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 이별의 예감
1995년 12월, 남반구의 부에노스아이레스는 한여름이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10월의 그날로부터 두 달이 채워져 가고 있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 아르바이트로 일하던 소매 옷가게를 지켰고, 나는 곧 떠날 사람이었다. 어느 날, 텅 빈 가게에 홀로 앉아 그녀는 이렇게 썼다.
혼자서 가게에 쭈그리고 앉아있으려니까 무지 무지 심심한 거 알아? 그리구 심심하다 보니까 별 이상한 상상까지 하게 돼… 뭐.. 그런거 있잖아. 인생에 전혀 도움이 안되는 그런 것.. 내가 지금 쓰는 이 편지 또한 그중의 하나는 아닐까 하는 생각두 들어.. 모르겠어. 왜 편지를 쓰기 시작했는지.. 그냥 너의 모습이 눈앞에서 왔다갔다하구.. 목소리가 들릴듯 말듯하단 느낌밖에 없는데.
심심하다는 말로 툭 시작한 편지는, 그러나 몇 줄 못 가 다른 곳에 가닿았다.
그냥 모든게 확실치 않다는 느낌이 들어. 네 위치. 입장. 또 내 위치. 입장. 미래의 너와 나. 과연 어떻게 될까? 무서워. 혼자서야 한다는게. 자신도 없고.. 차라리 만나지 말았어야 했을 사람들이었나봐… 우리는… '이별' 이라는 두 글자를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건 사실이지만 조만간 우리앞에 다가올 "현실" 속에 포함되어 있기때문에 상관하지 않을수가 없는거야… 그냥 슬프다. 박씨 아저씨…
박씨 아저씨. 그녀는 가끔 나를 그렇게 불렀다. 우리는 만난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나에게는 떠날 날짜가 있었다는 것을. 그녀는 그것을 '현실'이라고 불렀다.
이틀 뒤, 크리스마스이브에도 그녀는 같은 자리에서 편지를 썼다.
크리스마스 이브날에 가게에 쭈그리고 있으려니까 무지 심심하다. 바람이 불고. 햇빛이 있고. 선물을 들고다니는 사람들도 많은데... 내 옆엔 네가 없고. 선물을 사러 돌아다닐 수도 없고. 준비한 카드도 없어서 이렇게 종이위에 글씨를 적고있는 나는... 왜 이렇게 처량해 보일까? 우선 크리스마스를 축하한다고 하고 싶은데... 예수님이 탄생하신 이날을 축하하고.. 이틀후면 두달이 되는 우리의 만남을 축하해도 될른지... '95'년의 성탄은 너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내는 날이 되진 않을까?
그때 내 차는 파란색 Fiat Duna였다. 차 안에는 라이온 킹의 아기 사자 심바 인형이 그리고 릴라 인형이 놓여 있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에는 나 말고도 파란 Duna를 모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같은색 차를 볼 때마다 가슴이 내려앉았다고 했다.
가끔씩 지나가는 Duna Azúl을 볼때마다, 릴라도 심바도 없는 썰렁한 파란차를 볼때마다 왜 이렇게 가슴이 조마조마 한건지... 원.. 좋은 한주가 되길 바래.
해가 바뀌고 1월이 되자, 나는 잠시 그녀 곁을 떠났다. 미국으로 이주하기 전, 가족과 함께 칠레와 아르헨티나 남부로 떠나는 마지막 로드트립이었다. 열흘이면 돌아올 줄 알았던 여행이었다. 떠나던 아침, 그녀는 삐삐 소리에 잠에서 깼다.
아침에 삐삐소리에 잠에서 깨어났어. 떠날거라고… 아무일 없이 잘 갔다오길 바라면서도 무언가 허전한 생각이 들었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잠시라도 내 곁을 떠나있는게 너무 싫다. 넌 지금쯤 어디에 있을까? 어제는 심술이나서 잘 다녀오란 소리도 제대로 하질 못했어. 후회스럽게도… 아무일 없이, 즐거운 여행이 되길 정말 바래. 보고싶다.
돌이켜 보면 그 2주간의 여행은, 곧 닥쳐올 진짜 이별의 예행연습 같은 것이었다. 겨우 이틀이 지났을 뿐인데 그녀는 견디기 힘들어했다.
겨우 이틀을 못봤을 뿐인데.. 왜 이렇게 보고 싶은건지… 너두 내가 보고 싶을까? 나만큼… 하루하루가 고문인것 같다. 피가 마르는것 같다… 그냥 싫다. 너랑 떨어져 있다는게… 이틀밖에 안됐는데도 난 이런데 너, 미국으로 가버리면 난 어떻게 견딜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날 밤 그녀는 이승환의 '천일동안'을 듣고 있었다. 노래의 마지막 한 소절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적었다.
천일은 고사하고 백일이 조금 지나면 너와난 헤어져야만 하는데… 왜 이렇게 안 좋은 생각만 날까? 네가 미치도록 보고 싶다.
편지는 날마다 이어졌다. 셋째 날의 편지에서 그녀는 이렇게 헤아렸다.
세번째 편지구나 벌써. 몇번째 편지까지 써야 네가 내곁에 있을까? 보고 싶다. 다른 말로는 지금 내 마음이 표현되지 않을거야. 무지 보고싶다. 하늘만큼 땅 만큼. 빨리 일주일이 지나가버렸으면 좋겠다. 눈을 감았다 떴을때 일월 중순이면 되게 좋겠다.
