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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박정희에 대한 정치학적 평가 : 인간, 근대화, 유신, 그리고 몰락 - 고려대 임혁백 교수 1

2012-09-27 14:13:21 118.♡.103.3
Athenasia

 

 

어제 "IMF 책임의 원류를 박정희식 경제개발 모델에서 찾아야 하는가" 글 올렸던 적이 있지요.

 

 

고려대 임혁백 교수님 글 가져와 봅니다.

 

"박정희식 근대화, 산업화 모델은 다른 나라에서도 경험한 전형적인 모델이며, 국가-관료집단이 주도하는 산업화 과정에서 권위주의적 지배구조는 불가피했다"가 주요 요지인 보수진영의 주장에 대해 아주 세련되고 훌륭하게 논박한 좋은 글입니다. 

 

산업화 모델이 적합했는가, 필요악이었는가에 대한 논의 뿐만 아니라, 인간 박정희와 근대화 경제정책, 정치적 시각, 유신 체제를 총망라합니다. 

 

많이 길지만 그러나, 꼭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글이라 생각해서 가져와 봅니다.  

박정희식 "성장 이데올로기"에 대한 논점은 하단 굵은 글씨 부분만 보셔도 될 듯 하네요.

 

 

 

http://www.goodforum.org/bbs/view.php?id=column_07&page=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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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한국학 연구소 연례 학술회의, 2009년 12월 18일 명지대학교 서울 캠퍼스 행정동 3층 대회의실



1. 머리말

박정희는 우리 시대를 비쳐주는 거울이다. 박정희 시대의 성공과 실패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남아 우리의 경쟁력의 원천이 되기도 하고 우리가 선진국으로 도약하는데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박정희에 관한 연구는 끝이 없다. 한국형 산업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박정희 모델을 연구해야하고, 한국형 권위주의, 한국형 민주화를 밝히기 위해서도 박정희의 유신체제의 수립과 몰락을 연구해야한다.

본 논문은 박정희에 대한 어떤 특정한 정치적 견해나 선입견을 가지고 서술하지는 않는다. 가능한한 사회과학적인 가치자유적 (wertfreiheit) 입장에서 객관적이고 초당적 입장에서 박정희를 분석하려하고 있다. 먼저 박정희가 누구인가를 밝힐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연대기적으로 박정희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어떻게 교육받고 군사훈련을 받고 쿠데타를 하고 유신이 제2의 궁정쿠데타를 하고, 한국을 산업화시키고, 비극적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 나는 박정희의 인물을 사회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싶은 것이다.

둘째, 박정희는 무엇을 하였는가를 논의할 것이다. 우리는 많은 박정희 연구를 통하여 박정희가 무엇을 했는가에 관해서는 많이 알고 있다. 본 논문은 박정희의 업적, 실패에 관해 새로운 사실을 발굴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역사학자들의 몫이 아닌가 생각된다. 본 논문은 역사적으로 알려진 박정희 업적과 실패한 정책, 정치에 관해서 재평가하려는 것이다. 

셋째, 박정희는 왜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는가를 분석할 것이다. 우리는 박정희의 성공에 관해서는 많은 분석을 했고, 증언도 있었고, 새로운 자료들도 발굴해왔다. 그러나 박정희의 죽음에 관해서는 이야기가 부족하였다. 박정희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궁정동의 향연과 김재규 일당의 궁중반란에 관해 선정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한다. 그러나 사회과학적으로 박정희의 죽음을 가져온 원인과 근인, 구조적 조건 (오일쇼크, 78년 총선거 패배 등)과 박정희를 비롯한 주요 행위자의 전략적 선택, 국내적 요인과 국제적 요인, 그리고 이 모든 요인들의 복합적 결과로서의 박정희의 죽음은 충분하게 논의되고 있지 않았다. 본 논문은 역사를 변화시킨 박정희의 죽음을 가져온 사회과학적 인과관계를 밝혀보려고 시도하고 있다.

2. 박정희, 그는 누구인가?

(1) 마키아벨리적인 근대 군주 

박정희는 마키아벨리적인 비르투를 가진 근대 군주 (modern prince)였다. 박정희는 한국의 현대 정치지도자중 전략적이고, 합리적이며, 그러면서도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의지를 다지는 결의에 찬 지도자였다. (임혁백, 2004)

무엇보다도 박정희는 전략적인 지도자였다. 그는 이데올로기적이지 않았다. 선택이전에 자신의 신념과 공약 (pre-committment)에 따라 자신이 가야할 진영을 미리 결정하는 것이 이데올로기적 결정이고 기회주의적으로 자신에게 가져올 예상 수익을 계산하여 최적의 선택을 하는 것이 합리적 선택이라면 박정희는 합리적 선택을 한 것이다. 이데올로그와는 달리 기회주의자는 항상 합리적 선택을 한다. 해방 전후의 박정희의 행동을 보고 박정희가 기회주의자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박정희가 기회주의자라고 비판을 받는 것이야말로 박정희가 전략적이고 합리적인 행위자이지 이데올로그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다.

