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6:00 KST - Elle / 엘르 USA - 미 위스콘신 주의 한 입양아 출신인 발로리 셰퍼씨의 기고문을 Elle가 전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한강이 가로지른다. 구부정하지만 마치 미소짓는 것처럼 흐르는 한강은 가족,친구,젋은 부부들이 프라이드 치킨과 즉석라면을 즐기는 곳이며 반포대교의 무지개 조명쇼를 즐기는 장소이다. 한강. 그 강의 이름인 "한/HAN/恨"은 한국인들에게는 또다른 의미가 있다.
한(恨). 깊은 고통이나 슬픔의 감정. 결코 치유되지 않는 원시적인, 영원히 가슴속에 남아 사라지지 않는 정신적 트라우마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한(恨)은 단순한 상처가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그것은 힘과 용기, 회복력의 원천이기도 하다. 한국을 잔인하게 짓밣은 참혹한 일본의 식민지배, 가족과 국가를 두동강낸 한국전쟁속에서 한국인들을 지탱해 온 한(恨)은 한국인들을 단결시켜 가난을 극복한 고도경제성장을 단 70여년만에 이끌어냈으며 오늘날 경제,문화강국으로 이끈 집단적 의지를 가능케 했다. 어떤 이들은 한(恨)이 여러 세대로 전해지는, 뼈에 단단히 각인된 한국인들의 DNA라고 말한다.
(사진설명 : 발로리 세퍼 / 제공 : Elle USA) LINK
나는 1960년에 한국에서 태어나 위스콘신의 한 백인 가정에 입양되었다. 한국전쟁의 고단한 삶때문에 미국과 유럽으로 입양되어진 20여만명의 아이들 중 하나이다. 1962년 3월,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 도착한 나는 빨간색 겨울옷과 양말만 신은 채 미국 중서부의 눈부신 도시야경에 눈을 껌벅거리며 멍하니 서 있었다. 이제 내가 새로운 세상에 있다는 걸 깨닫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의 유년시절엔 K-드라마, K-푸드, K-POP 그리고 K-스킨케어가 없었다. HBO에서 대니얼 대 김이 전세계에 소개하는 한국의 핫하고 트랜디한 한류 문화는 그 당시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먼 미래이야기였다. 한류라는 파도를 만날려면 그땐 적어도 수십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1960년대의 위스콘신 시골에서는 한국인이라는 것이 전혀, 아예 조금도 멋진 점이 아니었다. 나의 소꿉친구들은 주머니 가득 픽시 스틱(미국판 아폴로 과자)을 상으로 줄테니 지도에서 한국을 찾아보라고 해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나라고 찾을 수 있었을까? 한국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천지였으니 내게 붙여진 별명들은 독창성도 정확성도 없었다. Jap, Chink, Gook - 일본, 중국, 배트남인을 가리키는 비하어 는 배트남전 이후 붙여진 그나마 참신한 별명이었다.
"니네 나라로 돌아가" 라는 말을 들을때마다 10센트씩 받았더라면 좋았을텐데. 그러나 돌아가고 싶어도 어딘지를, 무슨 나라인지를 몰랐다. 알 방법도 없었다. 절망감에 몸부림치며 최신 유행하는 랭글러 청바지를 입고, 희망이 없어보였지만 검은색 참머리를 좀 더 멋지게 보이게 할려고 갖은 헤어스타일로 머리를 말아올렸지만 나의 팬케이크같은 펑퍼짐한 얼굴과 쭉 찢어진 "칭총" 눈은 여전히 나를 괴롭힘을 당하기 쉬운 표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 당시 나의 제일 간절한 소망은 원치 않는 관심을 받거나, 농담의 소재가 되거나 놀이터에서 괴롭힘당하지 않고 하루를 무사히 넘기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지워주길 원치 않았다. 나는 내가 날 지우길 간절히 원했다.
나의 양부모님들은 나를 사랑하셨다. 그러나 어떻게 날 도울 지 방법을 모르셨을 것이다. 내가 제일 두려워했던 건 나를 사랑했던 양부모님들이 내가 다른 "미국인"들과 다르다는 것을 양부모님들이 나를 사랑한 나머지 모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내가 다르기 때문에 양부모님들이 "반품"이나 "환불"같은 생각을 하시면 어떻하나 라는 두려움이었다. 부모님들이 K-마트에서 당시엔 핫한 "파트리지" 점심도시락통을 사다주어도 또래와 어울리지 못한다는 사실에 충격받으면 어떻하나 떨었다. 동네에서는 나처럼 생긴 아이가 없었다. 백인 아이들의 괴롭힘에 맞서 거친 욕설을 가르쳐줄 다른 소수민족들도 없었다. 나는 그때 내게 유일하게 합리적으로 보였던 일을 했다.
