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쯤되면 내란 옹호 인사 등용이 이재명 정부의 인사 정책인 거죠... 과연 내란세력과 손 잡은 건 정청래인가? 이재명인가? 알만합니다... ㅎㅎ
져니아일랜드
IP 211.♡.90.134
09:24
2026-08-25 09:2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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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럼또 386운동권 쓰자구요?
Hose
IP 58.♡.63.239
10:05
2026-08-25 10: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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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져니아일랜드님 차라리 계엄 지지자 보다는 운동권이 낫겠네요
hidnbox
IP 121.♡.186.211
09:40
2026-08-25 09:4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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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이해가 안되네요.
yyfather
IP 210.♡.41.89
10:48
2026-08-25 10: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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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뭐라고 하던 난 다른 사람이야.. 저짝들하고도 잘 지낼수 있어.. 라는 똥고집이 여전하시네요.. 뭐 어쩌겠어요.. 그렇게 타고 났는데 .. 지지율은 더 떨어지겠죠
은의나무
IP 122.♡.211.171
13:45
2026-08-25 13:4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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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에서는 그나마 쓸만한 인재입니다.
인요한 적십자회장 자격 이유
인요한의 집안은 4대째 대를 이어 대한민국에서 교육 의료 봉사 활동을 하며 사회 발전에 공헌 광주민주화 운동때 광주에 내려가 시민운동을 통역 역활을 하며 시민운동을 도움. 군부독재정권의 데모주동자 혐의로 감시 우리나라 구급차 개발과 보급 북한 결핵사업 지원 유진벨 재단 설립
인요한의 집안은 4대째 대를 이어 대한민국에서 교육 의료 봉사 활동을 하며 사회 발전에 공헌해왔고,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이후 개정된 국적법 제7조 제1항 제2호(대한민국에 특별한 공로가 있는 자)에 의해 특별귀화허가를 받고 2012년 3월 21일 권재진 대한민국 법무부 장관에게 대한민국 내 외국 국적 불행사 서약을 함으로써 기존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여 복수국적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인요한은 연세대 가정의학과 1학년 재학중이던 1980년 5.18 민주화운동에서 시민군의 통역을 맡았다. 연세대학교가 신군부의 조치에 따라 폐교되자 인요한은 순천으로 내려가 가족 집에 머물렀는데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광주에서 순천으로 갓 탈출한 마을 사람이 광주에서 일어난 건 폭동이 아니라 봉기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의구심을 품게 된 인요한은 광주에 갈 결심을 하고 순천의 지인 1명과 함께 광주로 향하게 된다. 검문에서 저지당하지 않기 위해 인요한은 미국 대사관 직원으로 위장하여 “광주에 있는 미국인의 안전을 위해 왔으니 허가해주지 않으면 외교 문제가 될 것” 이라고 말하며 검문소를 통과했다. 같이 동행했던 지인은 가짜 통역관 역을 했다.
신군부는 인요한을 데모 주동자로 규정하고, 주한미국대사관에 측에 인요한에 대한 추방 공지를 보낸다. 인요한은 대사관에 소환되었고, 영사는 “당신이 한 건 통역이 아니라 데모 주동이다. 당신의 조상이 이 나라에서 한 일을 감안해 구속은 하지 않겠으니 한국을 떠나라” 라고 추방을 통보하였다. 인요한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영사와 말다툼을 벌였고, 인요한의 아버지인 인휴가 직접 영사를 설득한 끝에 3가지의 제안을 받아낸다. 하나는 추방 당하는 것, 또 하나는 구속되어 형사 처벌을 받는 것, 나머지 하나는 순천에서 기거하며 생활하는 것이었다. 한국에 남길 원했던 인요한은 순천으로 내려가 생활하며 영어 교사를 하며 지냈다.
984년 4월 10일 인요한은 부친상을 당한다. 아버지 인휴는 당시 교회 건축에 필요한 자재를 실고 이동하던 중 만취한 기사가 운전하던 관광버스에 치여 부상을 당했으나, 당시에는 구급차가 없어서 차량 뒷좌석에 실려 이송되던 중 결국 사망하였다. 인요한은 외국인 진료소 소장을 맡은 1992년 귀국한 뒤, 미국의 남장로교로부터 받은 추모 자금을 이용하여 15인승 승합차를 구입, 미국 텍사스에서 본 구급차의 구조를 바탕으로 승합차를 개조하여 구급차를 제작하였다. 인요한이 만든 1호 구급차는 당시 순천 진료소에서 처음 사용되었고, 이 후 건설업체와 계약 후 전국에 5,000여 대 이상 보급되었다.
