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강력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
소년 마히토는 전쟁 중 폭격으로 인한 화재로 어머니를 잃습니다. 전쟁의 포화를 피해 도쿄 근교로 이사를 가자 이모가 마중 나옵니다. “어렸을 때 너를 보았다"고 말하는 이모는, 이윽고 “내가 너의 새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얼마 뒤에 태어날 마히토의 동생을 임신하고 있습니다. 마히토는 여행의 피로와 상황의 혼란함을 굳건히 견디는 아이이지만, 이모이자 어머니인 나츠코에게만큼은 어색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대로 된 대답조차 하지 못하는 마히토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잠에 들고 맙니다.
전쟁으로 아이들이 교육은 커녕 전쟁물자를 위한 공역에 시달려야 하는 상황입니다. 아버지는 “아빠 차를 타고 가면 촌동네 애들이 놀랄 것"이라 생각하지만, 혼자만 깨끗한 옷을 입고 나타난 부잣집 아들 마히토가 아이들에게 달가울 리 없습니다. 학교에 간 첫날부터 싸움이 붙습니다. 마히토는 크게 다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만, 집에 돌아가는 길에 길가의 돌을 주워 자신의 머리에 자해를 합니다. 아마도 다음날 아빠가 해 줄 말을 기다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학교에 가지 않아도 돼. 300엔을 기부하니 교장이 놀라더구나.”
1.
위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 초반부는 상대적으로 천천히 진행됩니다. 사실상 기승전결과 서사가 존재하지 않고, 환상적인 이미지만이 연속되는 중반 이후를 고려하면 답답할 정도로 느립니다. 그러나 저는 이 부분이야말로 이 작품의 뿌리와 같은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마히토의 마음을 이해해야만 환상 세계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마히토의 모험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는, 애초에 그 모험의 주체인 마히토가 세상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이모와 결혼했고, 이모는 사촌이자 동생을 임신하고 있습니다. 학교의 아이들은 전학 온 마히토에게 첫날부터 괜한 싸움을 붙습니다. 대도시를 떠나와 새롭게 살게 된 곳은 거창한 숲과 (어린아이의 눈에는 꽤 무섭게 보일) 할머니 일곱 명과 함께입니다. 한편 바깥 세상은 전쟁 중인 곳에서 아이 하나가 세상을 정합적으로 이해할 리 없습니다. 이걸 받아들인다면, 저는 작품 중반부의 이야기들이 합리적으로 읽힐 수 있는 실마리가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마히토의 모험은 세계를 이해하고 성장해 나가는 인간에 대한 긍정이자, 하나의 은유적인 이야기라고 여깁니다.
마히토에게는 어머니의 그림자가 짙게 배어 있습니다. 처음 나츠코와 집으로 들어온 날, 피곤에 지쳐 골아떨어진 마히토는 불타고 있는 어머니의 꿈을 꿉니다. 그런 마히토에게 나츠코가 곱게 보일 리 없습니다. 영화의 중후반부까지, 마히토는 나츠코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 그녀를 구하려고 하느냐는 질문에 “아버지가 그녀를 좋아한다"고 말할 뿐입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왜가리가 찾아와 말합니다. “네 엄마는 살아 있어. 인간들이 주로 쓰는 수법이지.” 왜가리의 목소리는 마히토에게만 들립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왜가리가 어머니의 죽음과 이모의 새어머니화(?)를 부정하고 싶은 마히토의 마음이라고 읽습니다. 너무나 매혹적이지만, 실상 모래성에 불과한 마음입니다. 왜가리가 보여준 어머니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확인했지만, 마히토는 자신만의 환상과 이해로 세상을 보고 싶은 마음을 접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 속으로 ‘녹아 내려가' 자신만의 이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2.
우리는 세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 세계관은 근거 없는 믿음과 환상, 비약을 통해 구성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가령 저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관계에 대해 얼마나 제대로 이해하면서 2023년에 일어난 사태를 지켜보고 있을까요? 제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지식을 바탕으로 여러 상(像)을 떠올리며 이해하려고 들지만, 사실 굉장히 빈약할 것이 뻔합니다. 고작 누구는 나쁘고 누구는 착하고 그런 수준이겠죠. 마히토가 처음 도달한 세계 또한 그렇습니다. 마히토는 어머니의 환상을 만들어낸 “끔찍한” 왜가리를 응징합니다. 착한 정령을 나쁜 펠리칸이 잡아먹습니다. 그렇기에 펠리칸을 내쫓기 위해 뿜은 불꽃이 정령들을 태우자 마히토는 분노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그 환상들이 있어야만, 그 무논리와 비약이 있어야만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마히토는 불꽃을 쏘지 않았다면 펠리칸이 정령을 모두 잡아먹어 버렸을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됩니다. 펠리칸이 나쁜 놈들이기만 한 줄 알았지만, 결국 정령들이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 물고기의 내장을 적나라하게 찢어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앵무새들의 폭력성에 대해 알게 되었지만, 앵무대왕의 절도와 리더십에 대해서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성장의 과정, 세계관이 점차 세련되어 가는 과정이 “어머니의 그림자"인 왜가리와 “아빠가 좋아하는 사람"인 나츠코를 집에 데려오겠다는 별로 대단치 않아 보이는 추동력으로 인한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나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은 숭고하고 훌륭한 것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어디 가서 무식하다고 놀림받기 싫은 찌질한 열등감일 수도 있다는 점을, 그리고 내가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그 감정 또한 발전해나가 결국 쓸모 없는 것은 없다는 것을 미야자키 하야오는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나쁜 생명은 없다." 이는 그가 수십년 전 <원령공주>에서 말하고자 하는 메세지와 같습니다. 죽어야 할 것은 없으니, “살아라.”
