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윳따 니까야』 35:95 「말룽꺄뿟따 숫따」. 세월이 흘러 말룽꺄뿟따는 늙었어. 경은 그를 "늙고 나이 들고 노쇠하고 인생의 마지막에 이른" 비구로 묘사해. 그가 부처님께 나아가 청해. 세존이시여, 저에게 간략하게 법을 설해주십시오. 제가 홀로 물러나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말룽꺄뿟따가 다시 청하고, 부처님이 이 짧은 구절을 주셔. 초기 불교 수행 지침 중 가장 압축적인 문장이야.
"말룽꺄뿟따여, 본 것에는 본 것만이 있을 것이고(diṭṭhe diṭṭhamattaṃ bhavissati), 들은 것에는 들은 것만이 있을 것이고(sute sutamattaṃ), 감각된 것에는 감각된 것만이 있을 것이고(mute mutamattaṃ), 인식된 것에는 인식된 것만이 있을 것이다(viññāte viññātamattaṃ).
그럴 때 그대는 '그것과 함께' 있지 않다(na tena). '그것과 함께' 있지 않을 때 그대는 '거기에' 있지 않다(na tattha). '거기에' 있지 않을 때 그대는 이 세상에도, 저 세상에도, 그 둘 사이에도 없다. 이것이 괴로움의 끝이다."
이게 뭘 말하는 거냐면 — 본 것에 아무것도 덧붙이지 말라는 거야. 봤으면 본 것까지만. 거기에 "좋다/싫다", "내 것이다", "저것은 나를 무시한 것이다"를 붙이지 말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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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색을 보고 사띠(sati, "지금 일어나는 것을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는 마음")를 놓치면, 좋아 보이는 모양에 마음을 두고 달아오른 마음으로 그것을 붙잡는다. 거기서 온갖 느낌이 번지고, 탐욕과 짜증이 마음을 해친다. 그렇게 괴로움을 쌓는 자는 열반에서 멀다고 한다.
반대로 사띠를 지니고 보면, 형색에 물들지 않고 담담하게 느끼며 붙잡지 않는다. 보고 느끼는데도 쌓이지 않고 오히려 줄어든다. 그런 자는 열반에 가깝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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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는 전문 AI 대화에서 퍼온겁니다.
알아차림(사띠)을 기본으로 꾸준히 불교공부를 하다 보면 조금씩 무언가 깨지는 걸 느낍니다. 그러다 하나가 툭 깨지고 버려집니다. 내가. 내가 보는 세상 중에 하나가요.
그게 한 번 깨지면 알아차림만 꾸준히해도 조금씩 조금씩 또 무언가 깨지기 시작합니다.
돈오돈수니 돈오점수니 둘 중 뭐가 맞냐 신경쓸 필요 없이요.
무상이니 무아니 없다는게 아닙니다. 변한다는거지.
그렇게 이해하면서도
위 부처님 답변 중 이 세상에도, 저 세상에도, 그 둘 사이에도 없다. 이 말은 참 자유로운 말인거 같아요.
그런데 또...
아무리 혼자 해탈하려 해도 우리 같은 일반인들은 이 시끄러운 세상을 다 함께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려면 또...
하나하나의 소음에 너무 휘둘리지 않고 그저 알아차리려(깨어있으려) 노력하고 흘려보내며 지냅니다.
흘려보내시길. 굳이 그것과 함께 거기에 계시지 마시길.
스트레스 덜 받으시는 하루 됐으면 좋겠습니다.
비슷한 얘기가 있습니다.
사소한 일은 사소하게 대하자(흘려보내자)
그런 일로 나의 소중한 일상을 흔들어 놓을 이유가 없다.
그 대가로 생기는 보상은 마음의 평온이다.
역시 깨우친 분들은 다릅니다.
다만 굳이 첨언하여 제 생각을 덧붙이자면 부처님은 한 번 더 비틀겁니다. 평온하려 애쓰지 말라. 평온에 집착하지 말라.
제가 쓴 글에 비추면 굳이 흘려보내지 말라. 흘려보내려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레 흘러간다. 집착하지 말라일겁니다.
그래야 진정한 의미의 평온이 오고 흘려보냄이 된다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