전략적 또는 합리적 행위자로서 박정희의 선택과 행동은 그의 인생 여정에서 수 없이 발견된다. 박정희는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기획하면서 수입대체산업화 전략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국제정치경제 환경이 바뀌자 그는 미련없이 수출주도형 성장전략으로 전환하였고  그 전략적 선택은 적중하여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내었다.(기미야 다다시, 2008)

유신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도 박정희는 마키아벨리적인 비르투를 발휘하였다. (임혁백, 2004, 2005) 박정희는 위기를 기회로 이용하고, 기회구조를 활용하고, 제약구조를 기회구조로 바꾸는 비르투를 발휘함으로써 유신을 성공시켰다. 마키아벨리는 신군주의 제일가는 덕목은 자신이 계속 집권해야하는 필요(needs)를 계속 창출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임혁백, 2005: 139) 10월 유신쿠데타를 감행하면서 박정희는 왜 유신이 단행할 수 밖에 없는가하는 유신의 필요를 보통사람들에게 설명하고 받아들이게 (암묵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virtu)이 있었다. 그는 71년 총선패배 후 사회적 갈등이 표출되자 이를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발동에 이용하였으며, 70년대 초 금융위기를 초헌법적인 8.3 경제조치 발동에 이용하고, 안보위기가 시들해지자 의제를 재빨리 통일논의로 전환시킴으로써 국민들의 기대심리를 부풀려 놓았다. 박정희는 정상적 상황에서 불가능한 유신독재체제의 수립을 위기를 통해, 위기를 조성하여,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여 돌파해나간 마키아벨리적인 신군주였다. (임혁백, 2005: 139)  


(2) 친정치적 행동주의 장교로서의 박정희

군출신인 한용원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창군 후 한국 장교단 내부에서는 두 갈래의 정치적 행동주의가 있었는데, 이종찬 장군은 군부의 정치개입을 반대하는 반정치적 행동주의를 대표하고 있었고, 박정희 장군은 군부의 정치적 개입을 지향하는 친정치적 개입주의를 대표하고 있었다. 

한용원교수가 이야기하는 이종찬의 반정치적 행동주의와 박정희의 친정치적 행동주의는 스테판의 구직업주의(old professionalism)와 신직업주의(new professionalism)를 닮았다. 스테판에 의하면, 구 직업주의 장교는 대외안보(external security)에 치중하나, 신직업주의 장교는 대내 안보(internal security)에 열중한다. 구 직업주의 장교는 문민정부 통치의 정당성을 받아들이나, 신직업주의 장교는 항상 문민지배의 정통성에 도전할 자세가 되어있다. 구직업주의 장교는 정치적 기술과 양립할 수 없는 고도로 전문적이며 특화된 군사 기술을 갖고 있으나, 신직업주의 장교는 군사와 정치가 서로 연관된 기술을 갖고 있다. 구 직업주의 장교는 군대의 행동반경을 군대 내로 스스로 제한하고 있으나 신 직업주의 장교의 행동반경은 제한이 없다. 구 직업주의 장교는 군인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한다는 사회화과정을 밟았으나, 신 직업주의 장교는 정치화된 군인의 길을 가도록 사회화과정을 밟는다. 마지막으로, 구 직업주의 장교는 비정치적인 군대와 군부에 대한 문민통제를 받아들이나, 신 직업주의 장교는 군부의 정치경영주의에 의거하여 자신의 역할의 확대를 꽤한다. (A. Stepan: "New Professionalism and Internal Warfare and Military Role Expansion")

박정희는 전역하면서 “다시는 자신과 같은 불행한 군인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취지의 비장한 전역사를 하였다. 이 전역사는 박정희가 구 직업주의에 충실한 반정치적 행동주의 장교로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박정희는 부산정치파동 때부터 친정치적 행동주의자였고, 문민정부의 정통성에 항상 도전하려했던 쿠데타 음모자 (coup monger)였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직업군인으로 설정함으로써 자신의 행동 반경을 병영 내로 한정시키지 않았고, 반대로 신직업주의의 군사정치적(politico-military) 경영주의에 의거하여 군부의 역할을 정치에 개입하는 것까지 포함시킨 군부역할확대주의자였다.


