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치호씨는 아마 그렇게까지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서 모르는 분들이 더 많을 거여요. 조선이 처음 외국과 쇄국정책을 그만두고 외국과 교류를 시작했을 때 영어를 아주 잘 한 사람이었고 일기를 60년 가까이 꾸준하게 써서 구한말 - 일제시대의 격랑의 시대를 훌륭한 기록을 남겼지요.
그 역시도 일제시대 말엽에 친일을 하긴 했는데. 그 사람을 친일파, 라고 단순하게 딱 잘라 정의하면 얼마나 참 좋을까요. 그런데 그럴 수가 없어요. 정말로 복잡한 사람이거든요.
그는 우선 서자 가문에서 태어났어요. 조상 중에 서출이 있었거든요. 그래서 공부는 아주 잘하고 집도 부자였지만, 서출이라서 무시당했고 본인도 엄청 컴플렉스가 심했어요. 그래서 일본으로, 나중엔 미국으로 유학을 갔지요.
지금이야 유학이 좋은 거지만. 당시엔 어엿한 양반집 자제라면 당연히 조선에서 편안하게 공부해서 출세하는 거지 힘들어 어딘지도 모르고 유학원도 없으며 정보 공유 카페 그게 뭥미? 하는 외국에 가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윤치호는 유학가서 개고생을 했지요. 그리고 그 댓가로 특급 영어실력을 얻었습니다. 그가 남긴 영어 일기는 지금 봐도 굉장히 잘 쓰여졌어요. 근데 중요한 건 영어가 아니고.
처음 유학한 일본. 메이지 유신 이후 엄청나게 문명화된 모습을 보고 젊은 윤치호가 매혹된 것도 무리는 아니었지요. 근데 아시다시피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가 뭔가 해보려서 서둘서둘하다 깻박을 친 게 3일천하의 갑신정변. 당시 윤치호는 20세였지요. 한참 피 끓을 나이건만 윤치호는 대단히 시니컬했고, 그래서 정변과도 연을 두지 않았고 오히려 경거망동했다고 비난했지만, 그러면서도 "아무 짓도 안 할께"라는 말을 믿고 귀국했다고 족족 처형당했던 유학생들의 일로 크게 분노했지요.
그 이후 2년간 중국에서 공부한 뒤, 미국에 유학을 갔는데...
아시다시피 그 당시는 인 더 미들 오브 인종차별의 시대였습니다. 길가던 흑인 잡아다 두들겨 패고 나무에 매달아 죽인다는 - 요즘 인도에서 벌어지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지요. 윤치호는 언젠가 중국인 유학생으로 오인받아 봉변을 당한 뒤 그걸 화내며 일기에 쓴 적이 있었습니다. 근데 그러면서도 미국의 발전된 문명을 보며 무척 부러워했지요.
그렇게 발전된 다른 나라들을 보니 자신의 나라 조선도 그렇게 바꾸고 싶다라고 생각한 것도 당연한 노릇이지요. 근데 근대화에는 아주 깊은 함정이 있었습니다. 열강들은 - 일본까지 포함해서 - 미개한 나라들에게 발달된 문명을 전해줘서 잘 살게 해주겠다는 사명감이 있긴 했습니다. (놀랍지만) 그렇게 살을 찌우고 먹기좋게 다듬어 빨대를 꽂겠다는 생각도 함께 있었지요. 이 두 생각은 모순되어 보이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찰싹 달라붙어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저 나라는 우릴 아무 댓가없이 도와줄 거야."라는 약소국의 생각이란 얼마나 순진했던지요. 여기서 좌절이 시작됩니다. 일본의 야욕이야 두 말할 것도 없지요. 결국 윤치호는 을미사변 때 일본에게 대단한 배신감과 분노를 느끼고 일기에 고스란히 적었습니다.
그 담엔 러시아에게 좀 도움을 받아볼까, 기대를 했는데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갔다가 또 배신감을 맛봅니다. 러시아는 아주 가난한 농노들이 쥐어짜이고 귀족들만 잘 사는 동네 였지요. 윤치호는 일기에다 "러시아의 가난한 사람은 조선보다 못하다."라고 적었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러시아도 식민지 야욕을 보였기에 이쪽에도 등을 돌립니다.
