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애니 홀(Annie Hall)을 이미 수차례 봐왔음에도, 난 영화를 보다가 멈추기를 수시로 반복한다.

01:46
우디앨런이 연기한 일관된 캐릭터
지금까지 그의 영화 속 우디 앨런이 연기한 캐릭터는 실제 본인의 모습을 상당 부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실제 모습이나 가치관과 겹치는 요소도 일부 있겠지만, 이번에 영화를 보며 새롭게 느낀 것은 애초에 그 캐릭터는 감독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보단 자신이 가진 문제의식을 서사 속에 자연스럽게 녹여내고,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기능하게 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다.
그건 마치 찰리 채플린이 자신의 영화를 위해 일관된 캐릭터를 구축했던 방식과도 닮아 있다.
다만 우디 앨런이 더 뛰어난 지점은 그 캐릭터가 서사와 분리되어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서사 속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스며든다는 점이다.
내가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했던 이유는 많은 창작자들이 자신의 캐릭터를 통해 자연스럽게든 대놓고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직접 전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디 앨런 역시 영화 속에서 종종 촬영 자체를 인식한 채 관객에게 직접 말을 걸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철학과 가치관이 담긴 대사를 하기도 한다. 그러니 그 캐릭터를 감독 자신의 분신처럼 받아들이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조사해 보니 실제 우디 앨런과 영화 속 캐릭터 사이의 괴리는 상당하다고 한다. 신경과민적이고 우유부단하며 촐싹대는 인물과 달리, 실제 그는 자기 확신이 강하고 실행력이 뛰어나며 적어도 겉으로는 타인에게 따뜻하고 젠틀한 사람이라는 평이 많았다.
생각해 보면 이는 매우 영리한 선택이다.
책이든 영화든 주인공이 이미 답을 가진 채 관객에게 그것을 직접 전달하기 시작하면 감상의 폭은 급격히 줄어든다. 우디 앨런은 오히려 우스꽝스럽고 흔들리는 인물을 앞세움으로써 관객이 스스로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지금에서야 그 일관된 캐릭터가 하나의 전략적 장치였다는 사실이 보인다.

10:18
개별 씬과 전체 서사 간의 조화로움
우디 앨런의 모든 영화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의 뛰어난 작품들은 개별 씬과 전체 서사가 각각 강한 힘을 지니면서도 서로를 해치지 않는다. 개별 장면은 독립적으로 완결성을 가지지만, 동시에 전체 서사 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든다.
상업영화일수록 대체로 전체 서사의 흐름에 더 무게를 두고, 예술영화일수록 개별 장면 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기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두 요소를 동시에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애니 홀』을 보면 거의 모든 장면이 그렇다. 감정적으로든, 철학적으로든, 인지적으로든, 풍자적으로든 하나의 장면만 떼어놓고 보아도 충분히 의미를 가진다.
위의 장면은 어설픈 지적 우월감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동시에 비판적인 시선이 얼마나 쉽게 타인과의 관계를 망가뜨릴 수도 있는지를 함께 비춘다. 즉, 어느 한쪽에 치우쳐 무엇이 옳고 그르다는 것이 아니라 양쪽을 모두 비추고 있다. 이러한 장면은 플롯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장면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서사 속에서 붕 뜨지도 않는다. 오히려 독립적으로 기능하면서도 전체의 결을 조금씩 두텁게 만든다.
우디 앨런은 일련의 모든 과정에서 시종일관 힘을 뺀다. 진지한 문제를 다루면서도 일부러 무게를 과장하지 않는다. 인간의 부조리함과 사랑스러움, 사회의 구조와 통념을 이야기하면서도 시트콤에 가까운 리듬으로 풀어낸다.
그 힘을 빼는 방식은 단순한 유머와도 다르다. 관객을 웃기기 위해 장면을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웃음 덕분에 더 깊은 사유가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만든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장면이 조금만 쌓여도 다양한 결의 사고를 경험하게 된다. 어떤 장면에서는 철학적으로 생각하게 되고, 어떤 장면에서는 인간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며, 또 어떤 장면에서는 감정적으로 오래 머무르게 된다.
