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그해 여름, 나는 뉴욕의 한 사진 현상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주급을 받아 한 푼씩 모으다 보니, 어느 날 뜬금없는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예고도 없이, 그녀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내가 가진 미국 관광 비자는 여러 번 드나들 수 있는 복수 비자였다. 게다가 처음 뉴욕에 도착했을 때 받은 육 개월 체류 허가가 아직 남아 있었다. 그 기간이 차기 전에 잠깐 나갔다 다시 들어오는 것쯤은 문제가 되지 않을 터였다. 조금은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었지만, 그녀를 볼 수만 있다면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티켓을 끊었다. 그리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하고 나서야, 그녀에게 연락을 했다. 그녀가 깜짝 놀라며, 버선발로 뛰어나와 나를 반겨줄 거라고 믿었다. 그 수많은 편지를 써 보내던 사람이니까.
그런데 그녀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하필 내가 아르헨티나에 머무는 바로 그 기간에, 가족과 여행 일정이 잡혀 있다고 했다. 몇 번인가 더 통화를 했지만, 돌아오는 말은 같았다. 가족 여행 때문에 만날 수가 없어 아쉽게 되었다고, 미안하다고.
나는 당황했다. 편지 속의 그 사람과 전화기 너머의 이 사람이 정말 같은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무엇을 무릅쓰고 이곳까지 왔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고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그녀를 원망했다.
결국 나는 그녀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채 뉴욕으로 돌아왔다. 걱정과 달리 재입국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고, 또다시 육 개월의 체류 허가를 받았다. 그리고 그때를 기점으로, 우리의 연락은 자연스럽게 끊어졌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그날의 그녀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다른 사정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편지에 미처 적지 못한 어떤 일이. 나는 지금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돌이켜보면, 나는 애초에 남을 수도 있었다. 가족을 따라 미국으로 가는 대신, 아르헨티나에 남아 그녀 곁에 있는 쪽을 택할 수도 있었다. 나도 성인이었으니까. 그 무렵 어머니는 내가 식구들과 함께 움직이도록 무척 애를 쓰셨다. 몸이 잠시 멀어져도 마음은 변하지 않을 자신이 있던 나는, 결국 가족을 따라 떠나기로 했다. 미국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으면 그녀를 데려오겠다는, 야무진 생각을 품고서.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그 말을, 우리는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기지 못했다.
이유가 무엇이었든, 나이가 들고 나니 이제는 알 것도 같다. 사람은 변한다는 것을. 그때의 그녀가 변했듯이, 나 또한 변했다. 그것도 수시로. 스물세 살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고, 그해 편지를 써 보내던 그녀와 그 후의 그녀 역시 다른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누구를 원망할 일도 아니다. 그저 사람이 변할 뿐이다.
이제 나는 그녀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그녀에게 보낸 편지들이 그러하듯, 그녀도 아마 이 시절을 오래전에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 상자가 남았다. 파란 Duna도, 심바 인형도, 스물세 살의 우리도 이제 없지만,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뉴욕으로 부쳐진 이 편지들만은 여기 남아, 그때는 그랬겠구나 하고 나직이 일러준다.
그거면 되었다.
중년에 들어선 지금 되돌아 보면 그때의 짜릿하고 죽고 못살았던 느낌은
그 나이에서만 느낄수 있는 축복 같은거였죠.
지나간 내추억들에 감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