결국 세상에 믿을 놈 하나도 없는 거지요. 그래서 이번에 윤치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와 손을 잡고 어떻게든 해보려 했습니다. 헌데 이번에 뒤통수를 깐 것은 고종이었습니다. 고종이 바란 건 절대왕정이었지 민주주의가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독립협회를 아작내는 한편, 윤치호까지 암살해버리려고 했습니다.
윤치호는 고종이 한 짓거리에 너무도 열받은 나머지 일기에다 "이게 무슨 왕이냐!" 라고 쓰기까지 했지요.
여기까지가 대강의 윤치호의 전반부 인생. 무슨 롤러코스터를 특급으로 탄 것이었지요. 게다가 뭔가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보려 해도 앞서 말한 뒤통수 바바박 맞다보니 모두 허물어지는 것을 자기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뭣보다 조선이 망했지요. 그리고 1912년에 105인 사건에 휘말려 잡혀가서 고문까지 당했고. 이후 윤치호는 정치에 관여하지 않으며 교육과 사회에만 집중하는데 그게 바로 YMCA입니다.
하지만 정치를 안 한다고 안 할 수 있는 게 아니죠. 강한 부정은 긍정이란 말 마냥. 정치에 관여 안 한다는 것이야 말로 고도의 정치적인 포지션인 법이니. 마침내 윤치호는 계속되는 시대의 요구 앞에서 마주서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발휘하게 된 스킬이 바로 모두까기입니다. 한일합병하는 데 자기가 한 몫했다고 자랑하는 친일파도 까고, 미개한 조선인도 까고, 못된 일본 제국주의자들도 까고. 이거 하면 지금은 고양이 집사님이 되어버린 어떤 키보드 워리어 선조님이 떠오르겠지만. 윤치호의 그것은 훨씬 더 맥아리 없고, 지쳤으며 보는 사람이 화가 나는 게 아니라 기운을 함께 쪼옥 빨려서 널부러지게 합니다.
그래도 이런 말은 나오긴 해요.
"그래서 대체 어쩌란 말야?"
라고요.
윤치호의 일기는 굉장히 길고 내용도 많아서 다 소개할 수 없지만 대표적인 사례 두 개만 소개할께요. 하나는 3.1운동. 또 하나는 일장기 게양이었습니다.
3.1운동이 벌어졌을 때. 윤치호는 통탄을 했습니다. 조선 사람들이 천도교의 선동에 휘말려서 해야할 공부를 내팽개쳤다는 거지요. 힘도 없는데 무슨 저항이냐, 힘이 있어야 독립하지 않느냐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뭐 여기까진 그렇긴 한데. 그 다음엔 또 일본의 잔인한 식민통치를 보며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그것만인줄 아세요? 또 다음엔 일본이 들여온 새로운 문물들을 보고 신기해하며 부러워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차피 그런 문물들도 다 일본 지들 배만 불리기 위한 것이라며 씹어댔습니다.
다시 한 번 나옵니다. 그래서 어쩌라고.
물론 사람이란 게 매일 매일 기분 다르고 이 생각 했다가 저 생각이 들 수도 있는 법이지만. 윤치호의 경우에는 그 생각의 출렁임이 대단히 크고 제멋대로였으며 결국엔 자기정당화에는 끝내주는 위력을 발휘했지요. 그 사실이 돋보이는 것이 바로 일장기 게양이었습니다.
조선이 일본에게 먹힌 뒤. (일본기준) 한일병탄 기념일은 (일본 기준에서) 축하날이었지요. 그래서 일장기를 게양을 해야 했는데 - 당연 조선사람들은 안 걸려고 했고 일본 총독부는 걸라고 을러댔지요. 이 때 윤치호의 생각은 이랬습니다.
1. 민영환처럼 자결을 했거나 이승만처럼 외국에 있다면 안 걸어도 된다.
2. 근데 나 지금 사는 데는 일본 지배 받는 조선임.
3. 일장기 거는 걸 치욕이라고 하는데, 나라를 빼앗겼다는 큰 치욕을 받고 가만 있으면서 깃발같은 사소한데 목숨을 검?
4. 걸자.
그래서 윤치호는 자기 동네에서 유일하게 일장기를 걸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말을 듣고 있노라면 뭔가 말이 되는 거 같으면서도 그래도 굴러가는 꼬라지를 보면 자기 합리화 하나는 참 기차게 하는 사람이었지요. 덧붙여 바로 이 날의 일기에서 윤치호는 태극기는 물론 태극 문양까지 몽땅 금지해버린 조선총독부를 알차게 까고 있습니다. 진짜 뒤죽박죽 모두까기이지요.
