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 장군을 모르는 한국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이 책의 저자 매튜 B. 리지웨이를 아는 한국인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겁니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저 역시 리지웨이라는 이름을, 그리고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우리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민으로서 뚱뚱한 그 양반을 떠받들며 살고 있었을 거라는 걸 알게 된 건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급 관심이 생겨 이 분에 대해 몇가지 찾아보다가, 그가 직접 쓴 한국전쟁사 책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는데, 한국전쟁의 진주인공이었던 사람이 직접 쓴 책임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우리말 번역이 안되었다는 사실에 또 한번 놀랐습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한국인들이 듣기 싫어할 내용이 이 책에 꽤 많다는 게 이 책이 우리말로 번역이 되지 않은 이유가 아닐까? 하는 억측을 한 번 해 보게 됩니다.
이 책은 여러가지로 우리나라 사람들 - 좌우를 막론하고 - 을 불편하게 할만한 내용이 많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거의 신격화하다시피 떠받드는https://www.econovill.com/news/articleView.html?idxno=236876 맥아더 장군이 어떤 실책을 저질렀는지를 이 책이 가감없이 서술하고 있다는 것을 그 중 첫번째로 꼽을 수 있습니다. 인민군의 허를 찔러 이들을 38선 이북으로 패퇴시켰던 인천상륙작전을 계획하고 추진한 공은 분명히 있지만, 이후 북한지역으로 진공하면서 무계획적으로 병력을 분산시키는 바람에 중공군의 은밀한 포위에 이은 각개격파 전법에 당한 맥아더의 과오는 결코 덮을 수 없다는 것이 리지웨이의 평가입니다. 맥아더는 강력한 중공군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빨리 한반도를 통일해야겠다는 욕심에 사로잡혀 중공군의 위협을 경시했는데,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고 싶어하는 확증편향의 본능을 그는 극복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맥아더의 오판으로 인하여 1950년 가을에서 겨울에 이르는 기간 동안 유엔군은 지리멸렬하게 후퇴해야 했고 미군 전체에는 패배주의가 만연하였습니다. 리지웨이는 워커의 뒤를 이어 미8군 사령관으로 부임하여 맥아더가 실패한 부분을 철저히 보강해 나갔습니다. 부대간의 유기적 협조를 위한 연락망을 긴밀하게 유지하면서, 험한 지형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되면 적극적으로 공략하고, 우세한 화력을 아끼지 않는 그의 대책은 적중하여 리지웨이는 지평리 등의 주요 전장에서 결국 중공군을 막아내는 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맥아더는 리지웨이가 기껏 작전 개시 준비를 다 해 놓으면 일본에서 날아와 자기가 공격개시 지시를 내리는, 가히 수준급의 '차려 놓은 밥상에 숟가락 올리기' 실력을 발휘했다고 리지웨이는 회고합니다. 대통령 트루먼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맥아더는 선을 넘어도 한참을 넘었다고 합니다. 민주국가에선 선출된 민간정부가 최종적인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 당연한데도, 맥아더는 중공군 개입시 물러서라는 트루먼의 지시에 불응하고 그의 정치적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오히려 중공 해안을 봉쇄하고 만주를 폭격하겠다는 위험천만한 모험을 시도한 것입니다. 이 대목까지 읽다보면 과연 우리나라 사람들이 맥아더를 신격화하는 건 고사하고 존경할만한 이유가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자연히 들게 됩니다. 분명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찬사를 받아 마땅하지만, 그의 공과를 우리들은 각각 정확히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저자는 이 전쟁에서 우리 국군이 얼마나 한심한 모습을 보여주는지 계속 얘기하는데 이 또한 당연히 한국의 독자들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만들 대목입니다. 중공군이 쳐들어온다 → 중공군이 한국군을 먼저 공격한다 → 한국군이 무너진다 → 한국군 패잔병들이 미국이 준 값비싼 무기들을 다 내팽개치고 도망간다 → 한국군을 무너뜨린 중공군이 미군의 측면을 위협한다. → 미군 방어 성공 혹은 후퇴. 이 패턴은 중공군의 개입 초기인 운산전투 때부터 휴전 직전까지 지치지도 않고 계속됩니다. 