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는둥 세종은 지시만 하고
왕자들 공주들이 다 만든것이다. 왜이렇게 추측을 하는지..
혜례본에 정인지가 왕께서 친히 백성들을 위해 만들었다고
기록이 있는데도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네요..
미국 아폴로 달탐사도 그렇고 증거와 기록이 있음에도
안믿는 분들이 굉장히 많이 계시더라구요..
왕자들 공주들이 다 만든것이다. 왜이렇게 추측을 하는지..
혜례본에 정인지가 왕께서 친히 백성들을 위해 만들었다고
기록이 있는데도 아니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주위에 있네요..
미국 아폴로 달탐사도 그렇고 증거와 기록이 있음에도
안믿는 분들이 굉장히 많이 계시더라구요..
애초에 집현전 학자들은 훈만정음을 반대했습니다...
유명한 최만리의 상소문이 있죠..
세종이랑 논쟁한 기록도 있구요...
결국 반대세력이 너무 많아서..
발표 전까지 세종 본인과 가족들...그리고 극히 일부의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비밀리에 만들었으니...
집현전에선 만드는줄도 몰랐죠
from CV
허억!! 그런 야산 어떤 경로로 배움을 얻을 수 있을까요?
라고 생각하는 것이겠죠ㅋㅋ
#CLiOS
가족들과 집현전 학자 몇명만 데리고..
비밀리에 진행했죠...
집현전은 훈민정음 자체를 반대했던 때라...
from CV
세종이 혼자 만들지 않았다고 국사시간에 배워서 그런거 아닌가요?
86년생인데 요즘 국사책에는 어떤식으로
나오는지 궁금하네요..;
세종이 지시하고 보고 받고 했겠죠
세종대왕이 대부분 만든겁니다.
예를 들면 '이명박이 사대강을 만들었다.' 고 할때, 이명박이 지시를 하고 주도한것이지, 이명박이 직접 삽들고 땅파고 뛰어댕기며 만든게 아닌거 처럼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었다고 쓰여있어도 세종대왕이 지시한거지 한글 글자 하나하나 마다 직접 써가며 만든건 아닌가 의문이 있을수 있죠.
전 해당건에 큰관심은 없어서, 세종대왕이 직접 만들었나 아닌가에 대한 건 잘 모르겠습니다.
세종은 제작자를 항상 명시했습니다...
자기 이름을 올리지 않았죠...
예외로 훈민정음은 세종 본인이 했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실제로 본인이 만들었구요...
그리고 집현전은 끝까지 반대했습니다..
최만리의 상소문이 유명하죠...
반포 직전까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from CV
#CLiOS
감옥에 잠시 가둬놨다고 하더라구요ㅋㅋ
반포에 반대하는 서명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있는데...
그때 반포 이후 반대했던 사람들이 옥살이를 했죠...
최만리를 비롯한 처음부터 반대해왔던 사람들은 하루 옥살이를 시켰고...
처음엔 찬성했다가 나중에 반대파가 우세하자 반대로 붙은 사람들은 귀양을 보내버렸습니다...
소심없는 놈들이라고...ㅎㅎㅎ
애초에 최만리도 나라를 위한 걱정으로 당시로서는 타당성있는 반박이었기 때문에...
세종도 인재는 잘 보는거죠...
from CV
이것땜에 세종이랑 최만리 일화도 많이 있어요ㅋㅋ
토론배틀 하고 허구언날 최만리가 상소올리니까
세종이 짜증나서 감옥에 가둬놨다는 일화도 있다들었어요
#CLiOS
여튼 80년대 세대들이 학교에서 배울 때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만들었다고 배워서 그렇게 알고 있는 경우가 많죠
#CLiOS
당시 신하들의 반대를 우려하여 왕자들이 연구보조를 하고 궁녀들을 실험대상으로 삼아 세종이 독자적으로 만들었다는 설이 유력한 걸로 압니다 *
from CV
+일!!!
#CLiOS
세종이 직접 만들었다는 가장 강력한 근거는 세종이 직접 밝힌 역사적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세종은 그가 직접 지은 서문에서 자신이 직접 창제했음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4)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통하지 아니하여서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내가 이것을 가엾게 생각하여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니,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國之語音,異乎中國,與文字不相流通.故愚民,有所欲言,而終不得伸其情者,多矣.予,爲此憫然,新制二十八字,欲使人人易習,便於日用耳._세종 정음 서문)
둘째 근거는 한글 창제 사실을 최초로 알린 세종실록 기록에서 세종 친제 사실을 다음과 언급하고 있다.