이렇게 윤치호 일기를 읽다보면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이 아저씨 뭐야" 이긴 합니다만. 그런데 그가 이런 생각을 한데 연유가 있긴 했습니다. 이 사람 좌우명이랄까 모토가 그런 거였어요. "힘이 곧 정의다." 일기에도 몇 번이나 나와요. 힘이 있으면 다 옳다는 사회계약론이고, 그래서 조선이 일본에게 먹힌 것도 힘이 없어서 어쩔 수 없다, 라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하죠.
그래서 결국 윤치호가 친일에 동참한 것은 YMCA의 총무로서 열성 친일파였던 신흥섭의 삽질도 있었지만, 체포당한 기독교의 사람들을 관대하게 처분해주는 댓가로 그리되었다고도 하지만. 그 사람의 철학에 따르면 어떤 이유가 있든 힘 있는 자를 따르게 되었을테니 다른 길은 없었겠지요.
그런데 이런 생각에는 아주 크나큰 한계가 있습니다. 그의 생각은 지금 조선이 힘이 없으니까 어쩔 수 없다. 그러니까 열심히 공부하고 일해서 힘을 키우자! 라는 건데... 이게 참 깜찍한 생각인데. 아시잖아요? 일제시대 때 아무리 조선인이 죽어라 노력해도 반도인일 뿐이고, 차별에 막힐 수 밖에 없지요. 그런데 무슨 힘을 키워서 물어뜯어요. 만년 발닦이일 뿐이지.
사소한 예로 1921년 경성의전의 동맹휴학이 아주 대놓고 조선인 학생을 차별한 교수 및 학교의 태도에 분통을 터뜨려 시작된 거야 유명한 일이고.
그래도 많은 친일파 지식인들은 조선인들이 일본을 위해 열심히 싸우면 모든 조선인들의 계급이 올라가리라는 깜찍하고도 낙관적인 생각을 하고 전쟁 참여를 독려했다죠. 어쩜 그렇게 머리에 꽃 하나 꽂은 거 마냥 순진하셨나 몰라요. 그래서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쟁터에서, 탄광에서 죽어갔고 전범으로 처벌받았으며 정신대도 있었지요.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 처우가 좀 나아졌나요?... 태평양 전쟁 말기는 진짜 지독했는데.
그리고 "힘이 곧 정의다!"라는 말 어디서 들어본 거 같지 않나요. 이건 구닥다리 게임이나 만화에서 나온 조연 악역이 외치곤 하지요. 보통 이런 캐릭터는 주연에게 엄청 두들겨 맞아 쓰러지거나 사상개조당하기 일쑤죠. 그 생각이 나빠서? 그럴 수도 있지요. 솔직히 힘이 없으면 아무리 억울하고 분해도 닥치고 굽히고 살란 말이나 다름없잖아요. 그리고 이런 주장은, 조봉암의 묘지에 새겨진 글귀로 단박에 힘을 잃는다고 봐요.
"우리가 독립운동을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 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안 될 일이기에 목숨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
결국 윤치호는 역사의 흐름에 둥둥 떠내려 가기만 할 뿐. 거역하지도 뛰어넘지도 못했어요. 그러니까 주역이 아니라 조연이지요. 그래서 그가 똑똑하고 뛰어났음에도 존경할 수 없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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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djuna.kr/xe/index.php?mid=board&search_keyword=LH&search_target=nick_name&document_srl=11317256
제가 그시대에 태어났으면 어떤 사람이 됐을지...
#CLiOS
윤치호에게는 사회진화론이 뿌리깊게 내려박혀있다는것이 그의 일기속에 많이 묻어있더군요.
그의 일기를 보면 세상만사를 너무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그런시각들이 투성이라..
from C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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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천에 구백구십구는 저것에서 크게 다르지 못했을 거라고도 생각합니다.
그는 용감하지 못했지만 분명히 똑똑한 사람이었고, 나름 열심히 노력하며 성실히 산 사람입니다.
조선인 2500만 가운데 당당히 윤치호를 비난할 수 있을 정도로 자기가 뭐 한 사람들...
