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저녁이었다.
하루 종일 도배지를 바르느라 손톱 끝에 눌어붙은 풀 자국이 가시지 않은 채였다.
식어가는 햄버거 봉지를 들고 <뮤즈: 클래식 산책> 동아리 방의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는 정적의 공간. 스위치를 올리고 오디오에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를 걸었다.
이내 2악장 아다지오의 서정적인 타건이 공기를 적셨다.
비릿한 현실의 냄새 위로 차분한 위로가 덧칠되는 순간이었다.
눅눅한 패티를 씹으며 테이블 위 낙서장(방명록)을 무심히 뒤적였다.
낙서장을 2~3장 뒤로 넘기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햄버거를 씹던 내 턱이 멈췄다.
“야! 쇼핑백~ 나 이 동아리 가입했어! 선아와 민아와 함께!”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네들 사이에서는 내 별명이 쇼핑백인듯 했다.
항상 쇼핑백에 책과 노트를 넣고 다니는 꼴이 그들에게는 꽤나 우스운 식별 기호였던 모양이었다.
그녀들은 같은 과 동기인 아삼스였다.
이름 마지막 글자가 아’로 끝나는 무슨 세트 마냥 항상 셋이 같이 다니는 애들이었다.
우연인진 몰라도 강의실 내 뒷자리에 앉아 강의를 듣는 경우가 많은데, 그녀들은 항상 같은 말을 나눴다.
연예인, 남편 될 남자 연봉, 남자 키, 남자 외모에 대한 이야기였다.
난 반올림해야 키가 겨우 170의 오징어고, 부캐릭터로 도배사로 활동해야만 겨우 대학 생활을 하는 처지라.
그녀들만의 기준으로 치자면 난 결혼이나 연애는 불가능의 영역이었다.
아니 근데 문화 교양적 소양이라고는 1도 없어 보였는데, 그런 애들이 클래식 듣는 동아리 가입은 무슨 뚱딴지인가 싶었다.
지독한 농담처럼 느껴졌다.
낙서장 밑바닥에는 한 줄이 더 적혀 있었다.
“야 근데, 너 한테서 항상 좋은 냄새가나. 그 섬유유연제 같은 달콤한 냄새는 뭐야?”
망각의 늪에서 지난주 시험 기간의 기억이 건져 올려졌다.
당시 나는 ‘재정경제수학’의 늪에 빠져 있었다.
부채 동역학(Debt Dynamics) 파트의 예제 풀이는 지독하게 꼬여 있었다.
난 도저히 이해가 안가서 수학에 능한 우리과 대표에게 미안해 하며 물어 보았다.
근데, 과대표도 그 챕터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다.
알면서도 모른다고 시치미 뗄 그럴 위인은 아니었다.
난 어쩔 수 없이 내용을 찬찬히 분해해 뜯어 보았다.
문제점을 파악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책에 오타가 났고 그 오타로 인해 풀이 방향을 반대로 가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란 걸 어렵지 않게 찾았다.
이 문제를 해결 하느라 몰입하는 사이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 챕터 마지막 풀이만 끝내고 저녁을 먹으러 가려던 참이었다.
누가 내 옆에 서있는게 느껴졌다.
정아였다.
그녀는 머리 꼬리 다 자르고 몸통만 내게 던쳐 놓았다.
“너, Debt Dynamics 파트 예제 풀이 이거 풀었어?”
그녀가 처음 내게 건 말이었다.
단발머리에 유독 크고 검은 눈동자, 빨간 립스틱 그리고 아찔할 정도로 짧은 불편한 복장의 그녀였다.
“어, 풀긴 했는데. 맞는지는 모르겠어. 사실은 안풀려서 좀 상상력으로 어거지로 풀었어”
그녀 눈의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올려다 보며 내뱉듯 말했다.
“대단한데, 과대도 못풀었다고 하던데. 너의 상상력을 내게 좀 보여줄 수 있어?”
난 설명해 주었다. 예제 그대로는 절대 풀 수 없다고.
“만약 예제 이 펙터가 오타라면 풀려.”
오타를 전제로 풀이한 것을 설명해 주었다.
그 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졌다.
그 때 그녀는고맙다는 말 끝에 툭,“근데, 너한테서 좋은 냄새가나”
이 한마디를 던지고 사라졌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선아가 왔고 민아가 와서 똑같은 걸 물었다.
그녀들은 뇌를 공유한다.
한 사람이 알면 세 사람이 모두 아는 것이다.
그녀들은 문제 풀이 때문에 온 것인가?
아니면 내 냄새를 맡으러 온 것인가 말이다.
나는 향수 매니아가 아니다.
돈 없는 내게 향수는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이었다.
난 태생적으로 가늘고 얇은 신경을 가지고 태어나 통증에 민감했고, 어려서 부터 신경통을 달고 살았다.
이건 뇌신경의 문제로 약으로 해결이 제한적이었다.
그렇다고 마약성 진통제로 매일 매일을 살아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일단 집에 들어가 활동 없이 고요해 지면 통증은 더 진하게 느끼게 된다.
그 때 내가 할 수있는 일은 혼자 있는 방을 꽉 채우는 것이다.
소리와 향기로 말이다.
불협화음이 심한 현악4중주 곡을 걸어 놓고, 쌉싸름하고 달콤한 향수를 뿌리면..
내 뇌는 통증을 처리하던 신경들이 불협화음을 파악하고 레이어드 된 냄새를 파악하느라 통증을 처리하는데 쓰이는 많은 자원들이 다른 일에 동원된다.
그러기에 향수를 쓰는 것이다.
내가 즐겨 쓰는 향은 섬유 유연제 비슷한 냄새가 나는 달콤한 머스크향과 에르메스 향수 중에서 새콤 달콤한 과일 향이 강한 시트러스-프루티 계열인 ‘오 드 루바브 에칼라트’를 섞어 쓴다.
일단 집에 들어오면 현악4중주 곡부터 걸어 놓고 이 두가지 향수를 뿌린다.
어머니가 내게 주신 2가지 문화적 유산 중 하나다.
어머니가 나를 가졌을 때 어머닌 몸이 너무 안좋아서 영양섭취가 어려웠다.
덕분에 내 신경은 피복이 벗겨진 전선과 같은 나신경이 된 채로 형성되어 태어났다.
난 기쁘고 즐거운 순간에도 미간을 찌푸리거나 무표정한 일이 많았다.
햄버거를 삼키며, 나는 다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밑에 작은 글씨로 긴 숫자와 알파벳 조합의 암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예매표 번호였다. 예매 번호 옆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비발디와 나> “너 때문에 재정경제수학 A+나왔어. 고마워서 보내주는 거니까 꼭 와야돼!”
며칠 전, 그 영화를 보고 싶다고 낙서장에 흘려 썼던 기억이 났다.
그녀는 대답 대신 방아쇠를 당겼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미 발사된 탄환처럼 예매권이 낙서장 위에 적혀 있었다.
이번 생애에 연애 따위는 없을 거라 확신했는데, 이 갑작스러운 전개에 지독했던 신경통이 멎었다.
이제 영화관에 가면 누가 나올까. 아삼스 중 한 명일까, 아니면 뇌를 공유하는 그들 전체일까.
어느 쪽이든, 이미 탄환은 나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