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 진영"이라는 건 무엇일까요. 저는 이번 정부에 이르러 "민주 진영"이라는 상징이 상당 부분 정당성과 힘을 잃었다고 봅니다. 이건 정부가 잘하고, 못하고와는 크게 상관이 없습니다. 그냥 세상이 변한 거지요.
저는 민주 진영의 코어에 크게 두 축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두 축을 기반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이 만들어졌지요.
하나는 반독재 민주화입니다. 과거 운동권 내부에 다양한 노선이 존재했음에도 함께 합의할 수 있었던 지점이 있다면 반독재 민주화였을 겁니다. 제6공화국이 출범한 이후에도 반독재 - 반군부 - 반검찰로 이어지는, 권력기관을 민주적으로 통제하려는 노력은 민주 진영의 가장 중요한 의제 중 하나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연대 / 환경 / 여성 / 노동 / 복지 / 재분배 / 평화와 같은 진보적 가치입니다. 많은 경우 이런 진보적 가치들은 어떤 식으로든 사회주의 혹은 사민주의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사회주의라는 것 자체가 무자비하게 증식을 해나가는 자본주의에 맞서 자본 이외의 가치들을 사회적으로 구현하려는 사상이었니까요.
한국의 민주 진영이라는 것은 결국 이 두 축의 스펙트럼 위에서 다양한 집단들이 연대할 때는 연대하고, 싸울 때는 또 죽어라 싸우면서 지금에 이르렀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역사상 가장 강한 힘을 가지게 된 지금, 왜 민주 진영은 오히려 가장 큰 정체성의 위기에 봉착했을까요. 저는 위에 서술한 코어의 한 축은 상당 부분 소명을 다했고, 다른 한 축은 진즉에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소명을 다한 코어는 반독재 민주화입니다. 민주화 세력은 이제 더 이상 저항세력이 아닙니다. 여러 차례 집권했고, 국가를 직접 운영했으며, 정치 행정 사회 모든 곳에서 주류 세력이 되었습니다. 제6공화국 출범 이후에도 민주 진영은 꾸준히 독재 - 군부 - 검찰의 힘을 빼고 정치적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지난 계엄이 실패한 것 역시 저는 그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 만들어놓은 제도와 시민의식의 결실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다수 시민들은 이제 민주적 선택을 받지 않은 세력이 힘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쉽게 수용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세력들이 어느 순간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요. 꾸준히 딴 생각을 품고 자신들의 생존과 권력 확대를 위해 움직입니다. 하지만 과거와 다른 점은 그들을 견제하고 제어할 수 있는 제도와 장치가 마련돼 있다는 것입니다. 검찰개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번 정부들어 여당이 검찰개혁을 제도화하면서 민주 진영의 숙원 역시 종착되고 있습니다. 반독재 민주화는 앞으로도 일상에서 끊임없이 지켜나가야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과거처럼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내는 개혁의 중심축이 되기는 어렵습니다.
다른 하나의 코어, 진보적 가치는 다른 방식으로 무너져 내렸죠. 국가가 선진국이 되고, 금융자본주의가 활성화되고,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이 일상에 깊숙이 들어오면서요. 저는 이번 정부가 민주 진영이 더 이상 과거의 진보적 가치만을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고 그럴 수도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정부라고 생각합니다.
"코스피 5000!" 어려서부터 금융자본주의에 익숙한 저희 세대에게야 그렇게 낯설지 않고 호응할 수 있는 구호입니다. 그런데 과거의 민주 진영에게는 꽤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구호였을 겁니다. 이명박이 코스피 5000을 이야기하고 747을 이야기했을 때 민주 진영은 산업화 진영의 성장주의를 비판했습니다. 원전은 어떤가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립니까? 결국 서 있는 자리가 달라진 것이고 실제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와 우선순위가 달라진 것입니다.
노동자도 국민연금과 퇴직연금으로 주식시장에 들어가고, 무주택자도 미래의 주택소유자가 되기를 희망하고, 중산층은 부동산 / 주식 / 연금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처럼 자본과 노동을 깔끔하게 두 집단으로 나누기 어려워졌죠. 대중들이 일상에서 자본 증식과 재테크에 집중하게 될 때, 연대 / 환경 / 여성 / 노동 / 복지 / 재분배 / 평화와 같은 진보적 구호들은 힘을 잃습니다. 물론 여전히 이런 의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요. 시민사회 운동을 하거나, 후원을 하거나, 각자의 방식으로 그런 가치를 지키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거대한 사회적 운동으로 나타나기는 어려워졌습니다. 소위 "민주 진영"이 마지막으로 만들어낸 대중적 사회운동이 언제였나 싶습니다. 세월호가 마지막 아니었을까요. 그것조차 그나마 진영을 넘어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안전'이라는 의제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의 강력한 규율 아래 사람들은 일상의 자본가가 되었고 386은 기득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진보운동은 힘을 잃었죠. 이제는 몇몇 소수정당과 시민사회가 간신히 이런 의제를 붙잡고 있는 정도지요. 심지어 이제는 이런 운동을 하면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누가 이런 세상을 만들었을까요? 우리 모두입니다. 소위 "민주 진영" 역시 이런 세상을 만드는 데 열심히 동참했고요.