....만 명이나 될까 싶습니다.
2499만 명보다 낫고 만 명 보다 못한 사람이면, 아주 훌륭하게 윗 등급이군요.
이명박도 교회가면 자기 죄를 사해 달라고 용서를 빕니다
윤치호가 무슨 죄를 지었는데요?
from CV
아랫 계급들도 조선시대엔 할 수 없었던 이를테면 순사니 하급군인이니 경찰이니
하급직 공무원이니 교사 등을 하면서 '내가 이렇게 살 수 있다니 일본 만세' 하며 친일들을 했고
윗 계급들은 물론 더 영화롭게 살려고, 더 큰 돈을 벌려고 더 큰 친일들을 했지요.
이병철은 일본인들도 내가 잘 이용해 먹기만 하면 좋은 일이지 뭐 하면서
일본 은행의 돈을 빌려
쌀과 땅을 매점매석해 일본으로 수출해 엄청나게 돈을 벌었습니다, 재벌 됐죠.
교과서에는 마치 돈도 안 주고 쌀을 실어내 간 것처럼 '수탈'이라고 표현하지만
실상은 조선인들이 아주 적극적으로 가담한, 일본-조선 쌀 가격차를 이용한
조선 쌀 매점매석, 일본 대량 수출이었습니다. 조선과 일본의 쌀 가격차는 40년대 중반까지도
2배 이상.
그 시대를 살았다고 친일을 했다고 할 수 없죠.
일상의 연장이라면 친일이라 볼 수 없어죠.
하지만 신분상승이나 욕망의 실현으로 한 행위만 친일이라 봐야합니다.
이병철의 경우는 친일과 기업인의 일상이 겹쳐있는 경우입니다만 그로인한 한국인의 고통을 불러 왔다면 친일 행위라 봐야겠죠.
사고가 일관되며 망한 조국을 사랑하긴 하지만 방식 자체는 속국에서 성공하자. 이런 마인드.
걍 이놈은 나쁜놈 저놈은 무능한놈 동네 사람들은 멍청한 놈들...
걍 나 혼자 조용히 숨만 쉬고 살다 가련다 파였죠.
이완용 같은 사람이 박쥐죠, 친중 친러 친미 친일 기냥 상황 따라 휙휙휙.
그나마 제가 가장 좋게 평가해 주는거 같은데, 저조차도 떠받들기보단
이해한다, 그럴 만 했다 정도인데요.
총독부 관리 제국 판검사 제국 경찰 제국 군인 등이 다 출세하고 나라를 휘어잡은 한국이라도
그분들 관뚜껑 열고 나오시지 않았습니다.
그거 보면, 그분들도 '뭐 조선이 이렇지 뭐, 에휴...' 하고 포기하신 거 같은데요.
윗글 속의 링크는 안 열리네요.
http://www.djuna.kr/xe/index.php?mid=board&document_srl=11317256
이 링크는 열려서, 제가 하나 따왔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여전히 식민상태라면
우리가 3.1운동을 평가절하하고 무시하며
윤치호같은 사람을 더 높게 평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시대가 그렇게 흘러가지도 않았고 만약이라는 것은 현실에 없습니다.
우리는 열강에 의해 독립했으나. 정체성을 찾아야 했습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하지 못했을 지언정.
독립된 국가를 유지할 힘이 필요했다는거에요.
따라서 희생한 독립운동가를 높이고 3.1운동을 높게 평가하는거죠.
그리고 그것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는 역사의 깊이가 짧은 미국조차
자국의 독립과정과 그 당위성에 관해 수십권의 책을 달달 외우는 것과 같다고 보면 될 것 같아요.
게다가 현실은 우리나라의 힘이 여전히 미약하여 주변 강국에 치이는 외교를 할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윤치호와 같은 사람을 재평가하기엔 여전히 이르다고 보는 것입니다.
사상이 바뀌고 바뀌고 바뀌어서 순응하는 사람을 재평가하기보다는
재대로 평가받지 못한체 잊혀저가는 독립운동가들부터 더 찾고 발굴해서 평가해야 한다고 보고요.
이렇게 사상이 바뀐 사람이 이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끝내 친일 행적으로 말년을 망가트린 사람이 많아요.
윤치호는 자료가 상세히 남아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 쪽일 뿐이죠.
#CLi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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