대부분의 영화는 하나의 서사를 따라가며 그 안에서 감정과 사유를 만들어낸다. 반면 우디 앨런의 뛰어난 작품들은 개별 장면 하나하나가 이미 충분히 기능하면서도, 그 장면들이 모여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내가 감탄하는 지점도 바로 그것이다. 하나의 장면으로도 충분히 서 있으면서 동시에 전체를 무너뜨리지 않는다는 것.
그런 균형은 의도만으로는 만들기 어렵다. 오랜 시간 축적된 감각과 압도적인 구성 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처럼 느껴진다.

17:59
우디앨런식 유머
그의 유머는 사람을 웃기기 위한 목적에 머물지 않는다.
위 장면에서 우디 앨런은 여자와의 키스를 피하기 위해 갑자기 음모론을 늘어놓는다. 특유의 신경쇠약적이고 산만한 태도로 제법 논리까지 갖춘 말을 쉴 새 없이 쏟아낸다. 그리고 한참 뒤 여자가 짧은 한마디를 던진다.
이 장면은 박장대소를 유도하지 않는다. 대신 실소와 함께 관객의 방어를 조금 무너뜨린다.
우디 앨런의 유머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는 인간이 가장 방어적으로 반응하는 문제들을 유머 속으로 끌어들인다. 성, 욕망, 불륜, 비겁함처럼 자칫 진지하거나 불편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문제들 말이다.
정면으로 던져진 질문은 사람을 쉽게 방어하게 만든다. 그러나 유머는 그 방어를 잠시 늦춘다. 관객은 웃고 있는 사이 자신도 모르게 인간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옳고 그름을 설교하지 않는다. 특정한 답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그저 인간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관객이 그 안에서 스스로 질문을 시작하게 만든다.
내가 그의 유머를 좋아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웃음이 목적이 아니라 사유를 시작하게 만드는 장치이기 때문이다.
웃음은 끝나지만 질문은 남는다.

22:16
지성인들의 대화
우디 앨런의 영화에는 예술과 철학,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에 관한 깊이 있는 대화가 끊임없이 등장한다. 그의 대표작 대부분은 직접 각본을 썼지만, 그런 대사들은 상업영화 안에서도 지루하거나 난해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나 자연스럽게 서사 속에 스며든다.
처음엔 이런 대사들이 감독의 지적 능력이나 교양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영화를 거듭 볼수록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우디 앨런이 성장한 당시 뉴욕의 유대인 문화에는 예술과 철학, 정치와 사회를 일상적으로 이야기하는 분위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그의 영화 속 대사들도 과시라기보다 그가 살아온 문화가 자연스럽게 스며든 결과처럼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나는 한 가지를 더 생각하게 된다. 감독이 굳이 이런 인물들을 반복해서 등장시키는 이유는, 결국 아무리 지적이고 교양 있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한낱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더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닐까.
영화 속 그들은 예술과 철학을 이야기하면서도 불륜을 저지르고, 범죄를 저지르며, 질투하고, 비겁해진다. 높은 지성과 인간의 부조리함이 한 사람 안에서 아무렇지 않게 공존한다. 그래서 그들의 대화는 단순히 교양을 과시하는 장치가 아니라, 인간을 더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장치처럼 느껴진다.
나는 늘 이런 문화를 동경해왔다. 예술과 철학을 일상처럼 이야기하고, 서로의 생각을 부딪치며 살아가는 문화 말이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결국 그런 문화를 직접 향유하며 살아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우디 앨런의 영화를 보는 동안만큼은 그 안에 잠시 머물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내게 그 어떤 것보다도 이 숨 막히는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하나의 공간처럼 느껴진다.

32:11
우디 앨런의 아마추어적 접근?
