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입술이 5초 정도 파르르 떨렸다. 그때도 그는 당신들에게 관심 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 다음 열차를 기다리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지나치게 의식하며 가슴을 펴느라 허리가 욱신거렸으나 몸을 굽혀 자신감 없어 보이는 것은 싫었다. 그의 시야에 짧은 치마의 여자가 들어왔을 때 그는 입을 다문 채 코로만 호흡하기 시작했고 이내 짝다리 자세로 바꾸었다. 잠시 쓰지 않던 얼굴 근육 일부를 다시 썼고, 쓰던 근육을 이완시키기도 했다. 핸드폰 화면 바깥으로 여자의 하체가 어렴풋이 그 형체만을 드러냈지만 그는 가까스로 눈에 힘을 주어 화면에 집중했다. 늘 그러했듯 그날도 2호선 승강장엔 사람들이 넘쳐났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을 때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모습을 보며 그도 그들처럼 행동했다. 그의 눈에는 노인들만이 평온해 보였다. 육체적 에너지만 사용하고 정신 에너지는 차단한 듯 보였다. 학생들은 참새처럼 짝을 지어 재잘거렸고 종종 외마디 비명 같은 웃음을 내지르며 주변 사람들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한 태도를 보였지만 그의 눈에는 그런 행동조차 주변을 의식하는 것으로 보였다. 반대편 노선의 승강장에는 헬스를 많이 한 듯한 사내가 팔을 크게 벌린 채 서있었다. 자신의 몸통보다 좌우로 더 벌어진 양팔은 커다란 광배근 때문이라기보다 어깨 근육에 잔뜩 힘을 주어 만든 자세처럼 보였다.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계단을 내려오는 여자는 지하철과 어울리지 않게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었다. 조무래기들에겐 관심 없다는 듯한 도도한 표정으로 정면을 꼿꼿이 응시하며 걸어가더니 가더니 사람들이 밀집한 곳에 멈춰 섰다. 그는 고개를 들어 전광판을 봤지만 여전히 도착까지는 2분이 남아있었다. 그전에 쳐다봤을 때도 3분 정도 남았던 것 같은데 전광판에 정보가 제대로 전달이 안 되는 건가 싶었다. 더 이상 핸드폰으로 할 것도 없었다. 그는 가방에 든 책을 꺼낼까 잠시 고민했다. 책을 읽는 것은 좋지만 그가 어떤 책을 읽는지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싫었다. 이렇게 유명한 고전소설을 지금에서야 읽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어온 사람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는 조금의 리스크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유명하지 않은 책을 골랐어야 했을까, 표지의 제목이 잘 드러나지 않는 책으로 골랐어야 했을까. 짧은 치마의 여자는 여전히 그의 시야에 들어와 있었다. 거슬렸다. 처음부터 없었으면 생각도 안 할 텐데 보고 싶은 욕구를 억지로 고문받듯 참는 것이 싫었다. 슬쩍 쳐다보면 되지 않나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힐끔거리는 그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보는 것은 어딘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했다.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안전선 안쪽으로 한 걸음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지하철 창문 너머의 공간을 재빠르게 탐색한 뒤 어느 자리에 앉아야 조금이라도 마음 편히 앉아 갈 것인지 생각하며 안경 뒤편의 눈알을 재빨리 굴려댔다.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목표한 자리를 향해 날렵하게 움직였으나 경쟁 상대가 너무 많았던 탓에 그는 어쩔 수 없이 내키지 않는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의 앞에서 여러 얼굴들이 정면을 응시하는 듯 보였다. 눈싸움이라도 하고 싶어서 근질거리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며 그는 물 흐르듯이 헤드폰의 볼륨을 키우고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저 피곤해서 깜빡 잠이 든 사람의 모습으로 보이고 싶었다. 반바지를 입은 그의 허벅지 위로 앞에 선 사람의 옷인지 가방인지 모를 무언가가 자꾸만 닿았지만 그런 것쯤 신경도 안 쓰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서서히 얼굴 근육을 이완시켰고 호흡을 길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이제 그에겐 노래와 암흑만이 놓여있었다. 열차의 바퀴가 레일을 지나면서 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자, 문득 썩어 비틀어진 고목나무가 떠올랐다. 회색빛의 그 고목나무에는 수분이라고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나무는 어디에도 놓여있지 않았다. 나무를 둘러싼 배경은 상상되지 않았고 오직 암흑 속에 놓여있을 뿐이었다. 그의 얼굴엔 눈코입이 없었다. 얼굴 전체가 찰흙으로 빚어놓은 것처럼 살덩어리로만 덮여있는 느낌이었다. 숨을 쉴 구멍이 없는 건가. 그는 의식적으로 입을 살짝 벌린 뒤 공기를 들이마셔 봤다. 공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폐로 빨아들이면 그만인 간단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목구멍은커녕 입술 안쪽으로 들어오는 것부터가 되지 않았다. 이어서 머리가 뜨거우면서 매우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숨. 숨을 쉬어야만 한다.' 쉬지 않으면 그는 살 수 없었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싶었다. 도움을 요청해야 할 것만 같았다. 이대로 허무하게 죽기는 싫었다. 하지만 그는 숨을 못 쉬는 상태에서도 졸린 척 눈을 감고 부동의 자세를 취했다. 대체 왜 숨이 안 쉬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뜬 뒤 원래 나가려던 정거장에 도착해서 내리려는 듯 자연스럽게 일어났다. 그의 허벅지에 부딪히던 것은 키링이었단 것을 보며 옆 칸으로 이동했다. 앉을자리는 없었지만 구석진 자리에 서있을 만한 곳이 있었다. 숨은 여전히 들이마실 수 없었지만 몇 분이 지나도 쓰러지지 않는 것이 더 기이하게 느껴졌다. 옆 칸의 사람들은 다들 비슷한 표정으로 앉아있거나 서있었다.
