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 떠남
1996년 2월 19일. 그날은 구정이었다. 우리는 아침에 함께 그녀의 집에서 떡국을 먹었고, 마지막으로 같은 지하철을 타고 그녀를 가게까지 데려다주었다. 저녁 여덟 시가 조금 넘어 공항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날 밤, 홀로 집에 돌아온 그녀는 곧바로 편지를 썼다.
공항에서의 우리는, 그녀의 표현대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썰렁했다.
네게 안겨서 울고 싶었지만 나의 꿈이었을뿐, 짧은 입맞춤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우린 악수로 헤어져야 했고, 문으로 들어서려는 너의 뒷모습 조차도 뚜렷히 볼수가 없었어. 아주 먼곳에서 희미한 너의 뒷모습을 보며 혼자서 슬퍼했지. 무슨 죄인인 마냥 네곁에 조차 갈수가 없다니… 왜 넌 사람들의 시선을 그렇게 의식해야만 했는지… 왜 난 너에게 잘가라고 손을 흔들수가 없었는지…
부모님과 주위의 시선 때문에, 우리는 마지막 순간에 악수밖에 나눌 수 없었다. 그녀는 사람들이 다 떠난 뒤에도 문틈으로 내 마지막 모습을 지켜보았다고 했다.
계단에 올라서는 순간까지 너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어. 눈 앞이 흐려서 가끔씩 너의 모습이 아른거렸지만 끝까지 널 보고 있었어…
집에 돌아온 그녀는 내가 남기고 간 인형을 끌어안고 있었다.
심바를 끌어안고 있어. 너와 관련된 물건을 만지며 조금이라도 너를 느껴보려고 애쓰고 있어. 아직까지도 네가 떠났다는게 믿겨지질 않아. 내 두눈으로 봤는데도… 내일이면 내게 전화할것만 같아. 불쑥 나를 찾아올것만 같아. 술이 마시고 싶었어. 모든걸 잊게 해줄것 같아서… 근데 너와의 약속때문에 참을수 있었어. 힘들어도 아파도 스스로 버틸께…
그날 밤 그녀는 내가 탄 비행기의 항로를 헤아렸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떠난 지 네 시간, 다섯 시간 뒤면 뉴욕에 닿을 거라고. 그러고는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지금 이 순간도 네가 보고싶어서 미칠것만 같아. 보고싶단말야 바보야.. 보고싶어. 보고싶어. 보고싶어. 다음에 헤어질땐 절대로 오늘처럼 헤어지지 않을거야. 너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지는 않을거야. 지금부터 난 혼자인거지? 근데 아닌것 같아. 왜 그럴까? 아직도 너의 자취가 남아있는걸까? 난 아마 병이날꺼야.. "상사병"이….
그렇게 그녀 혼자 남은 나날이 시작되었다. 다음 날 새벽, 천둥 번개와 함께 소나기가 쏟아졌다. 그녀는 부은 얼굴로 가게에 나가야 했다. 그녀의 오빠가 안아주며, 울고 싶은 만큼 울어버리라고 했다고 한다. 점심으로 Ravioles를 먹었다는 대목에서, 그녀는 이렇게 적었다.
아! 밥먹기 싫어 죽겠는데도 오늘 점심 먹었다.. 칭찬해 줄거지? Ravioles 먹었어. 넘어가질 않아서 울면서 먹었어. 약속때문에.
약속. 그 무렵 편지에는 이 말이 자주 나온다. 떠나기 전 나는 그녀에게 몇 가지를 부탁했던 모양이다. 술을 마시지 말 것, 커피를 줄일 것, 끼니를 거르지 말 것. 편지를 읽다 보면 내가 무슨 말을 남겼는지, 그녀의 대답을 통해 어렴풋이 되짚게 된다. 정작 내가 한 부탁의 원본은 어디에도 없다.
가는 사람보다 남는 사람이 더 서러워. 빨리 삼월이 됬으면 좋겠다. 바쁘면 시간이 날아갈거 아냐? 내일이 12월이면 좋겠다. 자꾸만 밖을 보게돼.. 네가 돌아올것만 같거든. 바보…
며칠 뒤, 그녀는 밤새 전화를 기다렸다. 새벽까지 전화기 옆에 붙어 앉아 있다가, 혹시 전화가 오면 깨워달라고 어머니께 부탁하고서야 잠이 들었다. 어머니는 전화기를 머리맡에 두고 주무셨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 그녀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이것이었다.
아침에 깨서는 제일먼저 손등에 입맞춤을 했어. 네가 내게 얘기해준 영화의 주인공처럼.
어머니는 그녀를 이렇게 달래셨다고 했다.
다른 나라에가서 아무것도 모를테고 더구나 친구집에 있으면 국제전화를 맘대로 할수 없는 형편이었을거라 하시면서 더 기다려보자고 위로해주시더라구…
밤에는 세 번이나 잠에서 깼다고 했다.
