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서 국가, 국가에서 세계에 이르기까지 일본인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를 위계로 파악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계 안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고 이를 지키려 하는 일본인의 사고방식은, 국제관계에 대한 이해로도 그대로 이어지며, 이는 세계 역시 거대한 위계이며, 개별 국가는 그 위계 안에서의 지위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일본인들의 세계관은 2차대전 당시 각종 외교문서에서 확인되기도 합니다. 반면 건국 초기부터 평등을 지고의 가치로 받아들이고 체화해 온 미국인들이 이러한 일본인들의 특징을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미국인들의 일본 이해를 돕기 위하여, 어떻게 이들의 사고방식이 일상생활에서 관철되고 있는지를 설명한 후, 일본이 왜 이러한 성향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를 소개 합니다.
일본 사회는 가족에서부터 엄격한 상하관계가 나타납니다. 태어나서부터 일본인은 가정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위계질서 - 할아버지-아버지-맏아들-지체-딸들로 이어지는 - 를 체득합니다. 중국과도 일본은 상당히 다릅니다. 계급은 존재하지만, 과거제도를 통한 신분상승이 가능하고 거대한 문중이 정치적 지배력을 행사하는 중국과 달리, 일본은 기본적으로 태어날 때 신분이 결정되는 카스트 사회이며, 일본인들은 문중보다는 봉건제도 내에서 나의 위에 있는 영주의 지배를 받습니다. 거대한 문중보다는 상대적으로 소규모인 이 일본 대가족의 좌장은 가장 나이가 많은 남자 어른들이 되지만 이들이 자신의 뜻을 일방적으로 강요하지는 않으며,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한 조언을 할 뿐입니다. 또한 나이를 중시하여 맏아들을 떠받들어 주는 이들의 문화는 일본이 동아시아의 큰형님이라는 대동아공영권 사상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여성의 지위는 남성보다 낮았지만, 전족도 없고 행동의 자유가 있었던데다, 며느리를 들이면 안주인으로서 안살림을 떠맡는 권한이 생기는 일본 여인들의 상황은 그래도 다른 아시아국가들보다는 좀 나았다고 합니다. 물론 지체가 맏형을 능가하는 경우가 생기지만, 그래도 실질적인 권력과 상관없이 나이 많은 윗사람을 존중해주는 문화는 유지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강고한 봉건사회였습니다. 7~8세기에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고관대작의 지위는 여전히 과거제도를 거치지 않고 세습되었습니다. 왕조의 교체는 한번도 없었지만, 8세기에 후지와라 가문이 왕을 일선에서 물러나게 한 이후 왕은 가만히 있는채로 귀족들간의 권력쟁탈전만 계속되었습니다. 미나모토 요리모토는 征夷大將軍(줄여서 장군, 즉 쇼군)의 지위에 올라 일본 전체의 실질적인 정부 수반이 되며, 이 지위는 미나모토 가문의 자손들에게 승계됩니다. 이 쇼군 밑에는 지방의 영주들인 다이묘들이 있었으며, 이들 다이묘들은 무장한 가신들인 사무라이들을 거느립니다. 1603년에 이르러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다시 한번 전국을 통일하고 쇼군이 됩니다. 그는 중앙집권체제로 정치시스템을 바꾸었으며, 다이묘들이 힘을 가지지 못하도록 계속 견제하는 동시에, 하층계급이 다이묘와 쇼군에게 의존하게끔 봉건적 사회체제를 오히려 더 강화하였습니다. 다이묘들에게 사회간접자본 건설 의무를 떠맡기고(天下普請), 일년의 반은 동경에서 거주하도록 강제한 것(參勤交代)이 대표적인 다이묘 억제정책입니다.