그래서 저는 이재명 대통령이 진영 재건축을 하는 것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심정적으로 공감도 되지만, 재건축을 절대악처럼 규정하는 태도에는 잘 동의되지 않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이재명 대통령이 원래 그리고 있던 정부의 모습은 "반독재 민주주의 수호"라는 최소한의 원칙에 동의하는 세력이라면 폭넓게 참여해서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토론하고, 경쟁하고, 민주적으로 결정하는 일종의 경연장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이때 "반독재 민주주의 수호 세력"의 범위는 굉장히 넓게 설정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반대 진영에도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세력이 존재하고, 기존의 민주 진영은 자신들을 하나로 묶어주던 코어를 상당 부분 상실했으니까요.
물론 이재명 정부가 간과한 점들이 있습니다. 반대 진영의 속성이 내란 세력과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점, 여당 구성원과 지지자 상당수가 반대 진영에 매우 강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정작 "민주 진영"의 미래와 정체성에 대해 그 당사자들 스스로도 충분히 고민해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대통령의 오만한 태도! 설득하지 않고, 스킨십하지 않고, 자기가 맞다고 설명하는 태도! 머리 좋은 사람들이 종종 빠지는 가장 큰 함정을 대통령이 된 뒤에도 다시 저질렀지요. 자승자박인 측면이 꽤 있다고 봅니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저는 이제 "민주 진영"이라는 것이 새롭게 설계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인들이 무엇을 지향하는지, 앞으로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지, 반대 진영과 무엇이 다른지, 과거 민주 진영의 코어를 여전히 강하게 붙잡고 있는 세력들과 어디까지 함께하고 어디에서 갈라설 것인지.(저는 조국혁신당이 어쩌면 과거 민주당이 가지고 있던 코어 정체성을 붙잡고 있는 정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재설계 속에서 여당 정체성을 여전히 "민주 진영"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적절한지도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지금은 누가 진짜 민주 진영인지, 누가 배신자인지, 누가 좌고 누가 우고, 누가 민주고 누가 반민주인지 따지고 있지요. 그러다보니 같은 진영인지, 적인지, 좌인지 우인지, 민주인지 반민주인지 더불어 짬뽕인 것 같습니다. 권력투쟁에는 모두가 진심인데 정작 그 권력을 가지고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지 이야기하는 시간은 없네요. 정치인들은 뒤로 숨고 당원들은 파가 갈려 싸우고.. 어쩌면 지금의 모습이 당원주권주의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병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현 정부와 여당이 이런 파고들을 잘 정리하고, 함께 설계한 미래를 놓고 다시 공감과 지지를 모으면서 남은 임기를 잘 마무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그럴 수 있었다면 지금 이 상황까지 안 왔을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믿는다구~~~
이상.. 30대 남자 중 94퍼센트 진보라고 진단 받은 사람의 끄적거림 이었습니다!
비가역적인 사법개혁과 내란척결이 가장 우선시되어야합니다.
이게 의미있는 구분인가유..
진보 진영에서 피땀 흘리며 싸울 때 그들이 뭘 했나요?
밥그릇 챙기기로 보일 수는 있겠지만 후대들을 위해서 자리를 비켜 주는 것이 아닌
이언주 같은 부류들에게 만큼은 넘겨주기 싫다 이말입니다.
지금이라도 젊은 층에서 사리 판단이 분명한 괜찮은 인물들이 나온다면
당장이라도 정치에서 손을 떼고 제 남은 삶을 온전하게 즐기며 살고 싶습니다.
많이들 오해하시는데, 이재명 정부가 추구하는 노선이 민주진영이 쌓아온 진보적 가치까지 버리자는 게 아닙니다. 민주주의나 복지, 사회적 안전망 같은 가치는 그대로 가져가면서 성장과 실용, 시장에 대한 현실적인 접근까지 민주당이 너른 품으로 안고가야 한다는 쪽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시대가 변했고 민주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살아가는 모습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기존의 가치와 경계를 다 허물자는 게 아니라, 시대에 맞게 넓히고 다시 짜는 과정이라고 봅니다. 결국 지켜야 할 가치는 지키면서 새로운 아젠다를 만들고 그 안에 더 많은 사람과 생각이 들어올 수 있도록 넓혀가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재명 정부가 말하는 외연 확장도 기존의 것을 버리는 게 아니라 더 넓게 새 판을 짜는 의미라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솔직하게 말해 버릴 것은 버리고 지킬것은 확실하게 선포하는 게 재설계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진짜 진보적 색채를 가진 사람들도 자기의 자리를 찾아가고, 보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도 정부와 여당을 지지할 지 진지하게 고민을 하지요. 구조적 다수를 차지하기 위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가지면 결국 누구에게도 진정한 지지를 받지 못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많이 공감합니다.
다만 진보적 가치를 가졌다고 해서 자산이 오르길 바라는 게 모순은 아니라고 봅니다. 현실을 살다 보면 내 집도 걱정해야 하고 노후도 생각해야 하니까요. 그런 마음을 가지고도 한편으로 고민도 하셨던것 같은데 존중합니다
그리고 구조적 다수도 중요하지만 뭘 지키고 뭘 바꿀지는 분명해야 한다는 말씀에도 공감합니다.
돌아올수 없는 강을 건넜고 이제 회복 불능 상태입니다. 망한 민주진영이 다음 선거에 어떻게 처참히 패하는지 팔짱끼고 지켜보는것 밖에 할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