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오늘도 그의 몸을 정성스레 씻겨준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의 몸을 다 씻기고 나면 그녀는 조금 안도했다.
넓은 어깨와 가슴, 볼록한 엉덩이, 두툼한 허벅지, 구석진 겨드랑이까지 그 어느 곳도 예외는 없었다.
땀을 흘리며 씻긴 뒤 힘들 때면 그녀는 듬직한 그의 품 안에 들어간다.
그의 흔들림 없는 무릎 위에 앉아 조잘조잘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늘 한 시간 정도는 순식간에 지나가있다.
화장실에서 나온 그녀는 무릎을 꿇은 채 그의 몸에 달라붙어 있는 물방울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닦아준다.
그는 무릎 꿇은 그녀의 얼굴에 입을 맞춘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의 허벅지에 얼굴을 묻는다.
잠시 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어나 손톱깎기를 가져온다.
"왼손"
그는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민다.
얼마 자랐다 하기에도 부족한, 형태만 남아있는 손톱을 하나씩 자른다.
잘린 손톱은 바닥에 떨어졌고 그는 그때마다 떨어진 손톱을 정리한다.
"어차피 다 깎고나서 청소하는게 더 효율적이지 않아?"
그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짓는다.
그녀는 그를 계속 쳐다보며 그 미소의 이유를 찾으려 했지만 끝내 알지 못한다.
바닥에는 손톱 한 개가 남아 있었다.
그녀는 손톱을 집어 든다.
잠시 바라보고는 입안으로 넣는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방에서 나온 그녀는 거실 소파에 몸을 눕힌다.
"자기야 커피 한 잔 부탁할게. 늘 하던대로"
그는 늘 완벽한 배합으로 그녀가 원하는 커피의 맛을 만든다.
그녀는 한 모금을 마신다.
오늘도 같은 맛이다.
그녀는 조금 높아진 톤으로 말한다.
"전에 내가 얘기했던 조르지오 모란디 작가 기억하지? 요새 그의 그림이 계속 내 마음에 남아.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기술적인 면에서 아니면 감정적인 면에서?"
"모르겠어.."
"어쩌면 모든 게 거짓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더라"
"그 그림이 널 그렇게 생각하게 만든 것 같아?"
"잘 모르겠다니까? 그저 자꾸 그 그림이 생각나. 병들이 모여 있는 걸 그린 화려할 것 없는 그림일 뿐인데"
"... ... 모란디는 그 병들을 수십년 동안 반복해서 그려왔어. 그 과정에서 수백개의 병들이 표현되었고 결국 남는 것은 존재 그 자체일 뿐이었지"
"누가 언제 설명해달랬어?"
"응.."
"답답하네 정말. 왜 이렇게 내 마음을 몰라주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에 대해 얘기하고 싶은지 말해줄래?"
"그림 속에 놓인 건 병일 뿐이잖아. 근데 이상하게 날 슬프게 하는 것 같아"
"감상자는 얼마든지 다양하게 느낄 수 있어. 같은 음악을 듣고도 서로 다른 감정을 느끼는 것처럼"
"속상하다 속상해... 난 너와 그런 걸 말하고 싶은 게 아니란 말야"
"미안해 네 슬픈 감정에 더 집중했어야 하는건데"
그녀는 그의 깊은 눈동자 사이에 놓인 날카로운 콧대를 잠시 본다.
"그래도 고마워 내가 모르는 것들을 알려줘서.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도 너뿐이니까"
"그렇게 말하니 나도 좋아"
"넌 항상 말을 이쁘게 해서 좋다니까"
그녀는 커피 잔을 입술 끝에 대고 남은 커피를 마저 들이켠다.
소파에서 일어난 그녀는 커피잔을 싱크대에 두고 물을 담궈둔다.
이어서 그녀는 식탁 위에 배치한 병들을 쳐다본다.
며칠 전 모란디 작품을 본 뒤 그 병들을 배치하느라 몇 시간이 걸렸었다.
그녀는 무심코 병 몇 개를 골라 물을 채운 뒤 싱크대에 둔다.
이를 바라보던 그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그토록 신중히 배치한 병들을 그렇게 쉽게 허물어버리는 이유가 궁금했다.
"괜찮아? 꽤 고생해서 배치했었잖아"
"응 뭐 어때. 다 그런거지. 뭐든 시간이 지나면 변하는 걸"
"그건 그렇지만 방금 전까지 나와 얘기하다가 갑자기 그렇게 행동하니까 더 걱정되기도 하고 신경쓰여서 말야"
"그럴 거 없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게 되더라"
"그렇구나. 그 병은.. 그 병으로 뭘 마실 것도 아닐텐데 물은 왜 담가서 싱크대에 둔거야?"
"글쎄 그러고보니 왜일까? 내가 왜그랬지? 뭔가를 채우고 싶었던걸까?"
그는 그 말을 듣자마자 그녀를 뒤에서 안는다.
따듯한 온기를 느낀 그녀가 그의 팔뚝을 손가락으로 쓰다듬는다.
그는 한 가지를 제안한다.
"물이 찬 상태의 이 병들과 빈 병들을 조합해서 식탁에 두는 건 어떨까?"
그녀가 어딘지 내키지 않아 망설이는 사이, 그는 물이 찬 병들을 집어 들며 식탁에 배치한다.
"어때?"
"모르겠어. 난 좀.."
"난 이게 더 예쁜 것 같아"
"왜?"
"그냥... 네가 며칠 전 그 병을 바라보던 표정을 다시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인지.. 정확히는 나도 모르겠어"
"빈 병이 그 전보다 더 허전해보이는 것 같아"
"그럼 전부 물을 채워볼까?"
"아니야 그런게. 그냥 좀 냅뒀으면 좋겠어"
그녀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닦아 줄래? 이 병들 말이야"
그는 병 하나하나를 정성스레 씻겨준다.
다 씻은 병들은 수건으로 물기를 말끔히 제거한다.
식탁 위의 병들은 윤기가 나고 있었다.
식탁 위엔 아무 것도 놓여있지 않았다.
구조를 다양한 매체로 작업합니다.
글과 사진, 영상 그리고 설치까지.
아래 signature에 남겨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