배우의 대사가 아닌 자막으로 각 인물의 속마음을 직접 보여주는 이 장면을 보며 잠시 영화를 멈췄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지만, 이번에는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효과적인 장면인 것은 분명하다. 유쾌하면서도 인간의 위선과 이중성, 감정의 복잡함을 짧은 순간 안에 담아낸다. 그런데 동시에 한 가지 의문도 들었다.
정말 이 방법밖에는 없었을까.
배우의 연기와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우디 앨런 정도의 감독이라면 이런 직접적인 표현조차 하나의 의도였을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나는 이 장면에서 묘한 아마추어적 감각을 느꼈다. 마지막 장면에선 어떤가. 남녀 주인공의 사랑과 헤어짐의 반복 뒤 사랑과 관련하여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아예 정리를 해버린다. 인간은 부조리하고 비합리적인 존재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럼에도 놀라운 건 그 허술함이 장면과 작품 전체를 무너뜨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그런 방식조차 영화 전체의 리듬 안에서 자연스럽게 기능한다.
그러고 보면 우디 앨런은 완벽한 감독은 아니다. 뛰어난 작품만큼이나 아쉬운 작품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그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완벽함 자체를 목표로 삼기보다, 장면이 살아 있는 상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37:13
감정적으로 독립된 존재, 앨런
우디 앨런은 세상을 구조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다.
인간을 하나하나 바라보기보다,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움직이고 관계를 맺으며 반복되는지를 본다. 마치 개미 행렬 안에 있는 개미이면서도 동시에 그 행렬 전체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처럼. 그 지점까지는 나 역시 비슷하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그의 영화를 볼 때마다, 적어도 창작자로서의 나는 아직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느껴졌다. 그 이유를 오랫동안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다 한 장면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저 장면의 대사를 과연 저렇게 쓸 수 있었을까. 아마 지금의 나는 쓰지 못했을 것이다. 그 차이는 통찰력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내 감정 안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인간을 구조적으로 바라보더라도, 그 구조는 결국 내 감정이라는 필터를 통과한다.
반면 우디 앨런은 자신의 감정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있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을 대사로 옮기기보다, 관객이 무엇을 느끼고 어떤 질문을 품게 될지를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창작자가 자신의 감정 안에 머무르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그 안에서도 얼마든지 위대한 작품은 만들어질 수 있다.
하지만 우디 앨런에게서는 조금 다른 종류의 자유가 느껴진다.
그는 인간 군상을 구조적으로 바라볼 뿐 아니라, 자신의 감정으로부터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것을 관찰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누군가 자신의 감정을 토해내는 작품을 본다는 느낌보다,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하나의 현상처럼 응시하는 시선을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42:15
Jazz I - 형식과 본질
이 장면에서 JAZZ가 흘러나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문득 왜 우디 앨런은 자신의 영화에 늘 JAZZ를 선택하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JAZZ를 가장 대표하는 특징은 즉흥성과 변주에 있다. 하나의 멜로디를 따라 감정을 점층적으로 쌓아가는 BALLAD와 달리, JAZZ는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방향을 바꾸고 변주하며 예상 밖의 흐름을 만들어낸다.
그 순간 깨달았다.
우디 앨런의 영화가 바로 그렇다.
그의 영화는 하나의 서사를 향해 직선적으로 나아가기보다, 이야기를 이어가다가도 불현듯 메타적인 장면이 튀어나오고, 독립적인 씬이 등장하며,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의 흐름으로 돌아온다. 각각의 장면은 독립적으로 기능하면서도 전체 리듬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멜로디에 의존하기보다 즉흥과 변주를 반복하는 JAZZ의 구조와 닮아 있다.
물론 그가 JAZZ를 선택한 이유가 이것 하나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디 앨런의 영화는 끊임없이 인간을 열린 존재로 바라본다. 선과 악, 옳고 그름, 사랑과 배신 어느 하나를 단정하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인간을 하나의 결론이 아니라 질문으로 남겨둔다.