1995년 린튼 형제들은 북한 결핵사업 지원을 위해 유진 벨 재단을 설립하였고, 인요한은 1997년 북한을 처음 방문한 이래 총 28번 방북하였다. 유진벨 재단은 북한에 200여개의 결핵진료소를 세우고, 인요한이 제작한 구급차를 기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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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려고 뽑은게 아닌데
내 자식 물고빨듯 하다가 망하듯이 지금이라도 “이건 아니잖아요!” 라고 목소리를 내야 대통령도 늦기 전에 방향전환을 할껀데
청래당이니 펨코니 일베니 하면서 현실 부정을 하는게 참 답답하네요
저 사람 아니면 일 할 사람이 없는것도 아니고 무리 하면서 쓸 이유가 없습니다.
북한하고 소통의 쓰임새가 있다는것도 지금 북한 태도를 보면 말빨도 안먹힐겁니다
당장 탄핵 표결에 불참했던 자들은 내란 지지세력 이라 봅니다.
이건 대통령실에 문제가 확실히 있네요. 입닫고 있는 여당도 큰 문제네요.
과연 내란세력과 손 잡은 건 정청래인가? 이재명인가? 알만합니다... ㅎㅎ
뭐 어쩌겠어요.. 그렇게 타고 났는데 ..
지지율은 더 떨어지겠죠
인요한 적십자회장 자격 이유
인요한의 집안은 4대째 대를 이어 대한민국에서 교육 의료 봉사 활동을 하며 사회 발전에 공헌
광주민주화 운동때 광주에 내려가 시민운동을 통역 역활을 하며 시민운동을 도움.
군부독재정권의 데모주동자 혐의로 감시
우리나라 구급차 개발과 보급
북한 결핵사업 지원 유진벨 재단 설립
인요한의 집안은 4대째 대를 이어 대한민국에서 교육 의료 봉사 활동을 하며 사회 발전에 공헌해왔고,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이후 개정된 국적법 제7조 제1항 제2호(대한민국에 특별한 공로가 있는 자)에 의해 특별귀화허가를 받고 2012년 3월 21일 권재진 대한민국 법무부 장관에게 대한민국 내 외국 국적 불행사 서약을 함으로써 기존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여 복수국적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인요한은 연세대 가정의학과 1학년 재학중이던 1980년 5.18 민주화운동에서 시민군의 통역을 맡았다.
연세대학교가 신군부의 조치에 따라 폐교되자 인요한은 순천으로 내려가 가족 집에 머물렀는데 광주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광주에서 순천으로 갓 탈출한 마을 사람이 광주에서 일어난 건 폭동이 아니라 봉기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의구심을 품게 된 인요한은 광주에 갈 결심을 하고 순천의 지인 1명과 함께 광주로 향하게 된다.
검문에서 저지당하지 않기 위해 인요한은 미국 대사관 직원으로 위장하여 “광주에 있는 미국인의 안전을 위해 왔으니 허가해주지 않으면 외교 문제가 될 것” 이라고 말하며 검문소를 통과했다. 같이 동행했던 지인은 가짜 통역관 역을 했다.
신군부는 인요한을 데모 주동자로 규정하고, 주한미국대사관에 측에 인요한에 대한 추방 공지를 보낸다. 인요한은 대사관에 소환되었고, 영사는 “당신이 한 건 통역이 아니라 데모 주동이다. 당신의 조상이 이 나라에서 한 일을 감안해 구속은 하지 않겠으니 한국을 떠나라” 라고 추방을 통보하였다. 인요한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영사와 말다툼을 벌였고, 인요한의 아버지인 인휴가 직접 영사를 설득한 끝에 3가지의 제안을 받아낸다. 하나는 추방 당하는 것, 또 하나는 구속되어 형사 처벌을 받는 것, 나머지 하나는 순천에서 기거하며 생활하는 것이었다. 한국에 남길 원했던 인요한은 순천으로 내려가 생활하며 영어 교사를 하며 지냈다.
984년 4월 10일 인요한은 부친상을 당한다. 아버지 인휴는 당시 교회 건축에 필요한 자재를 실고 이동하던 중 만취한 기사가 운전하던 관광버스에 치여 부상을 당했으나, 당시에는 구급차가 없어서 차량 뒷좌석에 실려 이송되던 중 결국 사망하였다. 인요한은 외국인 진료소 소장을 맡은 1992년 귀국한 뒤, 미국의 남장로교로부터 받은 추모 자금을 이용하여 15인승 승합차를 구입, 미국 텍사스에서 본 구급차의 구조를 바탕으로 승합차를 개조하여 구급차를 제작하였다. 인요한이 만든 1호 구급차는 당시 순천 진료소에서 처음 사용되었고, 이 후 건설업체와 계약 후 전국에 5,000여 대 이상 보급되었다.
1995년 린튼 형제들은 북한 결핵사업 지원을 위해 유진 벨 재단을 설립하였고, 인요한은 1997년 북한을 처음 방문한 이래 총 28번 방북하였다. 유진벨 재단은 북한에 200여개의 결핵진료소를 세우고, 인요한이 제작한 구급차를 기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