도쿠가와 막부 시절 일본은 기본적으로 사농공상 카스트 시스템이었습니다. (여기서 '사'는 사무라이의 사짜임) 아버지가 사무라이면 아들도 사무라이, 아버지가 장사꾼이면 아들도 장사꾼이 되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상인들은 부를 축적하여 체제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지배층은 상인을 천시하고 이들이 득세하지 못하도록 계속 억눌렀습니다. 상인들이 일정 규모 이상의 선박을 건조하는 것을 금지시키고 교역세를 부과하고 한 것이 바로 이때문입니다. 하지만 상업이 융성하고 화폐경제가 발전하면서 상인들이 부를 축적하는 대세를 막부는 결국 막지 못하였습니다. 반면 사무라이들은 농공상들한테 마음대로 칼을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은 있었으나, 중세 유럽의 가신들처럼 자신들의 영지를 가지지는 못하였고, 다이묘들에게 쥐꼬리만한 월급만 받았기에, 이들은 영주들의 자산관리인이나 예술가로 전업을 하지 않으면 그냥 칼찬 가난뱅이가 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들 기생 특권층을 지탱해 주는 역할을 하는 농민의 경우엔 소출의 40% 이상을 세금으로 뜯기기는 했지만 자신의 농토를 소유할 수 있다는 나름의 특권을 가졌습니다(소농경제). 수탈이 너무 심하여 자신의 지위가 위협받는다고 생각할 경우 농부들은 민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정부는 농부들의 요구가 정당할 경우(전체 케이스들 중 한 반 정도는) 이를 들어주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지위에 넘는 것을 요구해서는 안되지만, 자신의 지위가 침해되는 것에 항의하는 것은 인정된다는 논리입니다. 다만 민란 주동자는 모두 사형에 처해졌는데, 농부들은 이 점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이 도꾸가와 막부 시절 일본의 법과 질서(law and order)였다고 베네딕트 선생은 표현합니다.
이러한 역사의 경험을 통하여, 과욕을 부리지 않고 자신이 조상대대로 물려받는 지위와 영역 안에서 성실하게 사는 인생도 나름 안전빵으로 그리 나쁘지 않다는 인식이 일본인들에게 자리잡습니다. 정부 또한 이러한 질서를 유지시키고 공고히 하는 것을 통치의 주안점으로 삼게 되며, 이는 근대 일본 정부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막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신분간의 벽은 점차 허물어집니다. 사농공상 중 가장 낮은 지위의 상인들이 돈의 힘으로 높은 사회적 지위를 구매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원래 농부들의 경작지는 양도불가능했지만, 이들 상인들은 유치권과 같은 수단을 가지고 토지를 실질적으로 점유해나갑니다.(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소략하여 이해하기 힘든데... 아무도 농부들한테 돈을 꿔주고 토지를 저당잡은 뒤, 해당 토지에서 나오는 임차료를 이자조로 받는 걸 의미하는 듯 합니다.) 또한 가장 지위가 높은 (하지만 재력은 별볼일 없는) 사무라이 계급과 가족관계를 맺음으로써 지위를 올리는 방법도 활용되었습니다. 사무라이 집안에 자식을 입양시키거나 데릴사위로 보내는 게 그것입니다. 부르조아 계급이 혁명을 해서 귀족들을 단두대로 보낸 유럽과 달리, 일본은 합법적인 방법으로 상인계급이 사무라이 계급과 동화되면서 '조용한 혁명(tribute to 성희엽 선생님)'이 이루어지고 이들 사무라이+상인들이 메이지 유신의 주체가 됩니다. 유신이라는 것은 왕이 실권을 가졌던 1천 2백년전 과거로의 회귀를 의미합니다. 게다가 정치체제가 바뀌었지만 위계질서 중심의 경직된 사회 성격은 전혀 바뀌지 않은 (즉 제대로 된 혁명을 안한) 일본 사회가 과연 앞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일본은 불과 몇십년 뒤에 구미 열강들과 맞장뜰 정도로 발전하게 됩니다. 다음 장은 메이지 유신.
/Volla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