(3) 메이지 근대화 모델의 수제자

박정희는 이데올로기적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학습하고, 기획하고, 실행에 옮긴 근대화모델은 일본의 메이지 유신모델이었다.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 ‘민족중흥’이라는 자신의 프로젝트를 ‘군국주의적’으로 달성하려하였다. 박정희의 통치모델은 명치유신모델이었다.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라는 자신에게 부여된, 또는 스스로 부과한 역사적 사명을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완수하려 하였던 것이다. 박정희에게 민주주의는 한국인들에게 '잘 맞지 않는 옷'이었다.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사실 자체가 그가 자유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박정희는 자유 민주주의를 구하기 위해 쿠데타를 한 것이 아니다. 권력을 찬탈한 박정희가 그리고 있는 정치체제는 자유 민주주의가 아니었다. 군사쿠데타 이전부터 박정희가 이상적으로 그리고 있는 국가모델은 일본의 명치유신 국가였다. 

일본의 명치체제는 국가의 정점으로서의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 군부를 중심으로 한 혁신적 관료들의 엘리트주의적 지배구조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박정희는 바로 이 명치체제를 자신의 정치모델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제국주의가 남긴 유산 은 사회인프라와 산업시설이 아니라 일본군국주의의 메이지 근대화 아이디어였고 그 메이지 발전모델을 가장 잘 학습한 ‘자손’ (offspring)이 박정희였다. (Eckert, "Offspring of Empire) 일본 식민지배는 박정희라는 일본 모델을 우등으로 학습한 자손을 물려놓음으로써 그들이 퇴각하고 난 뒤에도 두고두고 한반도에 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3. 박정희, 그는 무엇을 하였는가?

박정희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은 정신분열증적 (schizophrenic)이다.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은 박정희를 ‘단군이래의 가난을 해소하고 민족을 중흥시킨 영도자,“ ”조국근대화의 아버지,“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여 동아시아발전모델의 원형을 만든 산업화 지도자,“ ”’싸우면서 건설‘한 안보와 경제성장 병행발전론자“로 기억하고 싶어 한다. 

반면에 진보주의자들과 민주화론자들은 박정희를 ”민주적 헌정체제를 파괴하고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까만 선글라스를 낀 군부집정관(praetorian),“ ”일본 제국, 남로당, 미국 등 당대의 권력에 편승하여 권력을 장악 유지하려한 기회주의 정치군인,“ ”제3공화국의 민주헌법을 수호해야하는 대통령의 헌법적 의무를 망각하고 오히려 초헌법적, 탈헌법적으로 강압적 정보통치를 한 ’행정적 민주주의‘자,“ ”자신이 만든 민주헌법을 유린하고 한국 역사상 가장 강압적이고, 초법적이고, 독재적인 유신체제를 수립한 유신군주,“ ”분배보다는 성장, 소비보다는 성장을 우선하는 권위주의적 개발모델을 ’돌진적‘으로(한상진), 압축적으로 달성한 개발독재자,“ "긴급조치 발동을 통해 많은 민주인사들을 박해한 인권유린자”로 기억한다. 박정희를 둘러싸고 한국사회는 집단적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     

그렇다면 박정희가 18년 권좌에 앉아서 그가 이룩한 것은 무엇이며, 그가 실패한 것은 무엇이며, 그가 물려준 긍정적 유산과 부정적 유산은 무엇인가?

(1) 1961년 5월 16일 조선왕조 이래 최초로 군부쿠데타를 성공시키다.

5.16 군부쿠데타는 박정희와 쿠데타 주역들이 미화하고 있는 것처럼 사회세력의 유인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사회세력의 유인 (pull)의 요소보다는 군부자체의 조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돌파 (push)의 요인이 강하다. 사회세력의 유인이 아니라는 증거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흔히 박정희 정권의 추종자들은 제2공화국이 “시위로 일어서고 시위로 망했다”고 조롱하면서, 연속적인 시위로 인한 통치불능의 상태를 시정하라는 안정 희구적인 중산층의 사회적 요구에 의해 쿠데타가 촉발되었다고 주장하나, 이 주장은 ‘시위 민주주의’ (demo cracy by demonstration)의 현상이 4월 2일의 대구충돌을 기점으로 해서 급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근거가 없는 것이다. 경제위기로 인한 민생고가 군부의 정치개입을 불러왔다는 주장도 민주당 집권기간 중 경제가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고, 실업률은 감소하고 있었으며, 미국은 원조를 증액할 것을 약속했고, 한일양국이 관계정상화를 시도했다는 반증에 부딪치면 설득력이 없다. (Im, 2009) 결국 1961년의 군부쿠데타는 사회세력의 유인이라는 정당성의 근거를 확보하지 못한, 권력에 굶주린 군부 내의 불만 소외세력의 주도에 의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태생적인 정통성의 결함은 박정희로 하여금 2년간의 군부직접통치를 거친 뒤 형식적인 자유민주주의로 복귀하게 하는 압력으로 작용하였다. 