(5) 1443년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스물여덟 자를 창제하여, 간략하게 예와 뜻을 적은 것을 들어 보여 주시며 그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하셨다. 옛글자처럼 모양을 본떴지만, 말소리는 음악의 일곱 가락에 들어 맞는다. 천지인 삼재와 음양 이기의 어울림을 두루 갖추지 않은 것이 없다. 스물여덟 자로써 전환이 무궁하여, 간단하면서도 요점을 잘 드러내고, 섬세한 뜻을 담으면서도 두루 통할 수 있다.(癸亥冬.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略揭例義以示之,名曰訓民正音. 象形而字倣古篆,因聲而音叶七調. 三極之義,二氣之妙,莫不該括. 以二十八字而轉換無窮,簡而要,精而通._<훈민정음> 정인지 서문.
비록 간략한 기록이지만 그 정황의 진정성이 잘 드러나 있다. 위와 같은 기록의 진실성은 신하들의 증언인 세 번째 근거로 이어진다.
(6) 임금께서 친히 1443년 12월에 28자를 창제하여 예와 뜻을 보여주고 훈민정음이라 불렀다.(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略揭例義以示之,名曰訓民正音.)-<훈민정음>(해례본) 정인지 서문
앞에서 둔 (1), (2), (3)의 기록도 이와 같은 신하들의 증언 기록에 속한다. 이런 신하들의 기록은 한글 반포를 반대했던 최만리 반대 상소문에서도 드러난다. 네 번째 근거다.
(7) 신 등이 엎디어 보건대, 언문을 만든 것이 매우 신기하고 기묘하여, (임금께서) 새 문자를 창조하시는데 지혜를 발휘하신 것은 전에 없이 뛰어난 것입니다. (臣等伏覩諺文制作, 至爲神妙, 創物運智, 夐出千古)-세종실록 1444년 2월 16일
한글 창제 사실을 공표한 지 얼마 안 돼 제출된 반대 상소에서도 임금(세종)의 신기한 창조물임을 인정하고 있다.
다섯 번째 근거는 세종이 새 문자를 창조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맥락이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8) 비록 세상 이치를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법률문에 의거하여 판단이 내린 뒤에야 죄의 경중을 알게 되거늘, 하물며 어리석은 백성이야 어찌 저지른 죄가 크고 작음을 알아서 스스로 고치겠는가. 비록 백성들로 하여금 다 법률문을 알게 할 수는 없을지나, 따로이 큰 죄의 조항만이라도 뽑아 적고, 이를 이두문으로 번역하여서 민간에게 반포하여 보여, 어리석은 지아비와 지어미들로 하여금 범죄를 피할 줄 알게 함이 어떻겠는가?(雖識理之人, 必待按律 然後知罪之輕重, 況愚民何知所犯之大小 而自改乎? -<세종실록> 세종 14년(1432) 11월 7일자.
(9) 다만 백성들이 문자를 알지 못하여 책을 비록 나누어 주었을지라도, 남이 가르쳐 주지 아니하면 역시 어찌 그 뜻을 알아서 감동하고 착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으리오. 내가 《주례(周禮)》(중국 12세기 때 편찬된 유교 경전, 세종 때 단행본으로 출판됨)를 보니, ‘외사(外史, 벼슬 이름)’는 책 이름을 사방에 펴 알리는 일을 주관하여 사방의 사람들로 하여금 책의 글자를 알게 하고 책을 능히 읽을 수 있게 한다’ 하였으므로, 이제 이것을 만들어 서울과 외방에 힘써 가르치도록 하라.(上曰: “三綱, 人道之大經, 君臣父子夫婦之所當先知者也。 肆予命儒臣編集古今, 幷付圖形, 名曰《三綱行實》, 俾鋟于榟, 廣布中外, 思欲擇其有學識者, 常加訓導, 誘掖奬勸, 使愚夫愚婦皆有所知識, 以盡其道, 何如?-세종실록, 세종 16년(1434) 4월 27일자.
