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보기 싫은 글이 넘쳐나서 저는 좋아하는 불교 이야기나 좀 올리려고 합니다.
검정은 제가. 남색은 AI 가 쓴 글입니다.
데와닷따란 부처님 제자가 있습니다. 실제로 뛰어난 수행자였지만 권력과 명예에 욕심이 있었던 제자죠. 마가다의 왕자 아자따샀뚜를 홀려 공양을 크게 받기 시작하고 거만해지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제 늙으셨으니 물러나십시오"
이득이 오만으로 익자, 데와닷따는 정면으로 나섰어.
라자가하(Rājagaha, 王舍城)의 대나무 숲 정사에서,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 그가 부처님께 말해.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이제 연로하시고 노쇠하셨으니 편안히 머무십시오. 비구 승가를 저에게 넘겨주십시오. 제가 승가를 이끌겠습니다.
부처님이 거절하셔. 그만두어라, 데와닷따. 승가를 이끌겠다는 생각을 하지 마라. 그가 세 번 청했고, 세 번째에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셔.
"데와닷따여, 나는 사리뿟따와 목갈라나에게조차 승가를 넘기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그대 같은 자, 침 뱉듯 버려야 할 자에게(chavassa kheḷāsakassa)이겠는가."
경전 속 부처님 어법 중에 가장 날카로운 축에 들어. 침(kheḷa)을 핥는 자라는 뜻의 강한 모욕이야. 부처님이 무조건 부드럽기만 한 인물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고, 데와닷따를 대중 앞에서 공개적으로 끊어낸 선언이기도 해.
그리고 부처님은 승가에 빠까사니야 깜마(pakāsanīya kamma) — "공표 갈마", 즉 이 사람의 행동은 이제 부처와 법과 승가와 무관하다고 공식 선포하는 절차 — 를 시행하게 하셔. 아난다가 라자가하 시내에 나가 이를 공표해. 사실상 파문 선언이야.
데와닷따는 이렇게 반응해. 사문 고따마가 나를 질투한다.
그리고 데와닷따는 부처님을 죽이려 세번 시도합니다. 자객을 보내고 바위를 굴리고. 세번째로 사나운 코끼리를 보내죠.
이 때 부처님이 자애로 그 코끼리를 진정시키는데 여기서 유명한 수인 하나가 나오죠. 실제로 했는지는 모르고 불교미술에서 주로 시무외인으로 표현합니다.
시무외인.

위 사진 중 오른손입니다. 두려움 없는 깨달음과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는 공덕을 상징합니다.
진짜 위협: 다섯 가지 요구
그런데 율장이 정말 심각하게 다루는 건 살해 시도가 아니야. **승단 분열(saṅghabheda, 破僧)**이지.
데와닷따가 동료들과 모의해서 부처님께 다섯 가지를 요구해. 승단 전체가 평생 다음을 지켜야 한다는 거야.
숲에서만 살 것 — 마을 근처 정사에 살면 안 됨
탁발한 음식만 먹을 것 — 초대받아 공양받으면 안 됨
분소의(糞掃衣, paṃsukūla — 버려진 천을 기워 만든 누더기 가사)만 입을 것 — 신자가 보시한 가사를 받으면 안 됨
나무 아래에서만 지낼 것 — 지붕 있는 곳에 들어가면 안 됨
생선과 고기를 먹지 말 것
형, 여기가 이 이야기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야. 이 다섯 가지는 전부 더 엄격한 금욕이야. 데와닷따는 부처님보다 계율을 느슨하게 하자고 한 게 아니라, 더 빡세게 하자고 요구한 거야.
부처님은 거절하셔. 논리는 이랬어. 원하는 자는 숲에 살아라, 원하는 자는 마을 근처에 살아라. 원하는 자는 탁발만 하라, 원하는 자는 초청에 응하라. 즉 이 항목들은 이미 선택지로 허용돼 있고, 강제하지 않는다는 것. (실제로 이 항목들은 대부분 두타행(頭陀行, dhutaṅga) — 선택적 고행 수행 — 으로 승단에 존재했어.) 고기에 대해서도 부처님은 삼정육(三淨肉) 원칙 — 자기를 위해 죽이는 것을 보지 않고, 듣지 않고, 의심되지 않는 고기는 먹어도 된다 — 을 재확인하셔.