(2) 한국 근대화의 아버지: 한국에서 산업혁명을 성공시키고 단군 이래 최초로 보리고개를 없애다.
   
박정희에 관한 긍정적인 평가는 대부분 그가 한국의 후발산업화를 성공시켰고 단군 이래의 가난을 제거하였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한민국을 산업대국으로 바꾸어 놓았다. 박정희의 산업화 모델은 ‘형평성을 동반한 성장’, ‘수출 주도 산업화’를 특징으로 하는 동아시아형 산업화 모델의 전형이 되었다. 박정희의 성공은 후후발 산업화 국가로부터 ‘한국으로부터 배우자' (learning from Korea)로 이어졌다. 신권위주의 경제개발 모델로서 ‘박정희 모델’은 마하티르의 ’동방정책‘ (look east policy) 뿐만 아니라, 등소평이 공산당의 권력독점을 포기하지 않고 권위주의적 경제발전을 이루기 위한 정책의 모델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냉전 붕괴 이후에 동구에서는 ‘박정희 모델’을 모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활발하였다. 

그렇다면 박정희의 산업화 성공을 어떻게 평가해야하는가?  (임혁백 2009)

(1) 박정희의 성공을 설명하는 첫 번째 이로는 내생적(endogenous) 발전이론이다. 박정희의 탁월한 전략적 선택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는 월러스타인이 이야기하는 ‘초청에 의한 상승전략’(promotion by invitation)에 의해 자본주의 세계경제 내에서 주변부에서 반주변부로의 상승에 성공한 대표적 사례를 만들었다. “초청에 의한 상승전략”은 세계자본주의 경제의 팽창기에 중심부의 자본가들과의 긴밀한 협조아래 즉 중심부의 초청에 의해서 주변부의 지위상승을 꾀하는 전략이다 (Wallerstein, 1979; 김성국, 1984; 김성진 1994) 그러면 1960년대에 왜 한국이 초청을 받게 되었는가? 

초청을 받게 된 주요 배경에는 1960년대에 이르러 신국제분업질서(New International Division of Labor)가 나타났다는 데 있다. 1960년대에 이르면 선진자본주의의 국가에서의 노동비용의 증가로 노동집약적 산업의 이윤율이 떨어지게 됨에 따라 국제 자본은 노동비용이 싼 주변부로의 생산기지의 이전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국제분업질서의 출현으로 국제자본과 주변부와의 긴밀한 협력에 의해서 세계시장을 위한 상품의 제조가 주변부에서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잘 교육받고 생산성이 높으면서도 값싼 노동력이 무한정으로 존재하는 한국이 후보지로 선택된 것이다. 그러나 신국제분업질서의 “초청”을 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선택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에서도 나오는 바와 같이 후발산업화에 “초청받은 사람은 많았으나 선택된 자는 드물었다.” ("many called, few chosen": 마태복음) 전략적 선택이론은 한국의 군부지도자 박정희의 적절한 산업화 전략의 선택을 강조한다. 

박정희와 군부엘리트들은 처음부터 수출지향적 산업화를 시도하지 않았다. 군부엘리트들은 쿠데타의 정통성을 마련하기 위해 민중주의적인 경제정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민중주의적이고 수입대체 산업화적인 제1차 경제개발계획은 일련의 정책적 실패로 인해 투자재원을 마련하는데 실패하고 심한 인플레를 초래함으로써의 계획의 수정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1963년 8월에 수정된 경제개발계획은 수정이 아니라 수출지향 산업화로의 전환이라는 산업화전략 자체의 변경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다른 모든 부문에서의 실망스러운 결과에도 불구하고 계획을 훨씬 넘어서는 수출부문에서의 성공에 고무되었던 것이다. 박정희는 1964년에 수출지향적 산업화로의 전략변경을 통해 신국제분업질서의 초청에 응답하였고 산업화의 성공의 기틀을 잡았다. 

(2) 둘째, 산업화 국가를 고안하고, 기획하고 실행에 옮기는 박정희의 산업화국가경영능력 (리더십)을 높이 평가하는 발전국가이론이 있다. 박정희는 국가 주도하에 한국의 자본주의적 산업화를 이끌어갔다. 박정희의 산업화 국가는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하여 의도적으로 가격을 왜곡하여 지원의 배분을 거시경제정책에 맞게 유도하는 시장형성적 또는 시장지배적인 개발국가였다(Amsden, 1989; Wade, 1990). 자신의 의도에 따라 시장을 형성하려는 박정희의 산업화국가의 기본적인 무기는 금융의 통제였다. 박정희 정권은 국내 금융자본을 직접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해외로부터 유입되는 차관의 배분을 통제하였다. 한국의 산업화 국가가 해외자본의 유입에서 직접투자보다는 차관을 선호했던 것은 국내자본가들을 통제하기 위한 정치적 동기에 의한 것이다(Evans, 1985:205~6). 박정희의 산업국가는 성공적인 발전국가였다.