물론 전쟁 초반 춘천지역을 사수했던 6사단의 분전이나 일부 국지전에서 한국군이 세운 전공에 대해 리지웨이는 분명히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한국군은 기본적으로 애물단지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한국군의 구조적 문제의 책임을 그는 당시에 직접 (그리고 이 책에서도) 이승만에게 묻습니다. 기본적으로 리지웨이는 조국를 지키기 위해 애를 쓴다며 이승만에 대해 우호적 시각을 깔고 가기는 하지만, 한국군은 국방부장관에서 일반 사병에 이르기까지 리더쉽이라곤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다고 혹평하면서 이승만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그가 요청하는 군장비의 제공은 결코 없을 거라고까지 이승만에게 대놓고 얘기했다고 합니다. 저자가 보기에, 한국군의 지휘관들은 함량 미달의 인물들이 정치적 빽으로 임용된 경우가 많았고, 이들은 능력도 없는 주제에 자기 체면만 생각하고 부하직원의 충언을 들으려 하지 않았으며, 전투에서 패했을 때는 부하들보다 자기들이 먼저 도망가는 데 앞장서는 게 다반사였습니다. 아픈 기억은 떠올리고 싶어하지 않아 하는 무의식의 발로인지 남탓을 하면 마음이 편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공군의 개입 이후의 대책없는 후퇴가 그냥 중공군의 '비겁한' 인해전술때문이었다는 변명으로 대충 넘어가려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하여 중공군이 전술이나 훈련도 면에서 우수했던 것 만큼이나 이승만을 정점으로 한 당시 한국군의 지휘체계가 문제가 많았다는 진실과 우리는 마주하게 됩니다.
6.25 전쟁의 결과에 만족하는 한국인은 거의 없겠지만, 이 책을 읽어보면 이 정도로 끝난 것도 기적에 가깝다며 가슴을 쓸어내리게 만드는 부분이 한 둘이 아닙니다. 전쟁 초반의 일방적 후퇴때는 물론이고, 중공군 개입 이후 리지웨이가 유엔군을 정신적, 물질적으로 일신하지 못했다면 유엔군이 결국 대한민국을 손절했을 가능성이 무척 컸다는 것을 이책에서는 디테일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책에 나오는 미 당국이 세웠다는 체계적인 철수계획을 보면 미국도 참으로 많은 생각을 했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 계획에 따르면 만일 충청도까지 밀리게 되면 유엔군은 즉각 한반도에서 철군하는 것으로 하고, 퇴각전 방어하기 쉽도록 전선을 다시 낙동강으로 축소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경악스러운 건 낙동강까지 퇴각하여 짧고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하기 전까지는 한국군에게 한반도 철군 계획을 절대로 알리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대목입니다. 만일 한국군이 유엔이 한반도를 포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희망을 잃은 한국군이 살아남기 위하여 중공쪽에 붙어 유엔군을 측면에서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고 미 당국은 우려한 것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미국을 덮어놓고 욕해서도 안되지만, 맹신해서도 안된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됩니다. 더군다나 당시 한국군과 한국 정부의 난맥상을 감안한다면, 탈레반에게 점령되고 미군이 철수하는 요즘 아프가니스탄 상황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을 수 있다는 모골송연한 가정을 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상이 주로 보수적인 한국 사람들이 이 책이 마음에 안들어 할만한 점들이라면, 진보 성향의 한국인들이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도 이 책에는 있습니다. 군정 시절부터 미국은 점령군으로서 우리나라를 함부로 대했고, 미국의 한국전 참전은 철저히 미국 자신의 국익을 위한 것이었으며, 전쟁 수행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과 같은 과오까지 저질렀다는 데 주목하는 '진보적' 시각에서 보면, 한국전쟁에서 미국은 우리들을 괴롭히던 수많은 외세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책 초반부를 보듯 미국의 한국전 참전 결정은 결코 쉽지 않았음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을 힘겹게 마무리하고 병사들이 이제 막 사회로 복귀한 상황에서, 아무리 물량 대국이라고는 하지만 민주국가인 미국의 대통령 트루먼이 즉각적인 참전을 선언한 것은 쉬운 정치적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공산주의의 발호를 막는 것이 자신의 국익에 부합한다는 판단을 하고 미국이 참전한 건 분명 맞지만, 미국 역시 많은 희생을 치렀다는 것을 이 책은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전쟁 초반 중과부적임에도 불구하고 결사적으로 인민군의 진군을 늦춘 스미스 기동대에서부터 시작하여, 이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북한지역에서 후퇴 과정, 그리고 이후 이어지는 교착상태의 전투에서 미군과 프랑스, 영국, 터키군 등으로 이루어진 유엔군은 엄청난 희생을 치렀으며 그 장면 하나하나는 모두 전쟁영화 감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알고 나서는, '미국도 결국 자신의 이익때문에 한국전쟁에 뛰어든 게 아니냐'는 말을 쉽게 할 수 없습니다. 