 1. 나는 왜 나를 사랑하지 않을까? [광주~서울 그 속도로] 4

6
2026-03-02 00:27:50 수정일 : 2026-03-13 21:15:44 124.♡.6.11
lomoman

1. 나는 왜 나를 사랑하지 않을까?


딱 한 번 가는 여행인데 뭐 하러 비싼 걸 사? 

알량한 현실주의자는 오늘 주문하면 내일 오는 

초고속 쇼핑 시대에, 

2주나 걸리는 중국발 네이처하이크 배낭을 

순전히 가격 때문에 골랐다. 

실패의 매몰 비용과 재도전의 불확실성 때문이었다. 

여행 전날 방물장수 좌판인 양 널어놓은 짐을 

하나하나 집어 가며, 꼭 필요한지 자문했다. 


텐트, 바람을 피해야 하잖아? 

침낭, 잠은 자야지. 핫팩, 추운 건 싫어. 

보조배터리, 콘센트 없으면 휴대전화 충전은 어떻게 해? 

양말과 속옷. 하루에 한 번은 갈아입어야지. 

배낭은 검문을 통과한 물건을 꾸역꾸역 집어삼켰고, 

합산 18kg의 중력이 어깨를 짓눌렀다.


2025년 1월 24일 밤 10시. 

금호고속 우등 버스는 강남 센트럴시티에서 

광주 고속버스터미널까지 세 시간 반 만에

(금강휴게소에서 화장실 다녀오는 길에 

핫바를 사 먹고도 남는 20분을 쉬었음에도) 도착했다. 


세 시간 반 거리를 8일이나 가야하다니! 

이런 비효율적인 행태에 개탄을 금치 못하며 

버스 계단을 내려온 나는 화물칸에서 배낭부터 찾았다.


야밤의 유스퀘어 택시승강장, 손님은 금방 줄었다. 

연로한 기사가 탄 택시가 섰다. 

배낭이 워낙 커서 튀어나온 트렁크를 

팔꿈치로 눌러 닫았다. 

기사가 먼저 물은 것도 아닌데, 

광주에서 서울까지 걸어갈 거라고 내 속셈을 털어놨다. 

속으로 그가 나를 대견해하기를 기대했지만, 

그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자전거를 타고 가시지." 

"그건 흔하잖아요." 


흔치 않으려면 호랑이 걸음이나 

뒷걸음질을 하는 게 옳았다. 

그러나 내 목표는 '세상에 이런 일이' 출연이 아니었기에 

노숙하며 걷기로 타협했다. 


비보호 유턴 표지판 앞에서 차량을 살피던 기사는 

은근한 말씨로 한국에서 의사를 하다 

뉴질랜드로 이민 간 친구 이야기를 했다.


"친구가 뱅기 표만 끊어 오믄, 

다 재워줄랑게 놀러 오라 그라는디, 

이 택시 놀리고 으디 갈 수 있으까요?"


우정을 찾으러 훌훌 떠나지 못하는 택시 기사나, 

남다른 여행을 한다며 배불뚝이 배낭을 메고 걷는 나나, 

왜 우리는 자신을 몰아세우는 걸까?


택시에 탄 지 십 분. 

목적지, 광주시 북구 두암동 568-14번지 

뉴욕호텔에서 내렸다. 

삼십 년 넘은 외벽을 새하얗게 칠해놓고, 

만국기를 늘어뜨린 한 동짜리 건물은 

이름만이라도 호텔이고 싶었다. 

세로로 쭉 늘어진 주차장 가림막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갔다. 

카운터는 비어 있었다. 

고개를 어리바리 두리번대자, 중년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앱으로 예약하셨죠잉?" 

어떻게 알았지? 나는 부처님 손바닥 안 손오공이었다. 

"키 가져가세요. 2층으로 가면 됩니다잉." 


벽에 난 창문에서 카드키가 튀어나왔다. 

나는 예약자임을 증명하려 

여기어때 앱 화면을 떳떳하게 흔들었지만, 

창문 속 석가모니는 무심히 커튼을 닫았다.


'띵'

엘리베이터가 1층에 왔다. 

경쾌하고도 육욕적인 차임벨 소리에 

성인 둘이 찰싹 붙어야 겨우 탈 수 있는, 

없던 정분도 들끓을 만한 공간이 열렸다.


202호. 

더블 사이즈 침대에 앉아 편의용품 지퍼백을 열었다. 

쌍쌍이 들어 있는 칫솔과 치약을 하나씩만 빼고, 

나머지는 배낭에 욱여넣었다. 

공짜로 준 것을 두고 가는 건 손해 같았다. 

그런데 콘돔은 어쩌지? 


헬륨가스를 채워 배낭에 매달면 짐이 좀 가벼워지려나? 

알뜰한 나는 망측한 물건의 마땅한 사용처를 고민하다 

탁자에 그대로 두었다. 

사랑할 사람끼리 유용하게 쓰라고. 

내가 못 쓸 것이지, 몹쓸 것은 아니니까. 

사랑은 잘못이 없다.

lomoman 님의 게시글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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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4]
명탐정코란
IP 218.♡.118.251
03-03 2026-03-03 16:22:26
·
와.. 필력이 좋으시네요...

잘읽고 갑니다... ㅎㅎㅎ
lomoman
IP 124.♡.6.11
03-05 2026-03-05 20:20:19
·
@명탐정코란님 여기도 감사합니다~~~
DSCi
IP 211.♡.172.53
03-16 2026-03-16 08:28:33
·
동년배 같은데 공감이 되네요. 필력이 좋으십니다. ㅎㅎ
lomoman
IP 106.♡.3.22
03-16 2026-03-16 19:37:43
·
@DSCi님 칭찬 감사합니다~~~ 열심히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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