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꽃게탕을 먹어 본 적이 없다.
풍족의 기준은 개인에 있다지만, 몇 초정도 생각을 곱씹어 봐도
우리 집은 가난하다고 하기에 삼시세끼는 다 챙겨 먹는 집이였고,
호텔 외식은 못하더라도 한 달에 두어 번은 부모님과 집 근처 어딘가로 가서 외식정도는 되는 우리집이였다.
헌데 음식이라는 것도 연이 없는지 21살이었던 해의 10월이나 되어서야 나는 내가 꽃게탕을 먹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때에는 이미 내가 알 수 없는 어른들의 사정들이 집에서 하나 둘씩 생겨, 조금씩 조금씩 집에서 절약이라는 말이 빈
번해지는 것만큼 반대로 외식하러 가자는 아버지의 말씀이 뜸해진 오륙년 정도 지난 어느 날 이였다.
7년 전 10월의 어느 날. 어머니는 내게 물으셨다.
혹시 먹고 싶은 게 있니? 이제 며칠만 더 있으면 2년 동안 못 볼 텐데……. 그 전에 맛있는 거라도 엄마가 해줘야지.’ 라며
조금은 슬픈 얼굴로 내게 물으시던 어머니.
당시 나는 남들 다 가는 군입대인만큼 별 다른 생각 없이 신변정리를 하거나 미뤘던 사람들을 만나며 지냈기에
나의 무심함에 새삼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번거롭게 뭔가 하시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 드리려다가,
어머니의 눈을 보니 먹먹해지는 마음을 떨치듯이 말한 음식이 꽃게탕 이였다.
어머니도 좋아하시지만 배불리 먹기엔 가격이 녹록치 않아 항상 나중을 말했던 꽃게탕.
어머니는 ‘꽃게탕? 그래 요즘 꽃게 괜찮다고 하더라. 엄마가 맛있게 해줄게’ 라며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그 날 방에 들어가시는 어머니의 걱정하시는 눈을 어쩐지 모르는 척 했던 거 같다.
일주일 정도를 남긴 그 때의 나는 젊은 날의 2년을 보상이라도 받는다는 느낌으로
낮에는 전날의 약속과 무리한 술자리로 잠을 잤고,
해가 떨어지고 나면 일어나 또다시 사람들을 만나느라 때때로 밖에서 밤을 보내며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일주일에 절반 쯤 되었었다.
그렇게 방탕하게 보내던 때에, 늦은 시간 익숙지 않은 곳에서 일어난 어느 날에
아버지의 ‘아들아, 낭만 그만 찾고 이제 들어오너라.’ 라는 문자를 받고도 이틀 정도 이후에 집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이틀을 남긴 날 이였다.
으레 어른들이 하는 별거 아니다. 시간 금방 간다 유의 위로를 받으면서 친척 어른들과 점심을 먹고,
아버지는 그게 모자르다고 생각하셨는지 나를 위로하신다며 오랜만에 외식을 위해,
집 근처에 자주 가던 아귀찜집으로 갔다.
말씀이 별로 없으신 어머니 옆의 약주를 걸치신 아버지는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으신지 먹고 싶은 걸 다 먹으라며
내게 메뉴판을 주셨고, 아귀찜집에 있을 법한 메뉴들을 보다가 꽃게탕이라는 글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하루 종일 힘없던 어머니가 생각나 농담으로 무슨 말이라도 해야 될 듯 싶어,
‘아 엄마 그러고 보니까 나 꽃게탕 해준다고 하더니~ ’ 라며 농담을 했다.
지금도 그날의 어머니의 힘없는 웃음이 기억난다.
그건 내 인생 최악의 농담이었다.
청춘의 연애는 불탄다. 몇 시간 뒤면 입대한다는 생각이 내 머리를 좀 먹고 있었고
나는 결국 먹는 둥 마는 둥 아귀찜을 해치운 뒤에, 내게 천금 같은 이 남은 몇 시간을 보낼 사람은
응당 나를 가장 많이 사랑해준 사람이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점에서 나와 오래 만났던 지난 여자 친구를 만나러 택시를 탔다.
지금은 그 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차가 끊겨 택시를 타고 집 앞에 내릴 때쯤에야 나는 다시 죄스러움이 내 몸 구석구석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아주 능숙하게 소리를 내지 않으며 집 안에 들어왔다는 생각을 할 때쯤, 열린 안방문 안쪽으로 어머니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들아, 냄비에 있는 것 좀 꺼내 먹고 자렴…….’
수 초뒤 나는 내게 다가올 사실을 직감하고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미끄러지듯이, 하지만 조용하게 걸어간 주방에는 아무도 먹지 않은,
일주일은 족히 된 거 같은 꽃게탕이 아주 커다란 냄비에 가득 있었다. 내 것이라며 아버지조차 손도 안대셨을 것이 뻔한 냄비뚜껑.