그러한 본질을 가장 자연스럽게 품을 수 있는 형식이 JAZZ였던 것은 아닐까.
예술에서는 형식과 본질이 서로 맞닿아 있을 때 작품은 훨씬 큰 힘을 얻는다. 반대로 작품의 본질과 무관한 이유로 형식을 선택하는 순간, 그것은 단순한 장식에 머무르기 쉽다.
그래서 우디 앨런의 영화에서 JAZZ는 단순한 배경음악처럼 들리지 않는다.
그의 영화는 이미 JAZZ의 방식으로 사고하고 있다.

43:54
너 자신을 알라
우디 앨런은 감독이면서 동시에 배우이기도 하다.
그가 배우로서도 뛰어난 이유는 연기력이 좋아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외모와 말투, 몸짓, 신경질적인 리듬까지도 숨기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들을 영화 안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기능하는 장치로 바꾼다.
그의 대표작 대부분에서 직접 주연을 맡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의 캐릭터는 단순한 자전적 인물이 아니다. 자신이라는 재료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기 때문에, 그 재료를 가장 적절한 위치에 배치할 줄 아는 창작자에 가깝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문득 기타노 타케시가 떠올랐다.
큰 사고 이후 그는 이전처럼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을 수 없게 되었다.
많은 사람이라면 그것을 배우로서의 치명적인 결함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정반대로 갔다.
그 부자연스러운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영화의 중심으로 가져왔다.
『하나-비』를 보고 있으면, 영화 전체가 그의 그 얼굴 하나에서 시작되었다는 느낌마저 든다.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단순히 극복하려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작품이 가장 효과적으로 기능하는 형식으로 전환한 것이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자신을 숨기지 않았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정확히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예술의 형식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1:28:38
Jazz II - 창작의 방법론
지금까지 나는 제작자의 입장에서 우디 앨런과 같은 영화를 만드는 일은 감히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영역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엔,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의 뇌를 잠시 들여다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앨런에게 영화의 큰 서사는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의 그릇에 가깝다. 사랑 이야기든 범죄 이야기든, 심지어 이미 존재하는 이야기를 가져온다 해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그가 진짜 관심을 두는 것은 그 그릇 안에서 인간을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게 만들 것인가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내가 Jazz를 떠올린 이유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스탠더드 곡인 Fly Me To The Moon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버전으로 연주되어 왔다. 멜로디도 같고, 코드 진행도 거의 같다. 그럼에도 같은 곡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치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재즈는 그 동일한 틀 안에서 연주자가 어떤 변주를 만들어내는가에 자신의 본질을 둔다.
앨런의 영화 역시 비슷하다.
그는 서사라는 기본 멜로디를 유지한 채, 그 안에서 끊임없이 변주한다. 그리고 그 변주의 대부분은 독립적인 장면들에서 이루어진다.
사랑을 이야기하다가도 갑자기 종교를 이야기하고, 창작자의 불안을 꺼내며, 관객에게 "당신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를 묻는다. 그것들은 모두 하나의 서사만 놓고 보면 없어도 되는 장면들이다. 그러나 앨런은 바로 그 지점에서 영화가 가장 크게 살아난다고 믿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래서 위 장면도 흥미롭다.
일반적인 영화라면 남녀가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다시 헤어지는 과정을 그대로 따라가면 충분하다. 하지만 앨런은 자신이 겪은 일을 영화 속 연극이라는 또 하나의 형식으로 다시 보여준다. 현실을 다시 허구로 번역하는 셈이다.
이 장면이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는 하나로 규정하기 어렵다.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앨런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서사를 잠시 멈추고 다른 층위의 사유를 끼워 넣는 데 흥미를 느낀다는 점이다.
그 순간 영화는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체가 아니라, 인간을 관찰하는 공간이 된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야 비로소 그의 창작 방식이 조금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하나의 완벽한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를 유지한 채 그 안에서 끝없이 변주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영화를 떠올릴 때면, 내겐 언제나 Jazz가 함께 떠오른다.