3.
마히토는 나츠코와 화해했고, (비록 소녀의 모습이긴 하지만) 어머니와 만났습니다. 한편 세계의 주인인 ‘큰할아버지'는 마히토에게 그 권능을 넘기며 “세상을 더 아름답게 바꿀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자전적 작품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듯, ‘큰할아버지'가 세계의 퍼즐로 쥐어주는 돌멩이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동안 만들어온 작품의 숫자와 같습니다.
완전한 해피엔딩일까요? 그러나 마히토는 이를 거부합니다. 마히토는 세상의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메워주고, 그래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어주는 환상의 힘을 보아 왔지만, 그것이 여전히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이해가 ‘정말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오직 세상에 부딪히는 것 말고는 답이 없습니다. 그는 여전히 잘 모르고, 세상은 여전히 불가해할 것입니다. 그는 내가 이해할 수 있고 내가 아름답다고 믿는 것만 존재할 수는 없다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렇기에 다시 현실 세계로 돌아갑니다. 물론 빈손은 아닙니다. 어설프게나마, 사춘기의 마음으로 이해한 세계를 들고 가지요. 하지만 왜가리는 “뭐, 나를 곧 잊어버리"겠다며 너스레를 떱니다. 마히토는 세상과 만나며 더 성장할 테니까요.
4.
저는 이 작품이 인간의 상상력과 그를 통한 성장, 그러나 늘 있기 마련인 현실과 상상의 긴장감에 대해 다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미야자키 하야오 스스로 자신의 작품에 대해 고민해 왔던 주제이기도 합니다. 가령, <바람이 분다>를 그리며, 제국주의 일본이 가졌던 끔찍한 면모를 혐오하지만, 유년기를 보냈던 그 시절에 대해 향수를 지니기도 한 자신의 모순을 고백해 왔죠. 한편 <원령공주>에서는 아무리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려고 해도 결국 어떤 입장일 수밖에 없다는 고민 끝에, 오직 남는 것은 “각자 잘 살아봐라"라는 허무한 말 뿐이라는 점에 고통스러워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미야자키 하야오 본인이 만들어온 모든 작품에 대한, 일종의 메타리서치 격인 작품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세계를 희구하는 자신의 작품, 그러나 제국주의의 유산 속에서 그런 작품들을 만들어 온 본인이라는 현실 사이의 괴리 또한 마히토의 여행 속에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니 이 작품은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 이고, 제목과 대구를 이루는 듯합니다. 그러나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이 된 순간, 그 또한 하나의 환상에 불과할 뿐이겠습니다. 오시이 마모루였나요? “절대 이 작품으로 끝날 리 없다"는 말은, 아마도 마히토가 세상과의 대면을 선택하는 순간 확실해졌을 겁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계속 그릴 것 같습니다. 마치 영원히 산 위로 돌을 가지고 올라가는 시지포스처럼요.
전쟁을 일으킨 기성세대에 근원적인 의문과 반발심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 기성세대와는 필연적인 인연을 가질 수 밖에 없는(당연히 자기 부모들이니...)
그래서 그 기성세대가 가졌던, 그리고 그들이 만든 세상이 요구하는 미덕들과
(하루죙일 앉아서 원화 그리고 있을 수 있는 직업 자세라던가...)
그리고 그 기성세대가 과정이야 어쨌건 이뤄놓은 달콤한 결과물들을 승계하고 받아먹을 수 밖에 없었던 세대입니다.
(그 돈으로 먹고살고, 학교 다니고... 그리고 애초에 직업 자체가 쇼와 시대의 경제발전의 산물이니...)
개인적으로 저는 미야자키옹을 필두로 한 이 저패니메이션 전성기의 거장들에는 이러한 복잡모순적인 상황,
그리고 그에 따른 복잡한 심리가 깔려있다고 해석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90년대 말까지의 저패니메이션의 전성기를 이끌어 낸 토대라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그 마지막이 카우보이 비밥이고, 마지막 자손이 안노 히데아키라고 봅니다. 당사자가 아니라 자손입니다.)
그들은 이제 시대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있거나 사라지기 직전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대표하는 이들 중 원탑인 미야자키옹의 거의 마지막 심리가 이 작품에 담겨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 작품은 혼란스러운 반응이 많을 거라고 봅니다.
스스로도 혼란스러울 거라고 봅니다. 철들고 나서 60년 가까이 그러한 모순에 대해서 고민했고,
그 고민들을 수많은 작품들을 통해 표출해냈지만 그런 과정을 거쳐도
자신이 걸어온 인생과 그 주변의 세계에 대한 결론이 나지 않을테니까요. 그게 인생이지요.
오히려 80이라는 나이보다 더 젊을 때 자신이나 세계에 대해 더 자신있게 정의를 내리고 다른 이들에게 강요할 수 있을테지요.
그래서 저는 이 작품의 제목이 그 자신에게는 매우 적절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제목은 의문형이지만 은근히 어떠한 강요를 깔고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저는 이 제목 자체도 그가 가지는 필연적인 혼란과 어정쩡함 등을 내포하고 있다고 봅니다.
어떤 이에게는 '이제와서?'라는 생각과 황당함을 줄 수도 있는 제목, 내용의 작품이겠지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었습니다.
좋은 후기 감사합니다.
예고편을 보니깐 새가 많이 나오는것 같은데 어떤 의미인지 잘 와닿진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