언제 죽었을지 모르는 탕 속의 꽃게들의 비웃음이 들렸다.
멍하니 서 커다란 냄비를 바라보다가 나는 저녁 때 어머니께서 보이셨던 옅고 슬퍼 보이는 얼굴이 생각났다.
무기력해졌다.
결국 하나 꺼내먹지도 못한 채 나는 군 입대를 했고,
훈련 중에 ‘나무는 가만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효를 다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문구를 보았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9월 달이니, 얼마 전의 일이다. 나는 내 생일을 축하해주러 온 친구들과 함께 노량진 수산시장으로 갔다.
아주 거하게 먹을 생각이였다. 친구들과 나는 무엇을 먹을지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고 그 시간은 아주 유쾌했다.
웃고 떠드는 와중에 내 눈을 사로잡는 것은 흙 속에서 얌전히 나를 지켜보는 꽃게의 눈이었다.
그 꽃게는 나를 쳐다 보고 있었다.
7년 전의 어머니의 눈과 탕 속의 비웃음이 내게 다시 들려왔다.
집에서 없는 찬에 식사하실 부모님이 생각났다.
나이를 먹고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던 최근의 나날들이 꽃게를 덮은 흙처럼 가루가 되어 노량진을 흩날렸다.
군 시절 읽었던 논어의 한 구절이 생각나며, 자식이란, 혹은 나는 어찌나 이렇게 부모님의 그것에 못 미치는지 탄식했고,
그 글귀는 나를 조롱했다.
어느 날 내가 당당히 꽃게탕을 먹게 될 날이 올까 하고 생각한다.
부모님의 나이보다 많아질 나의 후년엔 그럴 수 있을까.
나는 꽃게탕을 먹어 본 적이 없다.
풍족의 기준은 개인에 있다지만, 몇 초정도 생각을 곱씹어 봐도
우리 집은 가난하다고 하기에 삼시세끼는 다 챙겨 먹는 집이였고,
호텔 외식은 못하더라도 한 달에 두어 번은 부모님과 집 근처 어딘가로 가서 외식정도는 되는 우리집이였다.
헌데 음식이라는 것도 연이 없는지 21살이었던 해의 10월이나 되어서야 나는 내가 꽃게탕을 먹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때에는 이미 내가 알 수 없는 어른들의 사정들이 집에서 하나 둘씩 생겨, 조금씩 조금씩 집에서 절약이라는 말이 빈
번해지는 것만큼 반대로 외식하러 가자는 아버지의 말씀이 뜸해진 오륙년 정도 지난 어느 날 이였다.
7년 전 10월의 어느 날. 어머니는 내게 물으셨다.
혹시 먹고 싶은 게 있니? 이제 며칠만 더 있으면 2년 동안 못 볼 텐데……. 그 전에 맛있는 거라도 엄마가 해줘야지.’ 라며
조금은 슬픈 얼굴로 내게 물으시던 어머니.
당시 나는 남들 다 가는 군입대인만큼 별 다른 생각 없이 신변정리를 하거나 미뤘던 사람들을 만나며 지냈기에
나의 무심함에 새삼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번거롭게 뭔가 하시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 드리려다가,
어머니의 눈을 보니 먹먹해지는 마음을 떨치듯이 말한 음식이 꽃게탕 이였다.
어머니도 좋아하시지만 배불리 먹기엔 가격이 녹록치 않아 항상 나중을 말했던 꽃게탕.
어머니는 ‘꽃게탕? 그래 요즘 꽃게 괜찮다고 하더라. 엄마가 맛있게 해줄게’ 라며 서둘러 방으로 들어가셨다.
나는 그 날 방에 들어가시는 어머니의 걱정하시는 눈을 어쩐지 모르는 척 했던 거 같다.
일주일 정도를 남긴 그 때의 나는 젊은 날의 2년을 보상이라도 받는다는 느낌으로
낮에는 전날의 약속과 무리한 술자리로 잠을 잤고,
해가 떨어지고 나면 일어나 또다시 사람들을 만나느라 때때로 밖에서 밤을 보내며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일주일에 절반 쯤 되었었다.
그렇게 방탕하게 보내던 때에, 늦은 시간 익숙지 않은 곳에서 일어난 어느 날에
아버지의 ‘아들아, 낭만 그만 찾고 이제 들어오너라.’ 라는 문자를 받고도 이틀 정도 이후에 집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이틀을 남긴 날 이였다.
으레 어른들이 하는 별거 아니다. 시간 금방 간다 유의 위로를 받으면서 친척 어른들과 점심을 먹고,
아버지는 그게 모자르다고 생각하셨는지 나를 위로하신다며 오랜만에 외식을 위해,
집 근처에 자주 가던 아귀찜집으로 갔다.
