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까마득한, 제가 학생이던 시절의 일입니다. 현대문학사였는지 현대작가론이었는지 내용도 가물가물하긴 한데 여튼, 토론 수업에서 한 후배의 발표 내용에 대해 질문한 적이 있습니다.
루슬렌; ... 이러이러한데, 왜 이렇게 결론을 내신 건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후배; 책에 그렇게 써 있던데요.
루슬렌; ...??? 본인이 그 부분을 인용하신 이유가 있으실 거 아니예요?
후배; 책에 그렇게 적혀 있길래요.
...
최근, 그 때 느꼈던 막막한 감정을 종종 느끼곤 합니다. 내가 이 사람에게 더 반박해서 무슨 소용이 있겠나, 이 내용에 대해 이 사람하고 더 얘기할 필요가 없겠구나, 이 사람에게서는 여기 적혀있는 거 이상의 무엇이 나올 리 없겠구나, 라고.
이 책의 저자, 홍진기 교수는 이 부분을 파고듭니다. 저자는 최근 교단에서, 학생들의 보고서와 문장들이 놀라울 만큼 논리적이고 매끄럽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글 속에 당연히 있어야 할 고민과 망설임, 길을 잃었다가 다시 생각을 붙잡은 흔적... 즉, 한 사람이 세상을 통과하는 고유한 방식이 사라진 점을 지적합니다.
다시 말해, 놀라울 만큼 탄탄한 보고서의 한 부분을 "이 부분은 왜 이렇게 생각했나요?" 라고 질문을 하면, 학생은 당황한 채 생각이 멈춘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쓴 문장인데도, 그 문장이 함의한 사고에는 단 한 번도 걸어가 본 적이 없는 것 처럼.
커뮤니티 게시판에서도 많이들 보셨을 겁니다. AI의 답변을 캡쳐하거나 긁어서 그대로 붙여넣습니다. 많은 경우, 얄팍하게도 자신의 질문 수준이 드러나는 것을 걱정하거나 혹은 편향된 것을 스스로도 눈치채서인지 질문 내용은 또 지우고, 답변만 붙여넣습니다. 그래서, 그런 글에 댓글을 달기도 싫고, 읽기도 싫습니다. '그 사람의 사유와 고민'이 없는 글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세상을 통과하는 고유한 방식'이 없는 글이기 때문에 커뮤티니에 올라온 글임에도, 역설적으로 그 글의 작성자와는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습니다. 차라리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제가 직접 AI한테 물어보고 말죠. 그리고 그러면, 추가 질문이나 답변도 AI는 성실하게 답해줍니다.
사고의 과정은 인간의 뇌에 흔적을 남긴다고 합니다. 사고를 통해 뻗어나간 사고 회로들은 다양한 사례에서 빠른 사고의 통로가 되어 줍니다. 사고의 바다에서 길을 잃었더라도 한 번 그렇게 만들어진 회로들은 다른 사례에 마주쳤을 때 비유가 되고, 추론이 되며, 예측이 됩니다. 비록 처음에는 AI가 인간보다 훨씬 더 빠르고 정확하게 결과를 만들어 낼 지 몰라도, 그것이 반복되며 사고 회로들을 연결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AI의 추론 과정과 결과를 평가할 수 없게 됩니다.
AI 는 확실히 굉장한 도구입니다. 제 주변을 보아도,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AI를 활용합니다. 누군가는 검색기나 번역기로 사용하고, 누군가는 엑셀 수식을 물어보며, 메일을 보내기 전에 검토하고, UI 샘플 이미지와 적용 예제를 만들고, 한 달 자료를 통째로 긁어 보고용 자료를 만들고, 프로그래머들은 아예 옆에 띄워놓고 일을 합니다. AI가 없을 때 몇 시간이 걸릴 일을, 혹은 몇 명이 달라붙어 할 일들을 이제 혼자서 딸깍 누르고 쇼츠를 보며 기다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호모 사피엔스. 흔히 '생각하는 사람'으로 번역되는 종입니다. 사고를 외주하고, 생각을 멈추고 결론만 받아든다면, 그 때에도 우리는 과연 '생각하는 사람' 이라는 존재로 남아 있을까요?






자신의 경험을 체화하고, 사고를 통해 다시 현실로 가져오지 못하는 지식은
문자일 뿐이죠.
좋은 말씀과 책추천 감사합니다.
지식과 지혜라니, 정말이지 간결하고 멋지게 요약해 주셨네요!
길지 않고 재미있는 책이예요. 추천드립니다.
나온 지 한달 남짓 된 따끈따끈함도 장점이죠!
논리를 모르거나 내용 이해를 못하는것도 심각하지만
내용이 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어요.
이미 추론 단계를 외주한 인간들은, 결론을 평가할 근거도 없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