나는 그 작은 마을을 기회가 생기자마자 바로 미련없이 떠났다.
그땐 몰랐었다. 생모가 있는 나라에서 6천마일이나 떨어진 곳에서 자랐음에도 나 역시도 한(恨)을 품고 살았다는 것을. 내 인생의 대부분을 한(恨)이 지닌 슬픔을 어떻게는 지우려고 애쓰며 한(恨)의 또다른 힘으로 질기고 끈질기게 이방인으로 받은 부당함과 불공정을 견뎠다. "어떻게던 견디며 삶을 살아간다" 라는 한(恨)은 친부모를 찾기위한 수없이 간절하고, 그만큼 헛된 시간과 결과들도 나를 막지 못했다. 오히려 날 더 강하게 만들었다. 소위 "고아"라는 명목으로 날 무례하게 내쫓은 후 63년만인 작년, 마침내 나는 한국 땅을 밟았다. 처음 인천공항에 도착한 날, 산산조각 무너져 내리지 않게 날 잡아준 것도 아마 한(恨)이었을 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나의 깊은 속에 잠궈두었던 분노와 굴욕, 상실감의 둑을 터주어 흘려보내게 한 것은 도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한국의 K-POP 아이돌 BTS였다.
나는 열성적인 BTS 팬은 아니다. 초기부터 BTS를 안 것도 아니었다. 히트곡들은 알고 있지만 랩 가사를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는 정도이지 리듬에 맞춰 칼군무를 따라 출 엄두도, 그럴만한 나이도 아니다. 그러니 아미(ARMY)의 일원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겠다. 그러나 BTS의 군복무 이후 첫 컴백앨범발표인 넷플릭스의 3월 21일 "BTS: The Comeback Live" 중계는 알람을 맞춰두고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시간 오후 8시, 미국 중부시간대는 아침 6시였다. 나는 뜨거운 녹차 한 잔을 손에 들고 TV 앞에 자리를 잡았다. 말 그대로 ‘완전히 몰입한’ 상태였다.
콘서트는 댄스 플로어를 위해 만들어진, 클럽에서 틀기 딱 좋은 3분짜리 곡인 “Body to Body”로 화려하게 막을 올렸다. 하지만 약 2분이 지났을 무렵,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곡이 브릿지 부분으로 치닫는 순간, BTS는 약 6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한국의 전통 민요인 “아리랑”의 샘플을 곡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아리랑 선율은 서서히 흘러나오더니 점차 고조되어 꽃피듯 울려 퍼졌다. 한국 전통 악기연주를 배경으로 천사 같은 합창이 울려 퍼지더니, 노래가 땀이 흠뻑 젖을 정도로 열광적인 피날레로 치닫는 순간 그 소리는 서서히 사라졌다.
두 번째 “아리랑”이 흘러나오자마자, 나는 갑자기 눈물을 터뜨렸다.
무엇이라 정확히 표현하기 어려운, 온 몸을 휩쓸어버리는 강렬한 경험이었다. 한국어를 잘 모르니 아리랑을 들어도 가사를 이해하지도 못했다. 무엇때문인지 몰랐다. 이 모든 것이 아침식사 전 일어난 격렬한 감정의 소용돌이었다. 라이브 스트리밍 이후 <Body to Body>를 수십차례 들었지만 여전히 아리랑 파트 부분에서는 매번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요즘은 공공장소 어디에서건 BTS의 노래가 흘러나오다 보니 이젠 감정을 추스리는 것도 일이 되어 버렸다. 아리랑에 대한 이런 나의 감정은 대체 무엇일까? 본능적인 것일까? 아니면 어떤 논리적인 설명이 있을까?
