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웹소설 연재분보다 회당 분량 절반가량으로 축소되었고 문체도 간결하게 했습니다. 장애인고용이라는 공익을 위해서 계속 글을 쓰겠습니다.
<변호사시험 5탈 원장, 착취 공장 뒤집기>

1화: 프롤로그, 새벽 네시의 바다
새벽 네 시의 바다는 아무도 보지 않아도 파도를 친다.
나는 삼양 해변 벤치에 앉아 낡은 수첩을 펼쳤다.
정경호. 김은채. 스카니아 청년.
이름 옆에는 짧은 메모가 붙어 있었다.
쌀 두 포대.
노을, 호숫가.
무서워서요.
“나, 사람 꽤 많이 취업시켰네.”
말은 파도에 묻혔다.
남의 이력서는 만들어줬다.
내 이력서는 비었다.
변호사시험 다섯 번 불합격. 응시 자격 소멸. 이혼. 아들과는 먼 친척 같은 사이. 지금은 제주 봉개동 학원 원장.
나는 수첩을 덮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사람들을 도운 게 정말 그들을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나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견디기 위해서였을까.
대답은 늘 같았다.
생각하지 말자.
그런데 새벽에는 생각하지 않는 일이 더 어렵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새벽 네 시 십이 분.
화면에 정경호가 떠 있었다.
십 년 전 호숫가에서 “무서워서요”라고 말했던 아이였다.
1
전화는 다섯 번 울렸다.
나는 받지 않았다.
네 번째쯤에는 받을 생각이었고, 다섯 번째에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전화를 받으면 나는 가야 한다.
그게 문제였다.
내가 경호를 걱정해서 가는 건지, 경호를 핑계로 다시 예전의 나로 돌아가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변호사도 아니고 공단 직원도 아니다.
그런데 경호에게만큼은 아직 선생님이고 싶었다.
그게 비겁하게 느껴졌다.
다섯 번째 진동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대답이 없었다.
숨소리만 들렸다.
“경호야?”
“……선생님.”
십 년 전보다 목소리는 굵어졌지만 말끝을 떼어 먹는 버릇은 그대로였다.
“저 경호예요.”
“알아.”
“선생님 아직 그 번호 써요?”
“어.”
“……다행이다.”
그 한마디가 오래 남았다.
나를 찾을 사람이 아직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아팠다.
나는 그걸 반가워해야 했다.
그런데 겁이 났다.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건, 이번에도 도망칠 수 없다는 뜻이니까.
“무슨 일이야?”
“저… 선생님 아직 취업 그거 해요?”
“그만뒀어.”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럼 이제 못 도와줘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도와줄 수 없다고 말하면 편했다.
나는 자격이 없었다.
경호도 곧 다른 사람을 찾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됐다.
그런데 경호가 말했다.
“선생님은 선생님인데요.”
그 순간 나는 화가 났다.
경호에게가 아니었다.
나 자신에게였다.
십 년 동안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인간이 아직도 누군가에게는 선생님이라는 사실이 견딜 수 없이 아팠다.
“경호야.”
“네.”
“어디야?”
“저 지금 무서워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알았다.
나는 이미 가기로 했다.
그런데도 물었다.
“왜 나한테 전화했어?”
대답이 없었다.
나도 더 묻지 않았다.
잠시 후 전화가 끊겼다.
2
나는 바로 다시 걸지 않았다.
대신 비행기 시간을 검색했다.
제주에서 익산.
첫 비행기를 타면 오전 안에는 갈 수 있다.
오전 수업 세 개.
학부모 문자.
월세.
그리고 내 아들.
나는 계산기를 두드렸다.
돈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것들을 먼저 계산했다.
시간도 계산했다.
그런데 경호를 도와야 하는 이유만 계산하지 못했다.
정말 경호를 위해 가는가.
아니면 내가 아직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러 가는가.
이 질문이 떠오르자 손이 멈췄다.
나는 경호를 이용하는 것 같았다.
십 년 전에도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시험에 떨어졌다.
경호를 도왔다.
사람들은 내가 좋은 일을 했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알고 있었다.
경호를 도우면서 나도 같이 살아남았다는 걸.