말씀이 별로 없으신 어머니 옆의 약주를 걸치신 아버지는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으신지 먹고 싶은 걸 다 먹으라며
내게 메뉴판을 주셨고, 아귀찜집에 있을 법한 메뉴들을 보다가 꽃게탕이라는 글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하루 종일 힘없던 어머니가 생각나 농담으로 무슨 말이라도 해야 될 듯 싶어,
‘아 엄마 그러고 보니까 나 꽃게탕 해준다고 하더니~ ’ 라며 농담을 했다.
지금도 그날의 어머니의 힘없는 웃음이 기억난다.
그건 내 인생 최악의 농담이었다.
청춘의 연애는 불탄다. 몇 시간 뒤면 입대한다는 생각이 내 머리를 좀 먹고 있었고
나는 결국 먹는 둥 마는 둥 아귀찜을 해치운 뒤에, 내게 천금 같은 이 남은 몇 시간을 보낼 사람은
응당 나를 가장 많이 사랑해준 사람이여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점에서 나와 오래 만났던 지난 여자 친구를 만나러 택시를 탔다.
지금은 그 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차가 끊겨 택시를 타고 집 앞에 내릴 때쯤에야 나는 다시 죄스러움이 내 몸 구석구석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아주 능숙하게 소리를 내지 않으며 집 안에 들어왔다는 생각을 할 때쯤, 열린 안방문 안쪽으로 어머니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들아, 냄비에 있는 것 좀 꺼내 먹고 자렴…….’
수 초뒤 나는 내게 다가올 사실을 직감하고 다리에 힘이 풀리기 시작했다.
미끄러지듯이, 하지만 조용하게 걸어간 주방에는 아무도 먹지 않은,
일주일은 족히 된 거 같은 꽃게탕이 아주 커다란 냄비에 가득 있었다. 내 것이라며 아버지조차 손도 안대셨을 것이 뻔한 냄비뚜껑.
언제 죽었을지 모르는 탕 속의 꽃게들의 비웃음이 들렸다.
멍하니 서 커다란 냄비를 바라보다가 나는 저녁 때 어머니께서 보이셨던 옅고 슬퍼 보이는 얼굴이 생각났다.
무기력해졌다.
결국 하나 꺼내먹지도 못한 채 나는 군 입대를 했고,
훈련 중에 ‘나무는 가만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효를 다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문구를 보았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9월 달이니, 얼마 전의 일이다. 나는 내 생일을 축하해주러 온 친구들과 함께 노량진 수산시장으로 갔다.
아주 거하게 먹을 생각이였다. 친구들과 나는 무엇을 먹을지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고 그 시간은 아주 유쾌했다.
웃고 떠드는 와중에 내 눈을 사로잡는 것은 흙 속에서 얌전히 나를 지켜보는 꽃게의 눈이었다.
그 꽃게는 나를 쳐다 보고 있었다.
7년 전의 어머니의 눈과 탕 속의 비웃음이 내게 다시 들려왔다.
집에서 없는 찬에 식사하실 부모님이 생각났다.
나이를 먹고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던 최근의 나날들이 꽃게를 덮은 흙처럼 가루가 되어 노량진을 흩날렸다.
군 시절 읽었던 논어의 한 구절이 생각나며, 자식이란, 혹은 나는 어찌나 이렇게 부모님의 그것에 못 미치는지 탄식했고,
그 글귀는 나를 조롱했다.
어느 날 내가 당당히 꽃게탕을 먹게 될 날이 올까 하고 생각한다.
부모님의 나이보다 많아질 나의 후년엔 그럴 수 있을까.
나는 꽃게탕을 먹어 본 적이 없다.
이런..ㅠㅠㅠㅠㅠㅠㅠ
게는 왜 이렇게 슬픈 생물인지- 안도현 시인의 간장게장도 엄청 슬프고
(읽다가 울어본 시는 그 시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나저나 여기서 눈치없는 네이버 검색 광고는 꽃게전문 도매점과 해물요리 전문점을 추천해주고 있네요ㅎㅎㅎ
건망증이 심해지는건가...
#CLiOS
꽃게가 비싼 음식도 아니고 서민 음식인데 꽃게 사서 손질하는게 뭍에서만 자란 사람은 힘들 수 있죠. 은근히 어머니의 편식 습관이 자녀에게도 물려 집니다. 저도 대학가서 감자탕,순대국 처음 먹어봤고 가지도 우리집엔 올라오는 날이 한번도 없습니다.(그외에도 많지만 당장은 생각 안나네요) 어렵게 자라긴 했지만 극빈층도 아니었고 감자탕 순대국이 비싼 음식도 아니었지만 나중에 서른살 넘어 어머님께 물어 봤더니 어머님 취향이 아니었던 음식이더라구요.
보통 아내의 취향이 아닌 음식들은 남편과 자녀에게 허락되지 않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