(2)세째, 외생적 발전이론이 있다. 60년대 70년대 성장을 박정희의 개인적 역량 (virtu)이 아니라 도시중심 산업화에 유리한 구조적 조건을 강조하는 설명이다. 구조적 설명에 의하면 박정희가 아니더라도 1960년대 중반에 한국은 산업화를 할 수 있는 유리한 계급구조를 물려받았다는 것이다.

먼저 1950년대에 농지개혁과 전쟁으로 인한 지주계급의 해체는 도시중심의 산업화에 저항할 조직적인 정치 또는 경제적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주었다. (박종철, 1989) 또한 토지개혁의 결과로 나타난 수많은 소규모의 자영농은 ‘자루 속에 든 감자’와 같이 계급적으로 조직되지 못하고 도시 중심의 산업화에 필요한 노동력을 공급해 주는 존재로 전략했을 뿐 이다.

넷째, 지정학적 촉진요인을 강조하는 외생적 이론이 있다. 대표적으로 미국의 “자비로운 헤게모니” (benevolent hegemony)를 강조하는 이론이 있다. 냉전구조 하에서 국제공산주의의 확장을 저지하는 전초 국가로서의 전략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한국에 대해 미국은 한국의 후견국가로서 안보를 보장해 주었을 뿐 아니라, 토지개혁을 지원함으로써 60년대 이후의 한국의 도시중심적 산업화를 위한 계급적 기초를 쌓아주었다. 

미국의 자비로운 헤게모니는 직접적으로는 군사원조와 경제원조를 한국에 제공하는 것으로, 간접적으로는 한국 수출상품의 미국시장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추어주고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금융기구의 차관대여에 있어서 특혜를 제공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냉전체제하에서 미국이 한국에 제공한 “시혜”는 경제원조와 소비시장의 제공에 그치지 않고 한국이 영미식 자본주의 모델과 다른 한국적인 또는 동아시아적인 ‘발전국가’ 모델을 추구하는 것을 허용하는데까지 이어졌다. 

박정희의 전략적 선택의 적절성, 리더십의 탁월성, 자신의 사익을 추구하는 약탈적 (predatory) 독재자가 아닌 경제발전이라는 공익을 추구하는 개발독재자(developmental dictator)라는 점을 폄하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박정희 시대의 성공은 박정희 적절하고 탁월한 전략적 선택과 같은 내생적 요인 뿐 아니라 도시중심의 산업화에 친화적인 계급구조의 형성, 국제분업구조의 변화와 같은 외생적, 구조적 조건의 성숙과 그리고 미국의 자비로운 헤게모니와 같은 외생적 조건과의 다양한 결합에 의해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다음으로 박정희의 근대화 모델이 과연 전형적인 발전지향적인 근대화 모델인가에 대한 평가이다. 통념적 설명(conventional wisdom)과는 달리 몇몇 학자는 박정희 체제를 ‘발전지향적 권위주의 체제’(developmentalist authoritarian regime)’(김일영, 1994: 11))가 아니라 ‘국가엘리트의 배를 불리는 권위주의체제’(authoritarian state elite enrichment: ASEE)’로 부르기도 한다. 박정희의 국가를 반드시 발전지향적 성격으로 단정할 수 없으며, 박정희의 국가에는 ‘약탈국가적’(predatory state) 성격도 있다는 것이다. 국가 엘리트의 치부(state elite enrichment: ASEE)를 위한 가산제 국가(patrimonialism)로도 볼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4대 의혹사건(증권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 자동차 사건, 빠칭코 사건), 차관도입 문제, 은행대부, 정치자금과 관련한 정경유착 등의 사례가 바로 이러한 특성을 보여준다.

둘째로 제기되는 문제는 국가주도 산업화를 위해 권위주의가 반드시 필요했는가이다. 제1세대 산업화 국가인 영국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국가주도 경제’는 권위주의적이 아니다. 핀란드, 오스트리아, 일본의 발전국가도 국가주의적인 경제발전을 민주주의 하에서 훌륭하게 이룩하였다. 박정희는 '산업화의 심화' (deepening)를 위해 권위주의 독재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공고화하기위해 (유신) 산업화의 심화 (중화학공업화 HCI)를 명분으로 내걸었고,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산업화가 민주화의 선행조건은 아니다. 산업화를 위해서 개발독재가 반드시 필요했다는 역사적 필연론은 경험적으로도, 당위론적으로 지지되지 않는다. 권위주의적 산업화와 자유주의적 산업화는 선택의 문제이지 역사적 필연은 아니다.  