그래서 더 미안했다.
경호에게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어쩌면 나였는지도 모른다.
3
수첩 뒤에서 종이 한 장이 떨어졌다.
『변호사시험 응시 자격 소멸 안내』
다섯 번.
기회는 다섯 번이었다.
나는 전부 썼다.
다섯 번째 결과가 나온 날 윤서가 말했다.
“당신은 이제 아무 데도 없는 사람 같아.”
나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 말이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뒤로 나는 사람을 도왔다.
취업을 시켰다.
면접에 데려갔다.
출근을 도왔다.
사업주와 싸웠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직업이었다.
나에게는 변명에 가까웠다.
나는 법조인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남의 삶에 개입하는 사람이 되었다.
적어도 그곳에서는 내가 틀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경호가 다시 나타났다.
십 년 전의 실패와 십 년 후의 실패가 한 사람의 목소리로 연결된 기분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이번에도 경호를 도우면 나는 무엇이 되는가.
선생님?
구원자?
아니면 실패한 인생에 마지막으로 의미를 붙이려는 겁쟁이?
어느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4
학원 단톡방을 열었다.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원장님, 지훈이 오늘 꼭 봐주세요. 애가 많이 불안해해요.」
나는 화면을 오래 바라봤다.
지훈도 무섭다.
경호도 무섭다.
그리고 나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평생 남들에게 선택지를 만들어주던 내가, 정작 내 인생에서는 선택지가 두 개밖에 없었다.
남거나.
가는 것.
상식은 남으라고 했다.
마흔이 넘었다.
학원은 내 것이다.
월세도 내야 한다.
아들은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지만, 언제까지 그럴지는 모른다.
이번에도 남의 일 때문에 내 삶을 뒤로 미루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수도 있다.
오히려 이번에는 경호가 나를 원망할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손가락은 이미 문자를 쓰고 있었다.
「개인 사정으로 금일 수업은 휴강합니다.」
나는 전송 버튼을 바라봤다.
누르면 돌아갈 수 없다.
나는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이상하게 안도감이 들었다.
그리고 바로 뒤에 더 나쁜 생각이 따라왔다.
나는 경호 때문에 안도한 걸까.
아니면 드디어 내 인생에서 도망칠 이유가 생겨서 안도한 걸까.
나는 그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5
공항으로 가는 길에 아들에게 문자를 썼다.
「아빠 오늘 출장 간다. 다녀와서 얘기하자.」
무슨 출장인지 쓰지 않았다.
사람을 구하러 간다고 하면 거짓말 같았다.
사실 나도 내가 무엇을 하러 가는지 모르고 있었다.
아들에게는 더더욱 설명할 수 없었다.
신호에 걸렸다.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문득 아버지가 생각났다.
나도 아버지에게 이런 사람이었다.
필요할 때만 나타나는 사람.
중요한 순간마다 자기 사정이 먼저였던 사람.
그런데 지금 나는 경호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한다.
아들에게는 나쁜 아버지인 채로.
그 모순이 목을 조였다.
신호가 바뀌었다.
나는 차를 몰았다.
6
공항 탑승구에 앉았을 때 정경호에게서 문자가 왔다.
「선생님. 저 이번에는 출근했어요.」
잠시 후 두 번째 문자가 왔다.
「근데 월급이 이상해요.」
세 번째.
「사장님이 통장이랑 도장 가져오래요.」
나는 화면을 내려다봤다.
통장.
도장.
월급.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단어들이었다.
장애인공단에서 일할 때 몇 번이나 마주쳤던 문제였다.
나는 법을 알았다.
절차도 알았다.
하지만 이제 나는 변호사가 아니다.
자격증도 없다.
명함도 없다.
직함도 없다.
그래서 이번에는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다.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면 실패할 것도 없다.
그런데 바로 그 생각이 나를 멈추게 했다.
경호는 나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 이름을 버리고 싶으면서도 놓고 싶지 않았다.
탑승 안내가 나왔다.
나는 수첩을 점퍼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일어섰다.
이번에 가는 이유를 나는 끝내 정하지 못했다.
경호를 구하려는 것인지.
나를 구하려는 것인지.
아마 둘 다일 것이다.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 정도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