2번은 네가 옆에 있다는 느낌때문에, 꼭 네가 내옆에 누워있는것 같은 느낌때문에 놀랍고, 반가워서 깼었어. 근데 나의 환상이었을뿐 깨어보니 내 주위엔 까만 어둠뿐, 아무도 없는거야..
그녀는 이 모든 것을 사랑이라고 불렀다.
네가 Chile 여행 갔을땐 가슴이 텅텅 빈것같은 느낌은 없었는데.. 지금은 가슴뿐 아니라, 머리속도 텅 비어있는것 같은 느낌이야. 이게 사랑이구나라는 생각이들어.
긴장이 풀린 탓인지 그녀는 목이 붓고 여름 감기에 걸렸다. 그래도 편지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편지 쓰는 일을 살아가는 낙으로 삼겠다고 했다.
너를 만나는 그날까지 아마도 난 삶의 낙을 네게 편지쓰는 것으로 정해야 할것같아.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일을 네게 알리는것이 즐거움이 될거야. 아주큰 즐거움이..
그녀는 그리움을 노래로 쏟아붓겠다고도 했다. 그 무렵 그녀는 부활절 칸타타의 독창 연습을 앞두고 있었다.
너를 향한 그리움은 다 노래할거야. 너를 향했던 나의 사랑, 정열을 모두 노래에 쏟아부을거야… 네가 내곁에 없을 그 시간동안만 말야.. 아무도 내 소리를 흠잡지 못하게 만들어야지.
전화가 닿는 날이면 그녀는 목이 메었다. 통화를 하면서도 자꾸 눈물이 돈다고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괜찮아지기는 커녕 더 보고싶고, 더 네가 그립고, 더 만나고 싶어져. 맘 같아선 당장이라도 오라고 하고 싶지만 능력없는 연희.. 그러지도 못하고, 기다린다는 말밖에 할수가 없고..
그녀는 나를 부르는 이름을 자꾸 바꾸었다. 어느 편지에서는 스페인어로 나를 향한 그리움을 적었다.
네가 없는 이곳.. 태양이 없는 세상과도 같아. (고무줄 끊어진 팬티라는 비유 보다는 좀 고상하지?) 정말로 그래. 아무것도 아닌것 같아. 이곳이…
슬픔과 장난이 한 문장 안에 나란히 놓이는 것, 그것이 그녀의 편지였다. 태양이 없는 세상이라 말해놓고, 곧바로 스스로를 웃음거리로 삼아 그 무게를 덜어냈다. 나는 그 리듬을, 이제야 다시 읽으며 새삼 오래 들여다본다.
파마를 했다는 소식도 이 무렵의 편지에 있다. 내가 떠나면 파마를 하겠다고 벼르던 그녀였다.
"쨘" 파마했다. 그랬잖아. 너 가고 나면 파마할거라구… 나의 생머리를 마지막으로 본 남자는 너야. 다시 만날때도 생머리일꺼야… 머리에 화풀이 비슷한걸 한거지 뭐..
어머니가 나와 무슨 사이냐고 캐물으셨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녀는 결국 사실대로 털어놓았다고 했다.
그래서 불었어. "후" 하고 말야.. 헤 뻥이구.. 진짜 불었어.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구.. 네가 와서 데려갈 때를.. 결혼할거냐고 물으시더라구.. 가능하다면 그러구싶다고도 얘기했구..
2월의 끝 무렵, 어느 편지의 끝에서 그녀는 노래 한 곡을 옮겨 적었다. 멜라니 사프카(Melanie Safka)의 노래였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사랑하는 이에게 이별을 말하는 것이라는, 그런 노래였다고만 적어둔다. 가사는 여기 옮기지 않는다.
또 다른 편지는 온통 내 애칭으로 시작되었다. 레오, 레오, 레오… 스물몇 번을 잇달아 적어 내려간 뒤, 그녀는 이렇게 썼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부르다 내가 죽을 이름이여!
그것은 그녀가 소월의 시 한 구절에 나의 애칭을 얹어 만든, 그녀만의 문장이었다. 편지의 맨 끝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크리스티나, 크리스티나, 크리스티나…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네가 부르다 죽을 이름이여!
그 무렵의 어느 날, 그녀는 편지 한 통을 온전히 다른 사람의 글로 채웠다. 유안진의 산문 '지란지교를 꿈꾸며'를 한 자 한 자 손으로 옮겨 적어 부친 것이다. 예쁘고 좋은 글이라고, 그래서 내게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 산문은 여기 옮기지 않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늙어갈 때까지 곁을 지켜주는 벗이 되기를 바라는 글이었다. 스물세 살의 그녀가, 떠나버린 사람을 향해 그 글을 밤새 베껴 적는 모습을 나는 이제 와 떠올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