셋째로 제기되는 문제는 박정희의 권위주의적 산업화가 과연 ‘지속가능한 모델’인가에 대한 평가이다. 박정희의 산업화 프로젝트는 ‘지속가능한 발전’의 측면에서 볼 때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박정희의 산업화 모델은 성장과 분배가 동반성장하기 어려운 불균형 발전모델이었다.  

박정희의 불균형 발전모델은 공간적으로 지역간의 격차를 확대 심화시켜 지역분열, 지역갈등을 조장하였다. 또한 박정희의 성장제일주의는 인간과 자연의 환경을 파괴하고 착취하였다. 한국 근대화의 반생태주의는 부동산 투기, 토건국가의 유산을 물려주었다.  

박정희의 발전국가 모델은 자율적 감시와 책임규율이 취약한 모델이었다. 국가는 금융통제권을 활용하여 재벌에 대한 통제권을 보유하면서 재벌을 육성하였으나, 궁극적으로 국가는 재벌에 포획될 수밖에 없었다. 관치금융이야말로 재벌의 부실이 은행의 부실로 이어졌을 때 국가가 발권, 국채, 조세를 통해 부실의 부담을 사회화하는 연결고리의 출발점이다. 재벌의 경영실패에 대해 감시하고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장치가 결여되어 있을 때 재벌의 실패의 비용은 채권자, 예금자, 주주, 노동자, 그리고 국민일반이 짊어지게 되고 이는 경제의 전반적 위축을 가져온다. 1997년의 경제위기는 재벌규제의 투명성, 책임성이 약한 박정희 모델 내부에 존재하는 결함에 기인한 바 크다.  


4. 박정희, 그는 왜 1979년에 몰락하였는가?

종신집권을 보장 받은 유신군주 박정희는 2기를 마치지도 못한 채 유신 2기 2년째인 1979년 10월 26일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생을 마감하게 되고 박정희의 유신체제도 종말을 고하게 된다. 그것은 로마의 시저가 가장 절친한 친구인 부르투스 일당에게 칼을 맞아 죽은 사건을 닮은 '비극'이었다. 

그렇다면 마키아벨리가 이야기한 신군주 (new prince)의 덕목 (virtu)를 소유한 박정희가 어떻게 그렇게 허망하게,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으로 (궁정동에서 미희와 향연을 벌리다가 죽은 박정희) 사망하게 되었는가?

우리는 먼저 박정희의 몰락을 1979년 10월 26일에 일어난 일회성의 비극적 사건으로 다루어서는 누가 총을 먼저 쏘았는가는 한국전쟁의 원인을 밝히는데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것과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몰락에서도 왜 김재규가 총을 T었는가는 박정희의 몰락의 근본적 원인을 아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박정희 몰락을 알기위해서는 구조적 원인 (국내 계급적, 국제 정치적)과 주요 행위자의 선택을 동시에 보아야한다.

