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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누누히 강조되는 것처럼, 시장에만 맡겨 놓으면 불평등은 더욱 심해지고 파국을 피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니, 정부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집니다. 하지만 정부가 적극적으로 불평등 문제에 맞서려면 더 많은 예산이 필요하고, 더 많은 예산을 쓸 수 있으려면 세금을 많이 거두어야 하는데, 이는 정치적으로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됩니다. 앞 장에서 논의된 것처럼 소득세 최고구간 세율을 70%로 올려 최상위권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많이 부담시키는 방식으로는 27%에 불과한 미국(그리고 한국!)의 GDP 대비 세금수입 비율을 유럽과 비슷한 40%대로 끌어올리는 데는 역부족입니다. 정치적으로 더 인기가 있는 부유세를 도입하더라도 언발에 오줌누기 수준. 따라서 빈부격차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중산층에 대한 증세가 불가피하지만, 이는 (민주주의에서 최종적인 권력을 쥔) 다수의 동의를 받기가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문제가 따라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경제학자들의 책임이 적지 않다고 저자들은 자인합니다. 정부가 뭘 하면 무조건 비효율적이고 세금낭비이며, 세금을 올리면 사람들의 노동의욕이 상실되고 말 거라는 주류경제학자들의 통념은 어느새인가 일반인들에게도 많이 스며들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연구결과에 따르면 사람들은 세금이 높거나 적거나 하던대로 일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과세 기준 소득 적용 기간을 바꾸면서 스위스에서는 2년 정도 소득을 안내는 '세금 휴일'이 발생하였는데 이는 세율이 노동의욕에 미치는 영향을 정확하게 측정하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지역마다 이 세금휴일 기간을 달랐지만, 사람들이 세금을 안내는 기간이라 해서 일을 덜한 건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되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정부 자체의 효율성에 대하여 가지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 것 역시 경제학자들이 먼저였습니다. 이는 정부로 문제를 해결하는 건 고사하고, 정부 자체가 문제라는 부정적 시각으로까지 발전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정부가 세금을 올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정공법 대신에 부자 감세를 통하여 일자리를 늘리자는 레토릭에 현혹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게 다 정부 탓이다를 외치기 전에, 시장의 능력으로 해결되기 힘든 문제들 - 재난, 긴급 의료 지원, 산업 붕괴 - 을 대처하기 위하여 과연 정부 이외의 다른 방법이 있을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하며, 저자는 우리들의 편향된 시각을 교정해 줍니다. 정부가 비효율적이라 해서 무조건 민영화를 하는 것이 답은 아닙니다. 민영화를 한다고 해서 공공서비스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정부를 비판하는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는 부정부패 문제 역시 의지만 있으면 해결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부정부패는 시장으로는 해결이 안되는 문제를 정부가 처리하는 과정에서 생겨나기 쉽다는 근원적인 문제에서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해 배출이나 학교 배정과 같은 문제는 시장이 아닌 정부가 해결해야 하지만, 시장의 힘은 늘 정부의 영역을 비집고 들어오려 합니다. 단속 공무원에게 뇌물을 찔러주거나 능력이 안되는 자식을 명문대에 입학시키기 위해 뒷문을 노리는 사람들은 어떻게 보면 시장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으나 이걸 방치하면 공해는 걷잡을 수 없게 되고 뛰어나지만 가난한 학생들이 기회를 잃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부정부패를 무리하게 잡으려다가는 또다른 비효율을 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투명성을 강화하는 건 좋지만 이를 이유로 지나치게 절차를 강화하고 공무원들의 재량권을 줄이게 되면 공무원들은 능력을 발휘하기보다는 절차만 따지는 영혼없는 공무원들이 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공무원직을 택하는 능력있는 젊은이들도 드물어질 겁니다.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정부의 역할이 커져야 하지만, 그만큼 세금을 올려야 하므로 이는 정치적으로 해결이 쉽지 않은 문제이기도 합니다. 챕터 말미에서 저자들은 총체적인 해법을 제시하는 대신, 멕시코의 사례(Progresa)를 하나 소개해 줍니다. 멕시코의 경제학자 산티아고 레비는 제대로 된 복지제도 예산 확보를 위해서는 정치적으로 우파의 지지를 얻는 것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파들이 복지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공짜로 퍼주게 되면 술이나 먹고 놀기나 할 거'라는 논리인데,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서는 철저히 기브앤테이크 방식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아이디어였습니다. 즉, 무조건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아프면 의사에게 데려가고 학교에도 보내는 노력을 피지원자 측에서 하는 것을 전제로만 복지수당을 지급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이 방식은 우파의 정치적 지지를 얻어 시행될 수 있었고 불평등 해소에 일정 수준의 성과를 냈다고 합니다.
저자들은 말합니다. "우리들에게 자원이 없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은 우리들 서로를 나누는 불신과 반목의 벽을 뛰어 넘을 수 있게 도와주는 아이디어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