“이번 역은 당산, 당산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김포공항이나 중앙보훈병원 방면으로 가실 고객께서는 9호선으로 갈아타시기 바랍니다.” 여전히 갈 길은 멀었다. 그의 시선은 중구난방으로 흔들렸지만 가까스로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숨 못 쉬는 이유를 알 수 없었고, 해결 방법도 알지 못했다. 그저 그의 몸이 당장 소설 속의 세계로 뛰어들어야 한다고 명령하는 것 같았다. 이 책을 저 나이 먹고 읽는다고 생각하든 말든 지금은 읽어야만 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그는 정신없이 읽느라 책갈피 해둔 것을 잊은 채 첫 페이지부터 다시 읽은 것을 눈치채곤 책갈피가 꽂힌 페이지를 펼쳐서 제대로 읽으려 했다. 그때 쾌활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야 김진우!" 그의 이름이 다시 불렸을 때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창백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있을 수 없는 가상의 일이 벌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의 시야에 점점 옛 동창의 모습이 들어왔다. 초등학생 시절 딱 한 번 같은 반을 했었을 뿐이었고 막역할 정도로 친한 사이도 아니었음에도 굳이 자신을 반갑게 부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의 얼굴로 혈류가 빠르게 몰리는 것이 느껴졌고, 전혀 쓰지 않던 얼굴 근육을 수축시키며 반가움을 드러내는 표정을 지어 보았다. 물론 당황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자연스러운 표정도 빠뜨릴 수 없었다. 동창의 태도에는 아무런 스스럼이 없었다. 어색해하지도 않았고 책을 훑어보지도 않았으며 그의 창백한 낯빛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듯 보였다. "진짜 오랜만이네. 그때 같이 놀던 영호랑은 아직 연락해?" 영호와는 다행히 연락하고 있었다. 영호를 매개로 대화를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아 안도감이 들었다. "난 저번 주에도 영호랑 일본 가서 거기 뮤지션이랑 같이 룸에서 파티하고 놀았는데." 동창은 그보다 영호와 더 가까운 사이로 보였다. "넌 요새 뭐 하고 사냐?" 동창이 물었다. 그의 목소리엔 뒤틀린 무언가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요새는 학교 끝나면 영어 학원에서 일하고 집에 가면 12시 넘을 정도로 바쁘게 보내고 있어. 너는?" 알차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일 만한 게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난 요새 헌팅 엄청 하고 다니는데 이틀 전에 만난 여자는 자그마치 D컵이었어, 쩔지?" 그러고 보니 그의 눈에 비친 동창은 어릴 적에 비해 키도 많이 컸고 피부도 좋았으며 외모가 뛰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유들유들한 성격 탓에 그의 말이 허언은 아닐 것 같았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몇 년째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보지 못했다. 동창이 부러웠다. 불현듯 동창은 내릴 역이라며 다정한 톤으로 말했지만 조금의 미련도 없이 인사를 하고 지하철에서 내렸다. 동창이 내리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승객 여러분께 안내 말씀드립니다. 앞 열차와의 간격 조정으로 잠시 정차하겠습니다. 이용에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안내 방송에선 단순한 간격 조정을 위한 정차라고 했지만 그는 순간적으로 방화범의 소행을 떠올렸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늘 그렇듯 심드렁한 표정들을 지을 뿐이었다. 그때 그는 짝다리를 짚고 있지 않고 서있었다. 평생 비염으로 고생해왔으나 어쩐지 꽉 막힌 지하철 내부의 공기가 콧구멍을 통과해 폐 깊숙한 곳까지 쉬이 도착하는 느낌이 들었다. 답답하게 귀를 울리던 헤드셋을 벗은 그는 다시금 주위를 둘러봤다. 생명체들이 숨을 쉬고 있는 것이 보일 뿐이었다. 그는 안경을 벗어 주머니에 넣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모든 게 답답하고 지긋지긋했을 뿐이었다. 20년 가까이 써온 안경은 늘 그의 좌우 관자놀이를 옥죄었다. 그의 시력은 무척 나빴지만 그동안 보지 못한 것들이 보이는 느낌이었다. 셔츠의 단추를 하나둘씩 풀고 상의를 탈의한 뒤 빈자리에 개어 두고 벨트를 풀어 청바지를 벗어보는 상상을 했다. 