먼저 구조를 살펴보면, 첫째, 경제적으로 박정희 모델의 성공을 가져다 개발독재에 의한 중화학 중심의 산업화 모델은 1977년부터 시작된 제2차 오일 쇼크로 중대한 위기를 맞게 된다. 한국의  중화학 공업상품의 수요가 내수가 아니라 세계시장 중심으로 되어 있는 취약성을 갖고 있었다. 승승장구하던 한국의 중화학공업은 해외에서 수요가 격감하면서 위기를 맞게 되었고, 박정희는 재벌이 담담해야할 비용과 손실을 중산층과 노동자, 서민에게 전가하는 비용과 위험부담의 사회화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비용의 사회화 정책은 중산층, 노동자, 서민의 비난과 저항의 대상이 되었고, 박정희의 지지 기반은 안으로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둘째, 1978년 경제 위기가 심화는 정치 위기로 확대되었다. 1978년 선거에서 신민당은 야당 사상 최초로 집권여당을 총득표수에서 승리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총득표수에서 야당의 승리는 야당으로 하여금 78년 선거를 박정희에 대한 불신임 투표로 규정하게 하였다. 사실상의 총선패배는 박정희의 정통성에 대한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이후부터 유신군주 박정희의 아킬레스건이 되었다. 반면에 사실상의 총선승리로 신민당 내의 김영삼이 이끄는 선명야당파 (민주화파)는 이철승이 이끄는 유화파 (중도통합파 또는 사꾸라파)에 대한 확고한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었고 박정희의 독재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이러한 정치권 내의 역학관계의 변화에 맞추어 (또는 힘입어)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회복해 줄 것을 감히 요구하게 되었고 (YH 사건) 부산과 마산의 대규모 민중들이 박정희 독재에 맞서 대중봉기를 일으켰다 (부마사태). 제도 정치권에 안주했던 '충성스런 야당'이 정권으로부터 자율적인 '선명야당'이 되면서 대중과 노동자들과 연합하게 되면서 박정희의 지지기반은 급격히 축소되었고 급기야는 선명야당, 노동자, 대중봉기에 대처하는 전략과 전술을 둘러싸고 정권 내부의 분열이 일어났으며 궁극적으로는 '호위무사들' (중앙정보부장과 경호실장)간의 갈등이 유신군주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셋째, 박정희 유신체제의 몰락을 가져온 데에는 국내적 요인 못지않게 국제적 요인이 있다. 먼저 제2차 오일쇼크라는 국제경제적(국제정치경제적) 요인과 더불어 대한민국을 태생시킨, 냉전의 후견국가인 미국과의 정치적 관계가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유신정권 수립 후 카터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미국과의 불화는 깊어졌다. 불화를 심화시킨 이슈는 두가지였다. 하나는 카터 대통령이 인권대통령을 기치를 내걸고 당선되어 제3세계의 인권상황의 개선에 노력하는 와중에도 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를 남발하는 등 인권상황을 악화시키고 있었고, 미국의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박동선로비사건을 일으켰다. 카터는 이에 대해 주한 미군 철수라는 강수를 두었고 물론 반공의 보루로서의 한국의 가치 때문에 철회되었으나 카터와 박정희간에는 치유할 수 없는 불화와 반목이 심화되었고 이러한 미국과의 반목은 박정희의 대외적 정통성을 홰손하였고, 자연스럽게 이러한 박정희의 약점을 간파한 적대자들 뿐 아니라 박정희의 친위근위병 중에도 박정희에 도전하려는 역심을 품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혹자는 김재규가 미국 대사와의 면담에서 박정희를 제거하라 (또는 제거해도 괜찮다는)는 미국의 신호를 읽었다는 설을 이야기하고 있으나 문제의 핵심은 미국의 신호에 관계없이 카터와 박정희간의 심각한 불화가 간접적 신호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박정희와 미국은 여순군반란 사건이래 최악의 상황에 빠졌고 이는 김영삼이 주도하는 야당으로 하여금 겁 없이 박정희에 도전하게 만들었고, YH산업 여공들이 박정희에 직접 대들게 만들었고, 부산과 마산에서 대규모 군중들이 박정희에 저항해서 거리에서 봉기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 모든 사건들이 미국의 사주에 의해 일어난 것은 전혀 아니다. 미국은 오히려 대한민국의 정국이 불안정해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국제적 조건은 국내정치로 침투하여 국내 행위자의 선택을 바꾸었다. 국내정치의 연장이 국제정치가 되었고, 국제정치는 다시 국내정치로 환류(feedback)하여 국내정치의 '선택의 구조' (structure of choice)를 바꾸어 놓았다.




마지막으로,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박정희와 김재규의 선택의 문제이다.  박정희의 죽음은 박정희의 선택이다. 왜냐하면, 박정희는 위기를 맞이하여 생존을 위한 최적의 선택을 하지 않음으로써 끝내는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갔기 때문이다. 전술한 것처럼 박정희는 뛰어난 통치술 (비르투)을 가진 마키아벨리적 신군주였다. 그는 뛰어난 통치술로 유신독재체제를 평화적으로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수립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77년 제2차오일 쇼크에서 시작되는 유신 말기에 박정희의 비르투는 퇴화되고 소멸되고 있었다.

박정희 자신이 스스로 가장 신념이 확고한 '이데올로기적'인 강경론자가 되면서 박정희는 대화, 타협, 협상, 관용, 제3의 길, 그리고 이러한 모든 대화적인 해결책이 먹혀들지 않을 때 마지막 수단으로 대결, 처벌과 진압을 써야한다는 전략적인 (strategic) 행위자인 온건론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것은 위기시에 박정희의 선택의 폭을 줄이는 위험한 비전략적이고, 맹목적(blind)인 무모한 선택이었다. 선택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인 행위, ‘막무가내적 행동‘이었다. 

