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 멀어지는 계절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다. 그 무렵 우리는 자신했다. 우리는 다를 수 있다고. 그러나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편지의 내용도 횟수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우리라고 예외는 없었다.
5월이 시작되자마자, 그녀에게 힘든 소식이 하나 겹쳤다. 오래 일하던 소매 옷가게 일를 그만두게 된 것이다. 파트타임으로는 맞지 않는다는, 어쩔 수 없는 사정이었다. 그날 그녀의 편지는 유난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냥 맘이 우울해… 이럴 때 네가 옆에 있어 줬으면 하는 생각이 들어… 뭐 옆에 있다고 해서 해결책이 생기는 건 아니겠지만… 몹시 술이 마시고 싶은 밤이야… 맥주고 소주고 포도주고 닥치는 대로 마시고 필름이라도 끊겼으면 싶은데…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내 맘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나와의 약속을 지켰다. 술은커녕 커피도 마시지 않고, 열받는 마음을 우유 1리터로 달랬다고 했다.
너랑의 약속 때문에 술은커녕 커피도 못 마시고 열받어서 우유를 1리터나 마셔버렸어…
그날 그녀는 뱅크의 '가질 수 없는 너'를 들으며 편지를 썼다. 가사는 여기 옮기지 않는다. 다만 그녀가 그 노래 제목을 두고 던진 한마디는, 그녀 다운 말이라 남겨둔다.
"사랑하는 마음으로도 가질 수 없는 사람이 있어"래.. 누가 그러겠어. The bank 지…
슬픔의 한복판에서도 말장난을 잊지 않는 사람. 그것이 그녀였다. 그러나 그 장난기 아래로, 이 계절의 그녀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잠을 못 자고, 그 왕성하던 식욕마저 잃었다. 밥알이 모래알 같다고 했다.
요즘엔 또 잠을 못 자.. 새벽 2시쯤이나 돼야 자나 봐. 그리고 식욕도.. 그 왕성하던 식욕도 떨어져 버렸어. 옛날마냥. 약속 때문에 억지라도 먹어보려고 노력 중인데.. 왜 밥풀이 모래알 같이 느껴지는 건지 원…
가게를 완전히 그만둔 뒤, 그녀는 conservatorio 수업을 저녁반으로 옮기고 하루 다섯 시간씩 플루트 연습에 매달렸다. 무언가에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으면 견딜 수 없던 그 마음을, 나는 이제 안다. 어느 편지에서 그녀는 이렇게 적었다. 노래 선생에게 레슨을 받고 온 날이었다.
한 시간 레슨시간엔, 노래하는 시간엔 다른 아무것도 생각할 겨를이 없어… 세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 같았어… 내 이름도 생각이 안 날지경이었어… 완전히 노래에 미쳐서 살기로 결심했어….
그러나 그렇게 자신을 몰아붙이는 나날 속에서, 그녀는 가장 지친 문장을 남기기도 했다. 5월의 어느 주일, 목이 아프고 모든 것이 버겁던 밤이었다.
요즘엔 굉장히 힘들어… 아침에 눈을 떠야 하는 게 너무 싫어.. 그냥 잠에 든 채로 이 세상을 떠나버렸으면 할 때도 있어….. 목이 굉장히 아프다… 그만 쉬고 싶어…
이 문장 앞에서 나는 오래 멈춘다. 그때 나는 이 편지를 어떻게 읽었을까. 스물세 살의 그녀가 얼마나 지쳐 있었는지, 그 밤의 무게를 나는 얼마나 알았을까. 지금의 나는, 그 밤의 그녀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 다만 30년이 지난 자리에서, 그 문장을 못 본 척 지나치지 않고 오래 들여다보는 것으로 뒤늦은 마음을 대신할 뿐이다.
5월 말, 그녀는 나를 미국에 보내놓고 처음으로 우리가 함께 걷던 공원에 갔다고 했다. 워크맨을 들고, 추운 밤거리를 혼자 걸었다고.
너를 미국에 보내놓고 아마 처음으로 Parque 엘 간 것 같아. 너랑 같이였을 땐 더웠구.. 지금 나 혼자 갔을 때 추웠다는 것 밖엔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었어… 벌써 5월 말이야.. 난 믿어지질 않아. 네가 떠난 지도 3개월이 지났어. 빨리 겨울이 가버리고 다시 여름이 되었으면…
그리고 그녀는 물었다. 그때 우리는 어떻게 되어 있을까,라고. 그 물음에 나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선뜻 답하지 못한다.
그땐 우린 어떻게 되어있을까?
6월이 되자 편지의 간격이 눈에 띄게 벌어졌다. 5월의 마지막 밤을 적은 편지에서 그녀는 여전히 나를 기다린다고 했지만, 그 다짐의 문장들 사이로 피로가 배어 있었다.
오월의 마지막 밤입니다. 사랑하는 이가 간절히, 아주 간절히 보고파지는 밤이기도 합니다. 외로움에 떨며 보내야 할 이 밤에 당신의 이름을 가슴속 깊은 곳이 그리면서 보내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영원히 당신을 기다립니다..
6월 1일, 감기에 걸려 콧물을 훌쩍이며 쓴 편지를 끝으로, 그녀의 편지는 한 달 넘게 끊겼다.
그리고 7월 7일. 오랜만에 도착한 편지의 온도는, 예전과 확연히 달랐다. 절절함 대신 분주함이 앞섰다. 하루하루가 시간이 모자라 쩔쩔맨다는 말로 시작한 그 편지에는, 미안하다는 말이 먼저 나왔다.
무지 오래간만에 편지를 쓴다. 미안해. 핑계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정말로 하루하루가 시간이 모자라서 쩔쩔대거든…
그날은 교회 행사로 온종일 바빴고, 피리 연습 시간을 쪼개 편지를 쓴다고 했다. 예전 같으면 몇 장을 채웠을 텐데, 이제는 그럴 시간도 마음도 예전 같지 않았다. 그녀는 한 달 넘게 안 자른 머리 이야기를, 다친 발가락 이야기를 담담히 적었다. 그리고 편지의 끝은 이러했다.
보고 싶다.. 언제쯤 볼수있을런지… 너를 위해서 기도하는 "나"를 잊지 마. 안녕. 견우와 직녀가 만난 날… 아마 "오작교"에서지?
7월 7일. 견우와 직녀가 일 년에 한 번 만난다는 그날. 그러나 그해 칠월칠석에 우리는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이 편지가, 그녀가 내게 보낸 마지막 편지가 되었다.
상자 속 편지는 여기서 끝난다. 뜨겁게 매일같이 이어지던 편지가 뜸해지고, 끝내 멎었다. 그 침묵 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이제 마지막으로 이야기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