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dleness, John William Godward, 1900
3장. 과시적 여가
다른 요인이 작용하지 않는다면, 잘 살고자 하는 경쟁은 인간들을 더욱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만들 것입니다. 정주하는 농업 공동체 사회에서 재산(토지)의 분배가 비교적 고르게 되어 있고 사회제도가 농민들에게 제 몫을 보장해 주는 곳에서는 인간들이 서로 더 부유해지기 위해 부지런을 떨며 검약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종종 다른 요인이 개입합니다. 그것은 생산적인 일을 안하는 것이 부와 권력의 징표가 된다는 점입니다. (고대의) 약탈 문명에서 생산적 노동은 승자에게 종속된 패자가 하는 일일 뿐이고, 일을 한다는 건 자신이 남에게 매여 사는 하류층임을 입증하는 표시와도 같습니다. 이러한 관행은 현대에까지 연면히 이어져 내려와, 지금도 생산 노동을 하는 걸 은연중에 천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부와 권력을 가졌다고 노골적으로 이마에다 써붙이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는 건 웃기는 짓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간접적으로 자신이 잘 산다고 표를 내는 기법(?)들을 인간들은 다양하게 발전시켜왔고, 그 중 가장 대표적이자 근본적인 방법은 일을 안하는 모습을 타인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제 생산적 노동을 하는 것은 천한 것이고, 일을 안하고 노는 건 아름답고 고급진 것이라는 시각이 사회구성원들의 뇌리에 깊이 박히게 되었습니다.
약탈적 사회에서 사유재산권이 인정되는 상업 사회(중세 봉건사회를 의미하시는 듯)로 이행되면서 이러한 '여가'의 의미는 오히려 강화된다고 합니다. 약탈사회에서 일을 안하는 상류층들은 그래도 전쟁이나 정치를 해서 공동체에 실질적으로 도움을 주었으나, 평화로운 사회가 되고 신분제가 공공해지면서 이들 상류층들은 이제 모든 유용한 직무에서 면제되는 것을 명시적 특권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가오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굶어 죽거나 타 죽어도 상관없다는 극단적 행태로도 나타났다고 합니다(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뭐가 떨어진다 어쩌고 하는 할머니들 드립이 딱 이거네요).
하지만 내가 평소 허드렛일 같은 건 안하는 사람이라는 걸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걸 증명하기 위해 훈장, 트로피같은 게 제작되고 온갖 작위와 계급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또는 실생활에 아무 도움이 안되는 학문적 지식이나 취미같은 것도 내가 그런 걸 익힐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예의와 매너도 중요한 유한계급 인증 수단이라고 합니다. 단기간에 익힐 수 없으며, 오랜 기간, 심지어는 대를 이은 가풍 속에서만 배울 수 없는 매너와 예의범절은, 상대에 대한 존중과 배려라는 기본적인 존재의미 이외에 자신이 돈벌이에서 해방되고 여가를 향유하면서 고급진 교양을 쌓은 사람임을 드러내는 수단으로서의 의미를 함께 가집니다. 또한, 예의범절과 함께 소비 양식, 유행 역시 이와 비슷한 과시용 기능을 합니다. 이러한 상류층들의 행동양식은 아래 계층 사람들에게 전범이 되고, 후자의 사람들은 고급진 매너를 흉내내면서 신분의 상승을 꿈꿉니다(조선 후기에 우리나라 평민들이 납속과 공명첩으로 신분을 사고, 제사를 거하게 지내면서 양반 행세를 하기 시작한 현상이 오버랩됩니다).
과시적 여가는 집 주인 본인 외에 부인과 하인들도 누립니다. 전술된 바와 같이 사유재산제는 여자를 약탈하던 과거의 유습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며, 주인의 소유물로서의 부인(들)과 하인의 역할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변모하게 됩니다. 하인들의 경우 직접적으로 돈을 벌기 위한 생산 업무에 투입되는 부류와 주인의 시중을 드는 부류로 나뉘게 되는데, 후자의 부류와 부인들은 남자 주인을 모시기 위해 여러가지 일들을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본질적으로 과시적인 시간낭비에 불과합니다. 여러 여자와 하인들을 거느리는 이유는 이들이 하는 일때문이기도 하지만,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고 저자는 생각합니다. 내가 이렇게 쓰잘데기 없이 시중이나 드는 사람들을 많이 데리고 있다는 건 그런 돈지X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돈이 많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흐르며 서로를 약탈하던 단계에서 공고해진 신분제도 하에 ‘평화’상태를 이룬(quasi-peaceable) 상태가 되면, 정실 부인은 약탈이 아니라 혈통이 좋은 다른 집안에서 모셔 와야 하므로 허드렛일을 시킬 수 없게 됩니다. 또한 주인을 가까이서 보필하는 하인들 역시 험한 일을 안시키고 주인을 칼같이 모시는 데만 집중시키는 게 더 나으므로 이들 또한 생산 노동에서 면제가 됩니다. 이러한 ‘대리적(vicarious) 여가의 향유’ 현상은 전근대적 야만사회에서 높은 발전 단계인 준평화상태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산업화 사회가 되면 최상류층 이외에는 이런 현상을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현대 사회에서 상류층들은 일은 안해도 파티도 해야 하고 쇼핑도 해야 하고 미팅도 해야 하고 스포츠도 해야 하고 너무너무 바쁘기 때문에 자신을 모셔주는 사람들을 고용해야 하고, 자기 가족의 위세를 세워야 하므로 자신들을 모셔줄 사람들을 고용해야 하며, 이 과정에 대리적 여가 현상은 다시 한 번 나타납니다.
==================
일을 안하는 건 그저 무위도식 뭐 이런 게 아니라 내가 일을 안하고도 살 수 있는 존재라는 걸 과시하기 위함이라는 말씀이네요. 일도 안하고 세금도 안내고 음풍농월하며 제사와 같은 허례허식에만 신경쓰던 조선시대 양반들의 행태에 대입해 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베블렌의 논리는 설득력이 있습니다. SNS에 어디가서 노는 내용은 많아도 일하는 내용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Fire족 붐이 이는 걸 보면 우리들 역시 예외가 아니네요.
특히 유한계급(한가한 시간이 많은 부자)와 사치재(명품 등)는 가격이 오를수록 수요가 증가하는 것 (베블런 효과) , 현대사회는 유한계급을 따라하는 일반층도 존재 (경쟁심, 자존심) 한다는 점에 대해서 요즘의 현상이 많은 이해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