그는 경제위기가 도래하여 서민의 생활이 어려워지고 서민의 불만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가운데서도 성장일변도, 재벌 손실의 사회화 정책을 계속 밀어부쳤고, 반인플레이션 정책을 통해 민생경제를 챙겨야한다는 신현확 장관을 비롯한 온건론자들의 주장에 대해서는 벙어리였다. (말기에는 수정을 했지만) 국내외에서 일어난 박정희에 불리한 조건에 고무된 김영삼의 선명야당파에 대해서는 대화와 타협보다는 김영삼 총재 직무정지, 의원직 박탈과 같은 강경일변도로 대응하였고 이는 김영삼의 정치적 기반인 부산과 마산에서 대중봉기를 유발케한 한 요인이 되었고, 부마사태는 김영삼을 더욱 대담하게 만들었고 박정희에 대해 정면대결을 선포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심각한 정치적 위기에 대한 대응에 있어서 박정희 스스로가 가장 비타협적인 강경론자였다. 따라서 집권층 내의 대화와 타협을 주장하는 온건론자들의 목소리는 기어들어갔다. 혹자는 차지철의 강경론이 김재규의 불만과 분노를 유발하였고 10.26도 차지철을 사살하는 과정에서 박정희도 희생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으나 그것은 차지철을 너무 과대평가한데서 나온 오류이다. 차지철은 근위대장으로서 철저하게 박정희를 추종하면서 거기서 권력의 떡고물을 즐기는 전략도 없고 박정희 외에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전혀 고려치 않는 우직한 충성스런 대위출신 군인경호대장이었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10.26 궁정동 만찬에서 차지철이 부마사태 해결 방안으로 캄보디아의 크메르루즈에 의한 200만 대학살을 예를 들면서 탱크로 10-20만 명 죽여서라도 데모군중을 진압해야한다는 강경론을 제시한데 대해 놀랐다. 차지철이 비전략적이고 무모한 군인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는 생존을 위하여 항상 박정희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내가 박정희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거기에 따라서 행동하였고 그를 통해 박정희의 총애를 받았다. 그런 차지철이 박정희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없이 독단적으로 그런 엄청난 발언을 했으리라고 믿겨 지지 않는다. 

명석한 유신 군주 박정희의 몰락을 가져온 국제적 요인은  핵무기 개발이었다. 박정희는 핵무기개발을 통해 민족주의자로 거듭났고, 핵무기 개발은 미국과의 불화를 심화시켰고, 박정희의 죽음을 재촉하였다. 미국의 피후견국가의 지도자인 박정희는 해방정국에서부터 점령국인 미국과 악연이 있었고, 존슨행정부 시절의 짧은 허니문기간을 제외하고는 집권 기간 내내 미국과 관계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박정희는 미국에 감정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비합리적으로 대응하였고, 미국은 20세기 말과 21세기 초 김정일의 핵개발에 대해 취했던 강경 대응을 넘어서는 견제와 징벌로 이루어진 강경책을 박정희에 부과하였다. 미국과의 관계악화는 바로 국내정치로 역류하여 들어왔고 국내정치에서 박정희의 입장을 곤궁하게 만들었다. 대외적으로 박정희의 위치와 위상이 약화되자 국내정치 행위자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김영삼이 이끄는 야당 뿐 아니라, 권력의 핵심부 내부에서 박정희가 난공불락의 무적함대가 아닐 수도 있다는 '무엄한' 인식을 하는 자도 나타났다. 이제 권력 계승의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박정희의 총애와 지원이 아니라, 미국의 신호였다. 후견국인 미국이 박정희를 교체할 수도 있다는 신호를 보내기만 하면 언제든지 박정희를 제거하는 거사를 벌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측근들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김재규는 중앙정보부장으로서 미국의 신호에 관해 가장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었고 그 정보에 따라 그는 궁정동의 만찬장에서 박정희를 시해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박정희와 유신체제의 몰락은 민중봉기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민주화에 의한 것도 아니요,  집권층내부의 일단의 쿠데타 음모집단 (coup mongers)에 의한 위로부터의 궁정쿠데타도 아니다. 유신체제가 붕괴한 것은 소위 한국형 관료적 권위주의를 제도화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유신체제는 지나치게 박정희 1인에 의존하는 인치적 권위주의주의체제였고, 박정희의 비르투가 사라지고 나면 여러 군데서 권력의 공백이 생기고 권력추구자들은 그 공백을 메꾸기 위해서 뛰어들었다. 

해결책은 있었다. 하나는 카리스마의 일상화 (routinization of charisma)를 추구하는 것이다. 중국공산당이 하고 있는 것처럼 권위주의 체제 내에서 계승의 제도화를 하고 후계자에게 점진적으로 권력을 이양하는 것이다. <

Athenasia 님의 게시글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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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le0619
IP 211.♡.71.160
09-27 2012-09-27 14:58:02 / 수정일: 2017-04-30 09:21:10
·
올리시는 글들 잘 보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두문단 정도가 복사가 안되었나보네요 ^^ 링크 타고 가서 완독했습니다. 여러가지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인물이기는 하지만, 그의 결말을 가져온 여러가지 상황이 현재까지 사회에 미치고 있는 영향을 생각하면 답답하기도 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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