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철학의 최전선 - 가장 뜨거운 다섯 가지 주제와 그 사유의 지도
나카마사 마사키 (지은이),박성관 (옮긴이) 이비 2022-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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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마사 마사키의 <현대 철학의 최전선>을 다 읽었습니다. 문체가 평이하고 투명한데다가 곁가지나 쓸데 없는 논의가 없고 일본어 특유의 표현도 거의 안 보여서 한국학자가 한글로 잘 쓴 책처럼 술술 읽혔습니다. 각 주제에 대한 논의의 전개과정과 현황을 놀라울 정도로 일목요연하게 요약했습니다. 각 주제에서 한 가닥 하는 철학자들, 특히 영미 철학자들은 거의 다 등장합니다. 아예 언급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데리다를 제외한 포스트 모던 프랑스 철학자들은 거의 스쳐 지나갑니다. 한국에는 들뢰즈의 팬들이 많으니 들뢰즈가 거의 언급되지 않은 것에 불만인 독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언급도 언어게임론의 논쟁적 포인트를 극히 간략하게 짚은 것에 그칩니다. 그외 지젝과 랑시에르와 마르크스주의쪽 인물들도 안 보입니다. 롤스의 정의론에 대한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인 제럴드 앨런 코헨 G. A. Cohen 의 Rescuing Justice and Equality (2008) 정도는 소개해 주었어야 했습니다. 자신이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에 대해 주석서급의 두꺼운 책을 썼다는데도 아렌트도 안 보입니다. 초기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두 페이지만 할애되어 있지만 하버마스는 게속 등장합니다. 이 누락들이나 불공평은 부분적으로는 현대 철학의 '최전선'만 다룬다는 의도에 부합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현대철학이 최전선이 어디인가에 대한 저자의 주관적 견해가 반영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지면제약상 심리철학과 언어철학을 다 다룰 수는 없다면 더 핫했던? 심리철학만 다루겠다는 식의 선택의 결과일 것입니다. 본문만 274쪽인 이 책이 400쪽으로 개정된다면 더 명실상부한 책이 될것 같습니다. 저자의 필력이라면 400쪽이나되는 입문서도 충분히 가능하고 어차피 이 책의 논의에 흥미를 가지고 상당 부분 따라갈 수 있는 이라면 400쪽이 부담스러울 리는 없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메이야수, 브라시에, 샤비로, 하먼, 가브리엘을 다루는 제5장 '새로운 실재론' 이었습니다. 문자그대로 현대 철학의 최전선인데다가 직전까지의 현대 철학의 주요 흐름에 대해 반론을 하고 있다고 들었고 제가 가장 낯선 쪽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쪽 인물들이라고 알고 있는 브라이언 마수미 Brian Massumi, Levi R. Bryant 레비 R. 브라이언트, 마누엘 데란다 Manuel DeLanda 에 대한 논의는 빠져있는데, 역시 지면이 제약되어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다룬 인물들이 가장 대표적 철학자들이라고 판단했던 모양입니다. 가브리엘에 대한 언급이 특히 많은데, 그의 논변들이 가장 종합 (특히 독일 관념론과 현대 영미 철학의 종합) 적이고 풍부한데다 한편으로는 극단적으로 얘기하는 것 같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나는 뇌가 아니다>같은 저작 제목이 시사하듯이 어떤 좋은 의미에서의 상식적 온건함이나 세련되게/유물론적으로 재구성된 전통적 휴머니즘의 기색이 엿보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는 아주 고맙게도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북가이드와 미주가 달려 있습니다. 북가이드는 비록 상당수가 일본어 책들이기는 하지만 더 알고 싶으면 읽어야 될 연구/입문서들을 알려줍니다. 역자가 자신의 수고를 보태서 그 중 국역본이 있는 것들 옆에 국역본 출판사와 출판년도를 기재해 넣은 괄호를 달았습니다. 전적으로 역자가 단듯한 미주에는 본문에서 논의된 주요 저작들의 원제목과 국역본이 있을 경우 서지 사항을 알려줍니다.
역자 후기도 전혀 형식적인 언사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훌륭합니다. 아주 진솔하고 도움이 되는 글입니다. 왜 이런 책이 필요한지, 저자가 어떤 인물인지 (얼마나 많은 연구서들과 입문서들을 냈는지 - 국역본이 있을 경우 역시 서지 사항 제공), 각 장의 논의가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 최근 철학의 경향이 어떤 지 등에 대해서 알려줍니다.
좋은 책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색인도 달려 있습니다.
한국이 일본을 따라잡은 분야들도 있(다고 하)지만 학술 출판을 포함해서 학술은 아직 아닙니다. 인문사회 학술서들은 크게 (독창적) 연구서와 입문서와 번역서로 나뉩니다.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국제적으로 잘 나가는 인문사회쪽 학자들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물론 그래도 한국보다는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학술 번역과 정리하고 개관하는 학술 작업은 그 어느 '선진'국 못지 않게 뛰어납니다. 저는 한국에 <현대 철학의 최전선>급의, 현대 철학의 주요 부문들 상당수의 기본 윤곽을 감잡을 수 있게 해주는 책을 쓸 수 있는 철학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류의 더 많은 일본책들이 번역되어야 할 이유입니다.
리처드 J. 번스타인 Richard J. Bernstein 이 태어난 해만 표기되어 있는데, 올해 7월 4일에 별세했습니다.
새로운 현대 철학도 시간 나면 책을 읽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