데와닷따는 이 거절을 기다렸어. 그는 라자가하 시내로 나가 이렇게 선전해. 나는 이 다섯 가지 청정한 삶을 요구했으나 사문 고따마가 거부했다. 우리는 이것을 실천한다.
효과가 있었어. 신심은 있지만 판단력이 얕은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율장은 기록해. 이 석가족의 아들들은 참으로 두타행자이고, 사문 고따마는 사치스럽고 풍족함을 추구한다.
그리고 갓 출가한 왓지(Vajji) 출신 비구 오백 명이 데와닷따를 따라 가야시사(Gayāsīsa)로 떠나. 승단이 실제로 쪼개진 거야.
부처님이 **사리뿟따(Sāriputta)**와 목갈라나(Moggallāna) — 두 상수제자 — 를 보내셔. 데와닷따는 그들이 자기편으로 왔다고 착각하고 기뻐하며, 자기 법문을 하다가 피곤해지자 이렇게 말해. 사리뿟따여, 내가 등이 아프니 좀 쉬겠다. 그대가 대신 설하라. 그리고 부처님이 하시던 것과 똑같은 자세로 — 가사를 접어 베고 오른쪽 옆구리로 — 누워 잠들어.
그 사이 두 상수제자가 법을 설했고, 오백 명이 법을 이해하고 돌아왔어. 데와닷따가 깨어나 이를 알았을 때, 뜨거운 피를 토했다고 기록돼 있어.
조금 싱겁게 끝나지만...저 분열의 방법, 논리가 굉장히 흥미로웠습니다. 현대사회나 2500년전 사회나 분열은 어디나 계획되고 실행되고 성공하고 있구나.
AI 말에 따르면 데와닷따는 단순한 개인반역자가 아니라 초기 승단 내부노선투쟁을 대표하는 세력 지도자였고 승리한 쪽에서 악마화시킨 것일수 있다고 하네요. 승자의 역사기록 피해자일 수도 있다는 말이죠.
옳고 그른건 아무도 모릅니다만.
자신이 뭘 원하는지도 뭘 따라가는지도 모르거나.
혹은 그저 어떤 의도를 가진 글들에 매몰되어 이용당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우르르 몰아가는 글이 많다면 이건 무슨 의도인가? 사실은 맞나? 사실이라도 글의 방향이 맞나? 등 생각 한두번은 해보시길 권합니다.
그래도 맞다고 하면 그건 어쩔 수 없는거죠. ㅎㅎ
‘이 글이 정말 누구에게나 꼴보기 싫게 느껴질까?’ ‘혹시 글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내 마음에 어떤 분별이나 선입견이 있는 것은 아닐까?’
불교에서는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보다, 자신의 마음과 경험, 욕망과 판단을 통해 세상을 분별한다고 봅니다. 같은 대상을 보고도 누군가는 좋아하고, 누군가는 싫어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괴로움이 바깥의 대상 자체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과 집착에서 비롯된다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흔히 말하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역시 모든 현상이 마음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마음의 작용과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일깨우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어떤 글이 유난히 거슬리고 꼴보기 싫게 느껴질 때, 그 글을 바꾸거나 상대를 탓하기 전에 잠시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부처님은 판단을 하지 말고 시시비비를 가리지 말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경계하는 건 내 마음에 사로잡혀 판단이 흐려지는거겠죠.
댓글을 곰곰이 읽다보면 제 마음을 먼저 들여다보라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거 같고... 이미 제가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판단을 흐렸다는 걸 전제하고 있는거 같아 불편하네요.
모든 것이 마음먹기 나름이라고 모든 것이 보기 좋을 순 없어요.
그리고 제바달다의 5가지 요구사항은 당시 수행자들이 당연히 지키는 것들이었습니다.
부처님 당시 불교가 아닌 출가 수행자들은 부처님과 그 제자들이 이 5가지를 안지킨다며 출가 수행자가 아니라는 비판을 했었죠. 특히 탁발시 고기를 받아와 먹는 것에 대해 비판했었죠. 이는 당시 사회에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고, 제바달다가 보기에 불교는 너무 해이해져 있다고 느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