책을 통한 교화에 관심이 많았던 세종은 이미 한글 창제 11년부터 아주 구체적인 문자에 대한 고민을 내보이고 있다. 한자나 한문의 문자로서의 모순이 개선되지 않는 한 이두건 만화를 병행하는 책이건 문제가 많을 수밖에 없고 세종은 새로운 문자를 구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섯 번째 친제 근거는 바로 한글 창제 과정은 비밀 프로젝트였고, 그 주체는 임금이 될 수밖에 없다. 공동 연구라면 비밀 연구라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쉬운 문자를 통한 교화에 대한 세종의 의지를 보여주는 1432년, 1434년 기록의 사실성, 그리고 그 이후로 이에 관한 기록이 안 나오다 1443년 12월에 와서야 창제 사실이 드러난 점 등은 바로 한글 창제 과정이 철저한 비밀 프로젝트였음을 보여 준다. 사대부들의 반발과 고도의 집중 연구가 필요한 연구였으므로 세종은 당연히 비밀리에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일곱 번째 근거는 한글 창제는 임금이 단독으로 추진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일이었다. 강력한 창제 의지와 그것을 떠받들 수 있는 뛰어난 지식과 아이디어가 함께 가능한 일이었다.
여덟 번째,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에 의해 창제된 것이 아니라는 것 자체가 역사적 사실로 기록에 자세히 남아 있다는 점이다. 곧 <훈민정음> 해례본 기록에 집현전 학자들 일부만 창제 후에 도운 것임을 명명백백히 밝히고 있다.
(10) 드디어 전하께서 저희들로 하여금 상세한 풀이를 더하여 모든 사람을 깨우치도록 명령하시었다. 이에, 신이 집현전 응교 최항과 부교리 박팽년과 신숙주와 수찬 성삼문과 돈녕부 주부 강희안과 행 집현전 부수찬 이개와 이선로들로 더불어 삼가 여러 가지 풀이와 보기를 지어 그 대강을 서술하였다.(遂命詳加解釋,以喩諸人. 於是,臣與集賢殿應敎臣崔恒,副校理臣朴彭年,臣申叔舟,修撰臣成三問,敦寧府注簿臣姜希顔,行集賢殿副修撰臣李塏,臣李善老等,謹作諸解及例,以敍其梗槪.)-<훈민정음>(해례본) 정인지 서문
신숙주, 성삼문이 중국 음운학자 황찬의 자문을 구한 것도 창제 이후의 사건이다.
(11) 집현전 부수찬 신숙주와 성균관 주부 성삼문과 행 사용 손수을 요동에 보내서 운서를 질문하여 오게 하였다.(遣集賢殿副修撰申叔舟、成均注簿成三問、行司勇孫壽山于遼東, 質問韻書.)-세종실록, 세종 27년(1445) 1월 7일자
아홉 번째 근거는 세종은 뛰어난 언어학자요 과학자요 예술가였다. 이는 한글이 갖고 있는 다음과 같은 복합적 의미에서 드러난다.
출처 : http://www.cyworld.com/herbviolet/938764
정혜공주라던가
1. 한글의 체계나 구조를 보았을때 혼자 만들수는 없을 것이다.
2. 집현전을 확대-개편 한 이유가 있을테고, 마땅한 이유는 한글 창제 뿐이 없다.
3. 고로 집현전의 도움을 받았을것이다.(대부분 90년대 교육까지는 여기까지 사고방식을 기준으로 교육 받았죠.)
4. 근데 실록 등등 기록을 까면 깔수록 어째 집현전에서 반대한 기록만 쏟아짐.
5. 혜레본 등 여러 구체적인 자료가 나와도 왕실가 일부 사람 제외하면 참여한 사람 기록자체가 보이지를 않음, 분명 이런 큰 대업에는 부가적으로 따른 공에 따른 무언가 제공된 기록이라도 있을텐데 그런것도 보이지 않음.
6. ....현재가능한 해석은 세종대왕이 대부분 작업하고+왕실가 정도가 참여했다라고 이해해야 하는 상황..
이 논란은 정말 심심하면 되풀이 되네요... 집현전이 만들었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은 제발 먼저 검색좀....
#CLiOS
해설만 집현전학자들이 한것이고요.
이건 다들 그렇게 배웁니다. 오래되서 학자들도있구나 하는걸지도요.
#CLi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