여행 중에도 우리는 가끔 전화로 목소리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그녀는 통화가 끝날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전화로 들려오던 너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돈다. 네게서 전화가 오면 꼭 재밌는 얘기, 즐거웠던 일을 말하려고 생각했는데 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왜 눈앞이 흐려지는건지… 준비했던 모든 얘기를 잊어버리고 네가 걱정할 말만 해버린것 같아서 마음이 아프다. 난 왜 항상 이럴까?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더 보고싶다.
하루는 아침부터 종일 비가 내렸다. 그녀는 비를 좋아했고, 나도 그랬다.
아침부터 비가 내렸어. 어제 무지 무지 덥더니만 드디어 비가 내리더라구.. 하루 종일… 이슬비, 소낙비, 가랑비, 보슬비… 온 종일 비가 내리던 거리.. 쓸쓸하다고 해야하나? 사람들도 많지 않았고, 어두운 하늘과 선선한 바람.. 그리고 물 흐르는 소리.. 비 내리는 날… 소나기가 내리는 날.. 너와 같이 있어 본 적이 없는건 같다는 생각 말야. 너두 비오는 날을 좋아한다고 했잖아. 나두 비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그날 그녀는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를 듣고 있었다. 그리고 내 애칭을, 그날 하루에만 백 번은 넘게 써본 것 같다고 했다.
Leo란 이름을 오늘도 백번이 넘게 쓴것 같아. 웬수덩어리… 보고 싶어. 굉장히. 잘 있는 거지? 난 아마도 잘 있나봐.
엘오, 레오(Leo), 박씨 아저씨. 그녀는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나를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편지 끝의 서명도 크리스티나였다가, 연희였다가 했다. 여러 이름을 오가는 그 변덕이야말로 그녀라는 사람이었다.
1월이 그렇게 지났다. 2월 초, 우리는 ‘Mar del Plata’로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내 생일을 핑계 삼은 2박 3일이었다. 그 바닷가에서의 시간은, 우리에게 남은 마지막 좋은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 2월 19일. 내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는 날이 다가왔다. 떠나기 전날, 함께 있을 시간이 하루도 남지 않은 그 새벽에 그녀는 편지를 썼다.
이제 너와 같은 하늘아래 있을 시간이 24시간도 되질 않는다. 시간이 그냥 멈춰버렸으면 좋겠다. 널 보내기가 싫어. 보내고 싶지 않아. 나 많이 슬퍼.. 매일밤마다 너를 보내기가 싫어서 울었어. 우린 처음부터 헤어져야 할 날을 알았기때문에 덜 슬플줄 알았어. 근데 지금 내 맘은 그렇지가 않아. 이게 너와 나의 현실이기때문에 받아들여야 한다는걸 알면서도 거부하고 싶은게 사실이야.
그녀는 나에게 고맙다는 말을 꼭 하고 싶다고 했다.
나를 사랑해주고, 나를 걱정해주고, 나의 안좋은 버릇, 습관을 바로 잡아주려고 노력도 하던 너를 정말로 사랑해. 그리고 고마워. 네가 나에게 남겨준 많은 물건들을 볼때마다 아마도 널 보고싶어 할거야. 열쇠고리, 인형, 카세트, 사진, 꽃, 등등등…
그러고는, 언제까지나 기다리겠다는 약속을 적었다.
넌 꼭 잘해나갈수 있을거라고 철썩같이 믿지만 만약에 만약에 만약에 너무 힘들면 내게로 돌아와. 난 이곳에서 언제까지나 널 기다리고 있을께. 너를 사랑하니까 말야. 잘가.. 몸 건강하구, 너를 기다리는 나를 한시라도 잊지 말아줘. 사랑했었고, 사랑하고, 사랑할거야.. 영원히…
같은 새벽, 그녀는 또 편지 한 통을 썼다. 시곗바늘이 새벽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벌써 시계바늘은 새벽 4시를 가르치고 있다. 너를 보내며 절때 울지않을거라고 여러번 다짐을 했지만 나 전혀 자신이 없어. 네 앞에서 눈물을 보이더라도 나무라지마… 싫은 사람이면 슬플필요조차 없잖아.
그녀가 두려워한 것은 홀로 남는 일이 아니었다.
내가 이곳에 남는건 별로 두렵지가 않아. 너를 기다리는 그 시간들이 두려운게 아냐. 기다리는 시간들속에 밀려올 그리움이 무서운거야 나는… 네가 보고싶어지면 난 어쩌지? 네가 한없이 그리울땐 어떻게 해야하지? 매일 아침 눈을 뜨는 순간마다 너를 향한 그리움때문에 괴로와지면 어떻게 견디지?
그녀는 처음 만난 날부터 그때까지의 일들이 영화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했다.
처음 만났을때부터 지금까지의 일들이 생각나. 한장면, 한장면마다 마치 영화를 보듯 머리속에 스쳐지나가. 소중한 추억들, 소중한 시간들, 소중한 우리의 삶… 미국에 가서도 잊으면 안돼.
나에게도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있다. 언젠가 우리는 지하철역에서 크게 다툰 적이 있었다. 다시는 보지 말자는 말을 내뱉고, 서로 등을 돌려 각자의 방향으로 걸어갔다. 화를 삭이지 못한 채 내 갈 길을 걷고 있는데, 잠시 후 누군가 내 등 뒤를 와락 끌어안았다. 울면서 달려온 그녀였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 나와 그녀 둘뿐인 것 같았다. 나는 그 장면을 아마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편지의 끝에서 그녀는 어느 노래의 가사를 옮겨 적었다. 지금은 헤어지지만 언젠가 다시 만나리라는, 그런 노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이렇게 적었다.
사. 랑. 합. 니. 다
날이 밝으면 나는 떠날 것이었다.