그것은 실행해 봐야 남는 것도 없는 쓸데없는 일이었다. 고작 그런 것으론 자유로워질 수 없다 생각했다. 그는 별생각 없이 걸으며 자리를 이동했고 걸음을 멈춰 섰을 땐 노란색 반팔티를 입은 여자 앞에 서있었다. 얇고 부드러운 면소재의 반팔티는 기장이 짧아 배꼽과 골반의 라인이 훤히 드러나있었다. 그는 동창이 그랬듯이 헌팅을 해볼까 싶었다. 결과를 떠나 리스크에 비해 얻는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었다. 안경을 벗은 탓에 그녀를 선명히 보지 못했지만 계속 쓰고 있었다면 렌즈의 왜곡으로 눈이 작아 보여 헌팅에 실패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일이 순조롭게 풀리고 있음을 느꼈다. 몇 분간 그녀를 계속 정면으로 쳐다보았으나 그녀는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렇게나 존재감이 없나란 생각을 할 때쯤 그녀는 흘깃 그의 눈을 마주쳤다. 표정이 또렷이 보이지 않기도 했지만 어떤 반응인지 알기 어려웠다. 다만 지금 이 순간이 지난다면 영영 기회를 잃을 것만 같았다. 몸 안에서 피가 빠르게 순환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쩐지 잘 될 것만 같았다. 입술에 침을 한 번 바른 그는 상체를 숙이며 말을 걸려고 했다. 그때 그녀는 다리를 흔들며 깔깔 웃어댔다. 순간 몇 명이 이쪽을 쳐다보는 듯했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고 구두가 그의 정강이에 계속 건드렸는데도 그녀는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그는 이딴 여자에게 번호를 물을 순 없다 생각했다.
“잠실, 강남 방면으로 가실 고객께서는 이번 역에서 하차하신 후 반대편 열차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가 지금 어느 역에 있고 어디로 가야하는지 따위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이대로 내릴 순 없었다. 정리를 해서, 결론을 내놔야만 했다. 지긋지긋했다. 늘 무언가를 손에 쥐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에 넌덜머리가 났다. 근데 결론이랄 것이 있나. 정답이 없는 세상에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였다. 아니다. 정답이 없으니 개인의 선택이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인간에게 자유의지란 거의 없다고 생각해 왔던 그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가지 못했다. 앞사람의 가방 끈이 왼쪽만 지나치게 길었다. 왜지. 왜 그 정도조차 신경 쓰지 않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가방이 한쪽으로 치우친 채 저렇게 걸어 다니는데도 인식을 못 하는 건가 싶었다. 불편함을 굳이 피하려 애쓰지 않는 것일까. 유연성. 저 사람은 유연한 사람이다. 아니다. 어쩌면 그저 단순하고 둔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는 무엇도 알지 못했다. 결론을 내릴 수도 없었고, 가방 끈을 저렇게 매는 이유도,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도 없었다. "알 게 뭐야." 의도하지 않았으나 그의 입에서 툭 튀어나왔다. 소음 탓에 사람들에게 들리진 않은 듯 보였다. 시계를 봤을 때 그는 이미 지각하겠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짜증이 났다. 군대에 가기 전의 원장은 그를 존중해 주었지만 전역 후에는 실망한 기색을 역력히 내비쳤다. 순간 전화기줄로 목을 졸라버리는 상상을 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며 한껏 찌푸린 표정을 지을 원장을 생각하니 막혀있던 무언가가 조금은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대체 왜 그렇게 잘 보이려고 애썼던 것일까. 한 번 쓰고 닳았다 싶으면 썩은 표정으로 버려버릴 거면서. 그는 역시나 모든 것이 지겹다고 느꼈다. 뭘 그렇게 도망쳐왔을까. 그는 도망칠 수도 없었다. 문득 자신을 향해 말하던 엄마의 표정과 말이 떠올랐다. "도와달라고 말할 것 같으면 차라리 죽어라!" 그때 발밑으로 낮게 울리는 듯한 진동이 느껴졌다. 터널 안쪽에선 바람이 불어왔고 그는 가만히 서 있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한 가지 문제 의식을 다양한 매체로 풀어내는 작업을 합니다.
글과 사진, 영상과 회화 그리고 설치까지.
아래 signature에 남겨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