"아리랑"은 잔혹한 일본 식민지 지배하 한국인들이 생존을 위해 고분분투하던 시절, 한국어 사용을 금지당하고 조국의 노래를 오직 비밀스럽게 불러야만 했던, 고달팠던 한국인들을 지탱해 준 노래이다. 이 노래에는 분단의 아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담겨 있다. 이 아이랑을 담아낸 <Body to Body>에 대한 강렬한 반응을 보인 이는 나뿐만이 아니다. 소셜 미디어에서는 BTS 아리랑 선율에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들의 릴들이 넘쳐난다. 내가 아는 입양아 출신들도 정체성을 더 강하게 느끼게 되었으며 평생 짊어지고 살았던 수치심과 자신의 뿌리에 대한 유대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BTS는 자신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컴백 앨범 제목을 ‘아리랑’으로 정한 것은 일종의 재출발이자, 의지와 목적, 그리고 포지셔닝을 선언한 것이었다. 2013년 데뷔 이후, 이들은 미국과 유럽 언론으로부터 노골적이거나 은근한 인종차별을 겪어왔다. 지난 7월, 그들은 새로 신설된 ‘최우수 아시아 팝 음악 공연(Best Asian Pop Music Performance)’ 부문에 격리되는 것을 거부하며 그래미 어워드 불참을 선언했다. 앨범과 그 창작자들을 ‘타자화’하는 행위는 계산적이고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문이 쾅 하고 닫히는 것 같았고, 뺨을 한 대 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느낌을 고통스럽지만 익숙하게 느껴온 사람이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미국으로 입양되었기에 한국에서 자라지 않았다. 한국인 가정에서 자란 디아스포라 한국인도 아니기에 "교포(Gyopo)"도 아니다. 그럼 난 누구일까? 다른 한국인 입양아들과 마찬가지로, 어느 한곳에 완전히 뿌리내리기엔 미국인으로서도, 한국인으로서도 부족했던, 말하자만 틈새 속의 틈새같은 존재이다. BTS를 포함한 K-POP 아티스트들의 부상과 한류의 번창은 나의 출생지에 대한 유대감을 주긴 하지만 이마저도 나에게는 복잡한 심경을 불러 일으킨다.
피와 땀, 그리고 공동체의 희생 속에서 탄생한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적을 목격하며, 나는 자부심과 슬픔을 동시에 느낀다. 나는 한국을 국제적인 강국으로 일구어낸 사람들과 같은 피를 나눴지만, 그 고된 노력에 동참하지는 않았기에 그 어떤 성과도 내 것으로 삼을 수 없다. 나는 한국인과 함께 폭풍이 몰아치는 배에서 함께 노를 젓을 기회를 얻지 못했다. 나의 기여는 배에서 내려 짐을 덜어주는 것이었다. 나는 한국을 떠남으로써 오늘날의 한국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내 안에는 깊고도 완고하게 ‘한국인’다운 무언가가 있다고 믿는다. 거울 속 내 모습과 아름다운 한국 아이들의 얼굴에서 그것을 본다. 서울 거리를 걸으며 인파 속으로 스며들 때면 그 느낌을 온몸으로 느낀다. TV나 콘서트 무대에서 보는 한국인들의 얼굴 생김새—둥근 윤곽, 높은 광대뼈와 낮은 코, 고집스럽게 삐져나온 머리카락—에 나는 감동을 받는다. 어릴 적 나를 괴롭혔던 아몬드 모양의 눈조차 이제는 절묘한 아름다움, 매끄럽고 미니멀한 우아함으로 보인다. 나이가 들수록 반점 투성이인 - 마치 시간이 지나면서 바나나에 검은색 반점이 번져가는 것처럼 - 한국에서 태어난 내 피부에 더 큰 편안함을 느낀다.
BTS의 음악은 나에게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을 열어주었으며 내 안의 모습들과 함께 춤출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그리고 한국의 모든 것을 배워가는 첫 시작을 내딛게 해줬다. 한국 음식, 책, 영화, 패션, 트로트부터 언더그라운드 랩에 이르기까지 차근차근 나의 플레이리스트에 올려두고 있다. 한국의 역사를 차근차근 배워가고 있으며 한글을 연습하고 있다. 한인식당에서 무의식적으로 영어를 쓰는 데신 더듬거리며 한국어로 직원들에게 인사를 해보려 애쓴다. 전세계의 한국 입양인들을 연결해주는 페이스북 그룹 6곳에 가입했다. BTS의 어른 팬모임인 "실버 ARMY"에 가입해보려고 한다. 어떨 때엔 아리랑을 들을때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으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이젠 쭈글쭈글한 할머니 소릴듣는 나이대에서 내가 처음으로 시작한 일이다. 여전히 난 나의 정체성이 한국인인지 미국인인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그건 마치 단일한 문양이 아닌 모자이크와 같은 것이어서 어딜 가더라도 나의 위치를 자신감있게 찾아가지 못하고 주볏대며 망설이는 나의 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고분분투하며 아픔을 겪으며 안식처를 찾아가는 평생의 과제이며 이제 나는 출발선에, 그것도 아주 늦게 서게 되었다.
이 모든 과정에서는 나는 비로소 한(恨)이 두가지 극단으로 역동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엄연히 존재하며, 균형을 이루고, 매우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그것이 나 안에서 가장 한국적인 부분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