이 영화의 마지막 1분 동안 그 파편같던 독립적인 씬들이 빠르게 지나갈 때 난 실제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빠르게 지나가는 그 장면 장면들은 마치 인생의 끝에서 주마등이 스쳐 지나가는 찰나를 떠올리게 했다.
그때는 별것 아니었던 순간들이, 마지막에 이르러 가장 큰 감정으로 되돌아오는 것.
Jazz는 박자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변주 끝에는 반드시 하나의 멜로디가 남아야 한다.
아마 그것이 우디 앨런 영화가 끝내 감정으로 돌아오는 이유일 것이다.

1:30:21
감독들과의 비교(홍상수, 이창동)
우디 앨런을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다른 감독들이 떠오른다. 비슷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무엇이 다른지를 더 선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먼저 홍상수다.
애니 홀 후반부에서 우디 앨런은 자신이 실제로 겪었던 일을 영화 속 연극으로 다시 재현한다. 현실을 허구로 한 번 더 번역하는 방식이다. 이 장면을 보며 나는 자연스럽게 홍상수의 『그녀가 돌아온 날』(2026) 을 떠올렸다. 서사 속 대사를 다시 영화 안에서 다른 배우가 연기하게 하는 방식은 너무나 닮아 있었다.
물론 이것이 직접적인 오마주인지, 영향인지, 우연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적어도 나는 그 장면을 보는 순간, 홍상수가 우디 앨런의 영향을 분명히 받았겠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둘은 같은 장치를 사용하면서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기능하게 만든다.
홍상수는 현실과 허구가 뒤섞이는 순간을 통해 하나의 사안을 보다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만든다. 인지구조를 흔드는 방식에 가깝다. 반면 우디 앨런은 인간이 자신의 감정에 매몰될 때 보지 못하는 것들을 비춘다. 감정 속에 파묻혀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조금 더 넓은 시야와 더 긴 시간축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고 또 한 명.
이창동.
이창동의 작품을 한두 편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최근 다시 본 『오아시스』 에서는 그의 치밀함이 유독 강하게 느껴졌다.
이창동은 감독이 가진 문제의식을 서사 안으로 끝없이 숨긴다. 구조는 매우 정교하고, 하나의 장면조차 허투루 놓이지 않는다. 관객은 이야기를 따라가지만, 그 안에는 감독이 설계한 수많은 장치들이 겹겹이 숨어 있다.
반면 우디 앨런은 숨기지 않는다.
그는 서사를 잠시 멈추고 자신이 던지고 싶은 질문을 독립적인 장면으로 끌어온다. 종교를 이야기하고, 창작을 이야기하며, 사랑을 이야기하다가도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바라보게 만든다.
그래서 내게는 오히려 이창동의 방식이 더 어렵게 느껴진다. 물론 그것이 우열의 문제는 아니다.
우디 앨런은 영화라는 틀을 조금 더 자유롭게 다루며, 그 자유 속에서도 관객을 끝까지 붙잡아 둔다.
이창동은 정반대다.
강한 제약 속에서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모든 것을 설계한다.
한 사람은 변주를 통해 인간을 바라보고, 다른 한 사람은 설계를 통해 인간을 바라본다.
방법은 전혀 다르지만 결국 두 사람이 도달하는 질문은 같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유토피아
언젠가 먼 먼 미래일지라도 우디 앨런과는 예술에 대해 유머러스하게 농담을 주고받으며 대화를 나누고 싶다.
그리고 이창동과는 술잔을 기울인 채, 어디까지가 인간이고 어디부터가 예술인지, 끝내 답을 내리지 못할 질문들에 대해 밤이 새도록 이야기하고 싶다.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예술가들과 나누는 대화는, 적어도 내게는 섹스보다 더 짜릿한 경험일 것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그곳은 내게 유토피아일 것이다.
구조를 다양한 매체로 작업합니다.
글과 사진, 영상 그리고 설치까지.
아래 signature에 남겨두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