어차피 이 책은 미국의 독자를 대상으로 쓴 책이기도 하고, 좌파적 시각에서 보면 이 책이 철저히 미국의 입장에서 쓴 책이라고 욕할 수 있으며, 미국의 과오를 잊어서도 안되겠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들은 미국의 입장에서 생각하면서 미국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이 책의 독서를 통하여 얻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이 책에는 배울만한 일반적인 교훈들이 많습니다. 어떤 희생을 감수하든 적들을 박살내고 무조건적 승리를 거두어야 한다는 프로퍼갠더는 핵무기가 만들어진 현대 세계에는 설 자리가 없어졌다는 현실을 저자는 직시합니다. 전쟁에 있어서는 분명한 목표를 정해야 하고 그 목표가 달성되면 전쟁을 멈추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는 제한전 개념은 민주국가의 주권자인 시민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어야 폭주하는 정부나 군을 막을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이러한 기준에 따르면 한국전쟁은 그럭저럭 성공한 전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리지웨이의 말마따나 적당선에서 공산세력의 확장을 저지하고 3차 세계대전으로의 확전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승리의 기준이 북진통일 내지는 무찌르자 공산당인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대에는 한참 못미치기는 하겠지만 말입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제한전의 목표를 정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선출된 민간 정부여야 하며, 군은 의사결정 과정에 조언을 할 수는 있지만 일단 민간 정부가 결정한 사항은 철저히 이행해야 한다는 리지웨이의 원칙에도 또한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조금 억지일 수 있겠지만, 이러한 리지웨이의 조언은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늘 논란이 되고 있는 어공과 늘공 사이의 관계에도 충분히 적용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종적인 의사결정을 하는 것은 선출직 어공이어야 하고 늘공 관료집단은 의사결정 과정에 충분히 조언을 하되 어공이 최종적으로 정한 결정 내용은 그대로 따르는 것이 민주사회의 운영원리여야 하지 않을까요? 만일 어공이 잘못하면 선거로 이들을 교체하면 됩니다. 검찰과 기재부와 같은 힘있는 늘공집단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요즘의 우리나라 현실을 목도하다 보니 무리인줄 알면서도 전쟁사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
맥아더 장군은 동상으로, 워커 장군은 호텔 이름으로라도 남아있지만, 리지웨이 장군은 잊혀진 전쟁의 잊혀진 장수로 망각의 뒤안길로 사라질까 염려스럽습니다. 이후 역사의 전개를 보면 미국에서도 이 노장군의 혜안을 무시하다가 전쟁의 수렁에서 좀처럼 빠져 나오지 못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한국전쟁은 결코 실패한 전쟁, 잊혀져야 할 전쟁이 아니라, 우리가 분명히 기억하고 그 교훈을 배워야 할 의미있는 역사전 사건임을 마지막까지 격정적으로 외치는 그의 목소리에 한없이 짠해집니다. 저라도 기억하겠습니다.
그나마 국군 중에서 분전했던 단 한개의 군단, 사단이 백선엽이 지휘하던 부대였다는게 참 아쉽죠.
헨리 키신저의 Diplomacy를 보면 "다른 합법 국가를 무단으로 침범한 국가에 대한 응징을 어디까지 할것이냐?"라고 묻는 부분이 있는데, 북한을 우리가 바라보는 관점인 통일의 대상, 수복의 대상으로 보면 당연 압록강 두만강까지 밀어야하는거 아냐? 라고 생각했다가, 제3자 관점에서 생각하게 되더군요.
둘 다 전후 국제질서에 의해 인정된 국가라면, 남침에 대한 응징으로 아예 침략국을 소멸시켰어야 했나? 평양까지 초토화시켰어야 했나?(이미 했지만) 38선까지 수복하고 그쳤어야 했나? 등등 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회가 되면 리지웨이 장군의 책도 읽어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미국의 625 참전과 희생은 미국의 이상주의가 발휘된 정말 얼마 안되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뭐랄까... 정말 말도 안되는 악(전체주의)을 무찌른 뒤 사회 전반적인 도취감, 승리감 등 이상주의에 젖어있던 시대라 가능하지 않았을까하네요.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ejkGb=KOR&mallGb=KOR&barcode=2005844001495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